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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씨뿌리는 자와 밭의 비유 (마 1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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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뿌리는 자와 밭의 비유 (마 13:1-23)

(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비유 말씀은 41개나 됩니다. 비유만큼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그 의미를 생생하게 전하는 것도 없습니다.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보다 1만달란트 비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오래토록 기억할 수 있게 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물질을 선하게 사용해야한다는 점을 경각시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하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만듭니다.

예수님은 어렵지 않게 가르치셨습니다. 삶에 지친 민중들에게 딱딱한 교리나 이론적인 사변은 오히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을 것입니다. 이는 당시 서기관이나 랍비들과는 전혀 다른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보다 더 귄위가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그 가르침이 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재들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대해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해변가로 나가시자 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앉아 가르치시는데 멀리서 씨를 뿌리는 자의 모습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방금 읽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비유가 그렇듯이 비유의 제목을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에 따라 그 이야기 주제도 달라집니다. 오늘 비유 말씀은 ‘밭의 비유’라고도 할 수 있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밭의 비유라는 제목을 정하면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등 네 종류의 밭 중에서 자신은 어느 밭에 속하는지 평가하고 옥토가 되도록 노력하자는 교훈이 주어질 것입니다. 만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는 제목을 정하면 씨 뿌리는 자가 씨 뿌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낭비와 손해에 대해서 언급하는 비유가 될 것입니다. 이 비유의 교훈은 실망치 않고 노력하면 결국은 좋은 땅에서 얻은 결실로 능히 그 손해를 보상받게 될 것 이라는 교훈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 모든 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씨앗입니다. 말씀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이 씨앗이 어느 땅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다릅니다. 같은 이슬을 먹고도 독사는 독을 만들고 젖소는 우유를 만듭니다. 오늘 말씀의 네 종류의 밭을 보며 자신은 어느 밭에 속하는지, 자신의 문제는 무엇인지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말씀은 제한이 없습니다. 비나 태양이 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리지 않고 내리듯이 하나님 말씀도 가리지 않고 임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선한 자와 악한 자로 갈리는 것일까요? 동일한 은혜가 주어짐에도 어떤 사람은 그 은혜를 받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할까요?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을 닫고 있으면 주변에서는 홍수가 나도 자기 안에는 가뭄만 계속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10) 곧 마음을 열라는 뜻입니다.

옛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파종법이 우리와 달랐습니다. 우리는 땅을 갈아엎고 평평하게 고른 후에 씨를 뿌리던지 아니면 따로 모판에서 키운 어린 싹을 밭에 심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먼저 씨를 뿌린 후 밭을 갈아엎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나 가시떨기가 있는 곳이라도 나중에 갈아엎을 생각으로 씨를 뿌립니다. 돌밭은 석회암층을 말하는데 이곳은 불과 땅 깊이가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곳입니다. 이런 곳은 땅을 갈아엎을 때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리다 보면 이런 네 종류의 밭에 떨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길가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길가는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입니다. 그래서 땅이 단단해져 있습니다. 씨가 이곳에 떨어졌지만 단단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사이에 새가 kf아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주님은 19절에서 길가 밭을 해석하시면서 악한 자가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 밭이 길가밭이 되어 있을 경우에는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선입관들로 인해 단단해져 있습니다. 우리 위로는 소크라테스가 지나가고 플라톤이 지나갔습니다. 아담 스미스와 칼 맑스가 지나가고, 니이체가 지나가며 단단해져버렸습니다. 이에 더해 예부터 내려온 전통, 자기의 경험, 자기 생각들로 인해 아주 콘크리이트처럼 단단해져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이런 편견들로 가득 차 있으면 예수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쉬운 비유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면 이 비유들이 마치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문처럼 여겨집니다. 10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묻자 예수님은 이는 천국의 비밀에 관한 말씀이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며 13절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그렇지만 사실 비유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얼마나 이해하기 쉽습니까?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려운 말씀처럼 되었는가? 14, 15절 말씀이 그 이유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문제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완악해지고 귀는 둔하고 눈을 감았으니 아무리 쉬운 말씀을 해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진리는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단단해져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고 대화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을 보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입관이 있으면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이 지역 사람은 이래’, ‘이 나라는 이래’ 하며 우리는 이미 선입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 사귈 수도 없고, 그 속 깊숙이 들어가기도 힘듭니다.

말씀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자기 이성으로 자기 경험으로 다 제한시켜 놓으면 도무지 믿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하고 믿고 나가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돌밭

돌밭에 뿌려진 씨는 처음에는 보통 땅처럼 자랍니다. 그러나 흙이 얇기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낮에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자 타고 마르고 맙니다. 뿌리 없는 신앙입니다. 주님은 이 돌밭에 떨어진 씨를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절입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뿌리 없는 신앙은 말씀으로 인해 환난을 받을 때 곧 시들고 맙니다.

초신자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모임에도 참석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좀 시들해집니다. 그러다 신앙으로 인한 문제가 생기면 쉬 돌아서고 맙니다. 옛날, 옛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무엇이든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뿌리가 깊어야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땅속 깊은 곳에 있는 영양분과 습기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뿌리를 내리는 때는 오히려 외부에서 환난이 불어 닥칠 때입니다. 뿌리는 세찬 바람이 불 때 더 깊어집니다. 나무는 차가운 겨울의 한기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뿌리내리지 않은 것들은 다 얼어 죽고 맙니다. 문제 앞에 지지 마세요. 이 문제를 신앙으로 이기고 나면 우리 신앙의 뿌리는 더 깊어져 있을 것입니다.

돌밭은 또한 그 마음속에 바위처럼 단단한 상처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 마음속에 우울증의 바위덩어리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노와 상처의 바위 덩어리를 안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릅니다. 겉으로는 신사 같아 보이고 대단한 신앙인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바위덩어리들이 차지하고 있어 예수가 도무지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이 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주는 참된 기쁨과 생명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이런 분들은 환난의 때에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공격적이 됩니다. 심한 경우에는 자기 분이나 상처를 못 이겨 자살에 이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회는 정치 과잉입니다. 선거철이 되면 특히 심합니다. 오랜 분단과 전쟁의 상처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념으로 인한 분노의 바위덩어리가 우리 민족 가운데는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기 반대파를 보면 괜히 분노가 솟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신앙이 예수님에게로 깊이 뿌리내리는 것들을 방해합니다.

바위 덩어리와 같이 굳어진 마음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 앞에 노출되어 깨지지 않고는 결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귀를 즐겁게 하는 잔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석을 부수는 망치와 방망이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 말씀은 방망이입니다. 돌과 반석을 깨뜨리는 방망이입니다.

제가 진정으로 거듭나게 될 때 제게 경험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불방망이와 같았습니다. 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는 말씀을 듣고 깨졌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마치 방망이가 제 뒤통수를 치는 것 같았습니다. 어찔했습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내 자아가 깨지면서 심한 통곡과 함께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우리 속 중심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깨지지 않고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시떨기 밭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처음에는 잘 자라지만 곧 가시떨기에게 추월을 당하고 맙니다. 모든 잡초들이 그렇듯이 가시떨기는 생명력이 더 강합니다. 양분을 다 빨아 먹습니다. 위로는 햇볕을 막기에 힘차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가시떨기 밭 신앙에 대해 22절에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8장 14절에서는 여기에 일락 즉 세상에 대한 즐거움을 하나 더 추가합니다. 염려, 물질에 대한 욕심, 쾌락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을 전적으로 주길 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관심이 딴 곳에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앉아서도 열심이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식이 몇 프로 올랐을까에만 관심이 가 있는 사람입니다.

염려라는 것은 헬라어로 “메림나오”입니다. 이 뜻은 ‘마음이 나뉜다’는 의미입니다. 염려하면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걱정, 집안일 걱정, 회사일 걱정을 하니 말씀이 들어오겠습니까?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시간은 최소한 이런 걱정을 차단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들립니다.

재리의 유혹 또한 우리 에너지를 다 빨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누누이 물질은 단순한 중성적 존재가 아니라 주인과 같은 권세가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물질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 우리 사랑의 에너지를 다 빼앗아 갑니다. 양분이 물질로 다가는데 어떻게 말씀의 씨앗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잠언서의 아굴의 기도가 좋습니다. 잠언서에서 아굴은 그 평생에 두 가지 것을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여러분 물질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없으면 불편하고 자존심이 상합니다. 친척들의 모임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은 돈 있는 사람입니다. 너무 궁핍하면 담을 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돈이 많으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아굴의 기도는 물질의 위력을 무시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마음은 전심으로 하나님만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물질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쾌락이란 것도 우리를 말씀의 은혜에 빠지는 것을 방해합니다. 골프에 빠진 사람은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 머릿속은 그린필드를 해맵니다. 어느 목사님이 바둑에 푹 빠졌습니다. 일주일 내내 바둑만 두다 주일 예배 강단에 오르니 사람들의 머리가 온통 바둑돌로 보입니다. 검은 머리는 흑돌처럼 보이고 흰머리는 백돌처럼 보입니다. 이 목사님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소리 내어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바둑의 유혹이 사라졌다 싶어 기도를 마무리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는 그만 마지막 “아멘” 할 것을 습관적으로 “아다리” 하고 말았답니다.

잡기에 능하고 재주가 뛰어나면 하나님 믿기가 힘듭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전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자에게 돈 버는 비결을 묻기 위해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그 청년을 절벽에 서 있는 나무 옆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나무에 매달리라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그 말대로 나무에 매달렸습니다. 그 부자는 이번에는 한 손을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부자가 되기를 열망했던 청년은 이 명령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부자는 마지막으로 그 나머지 손마저도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당황한 청년이 외칩니다. “그러면 떨어져 죽습니다.” 그러자 부자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런 자세로 한 번 들어온 돈은 결코 놓지 말게. 그게 부자 되는 비결일세”

이처럼 우리 주님을 놓지 말기를 바랍니다. 놓치면 죽는 자세로 주님께 전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구원하고 배고픔을 잊은 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좋은 땅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자연을 보면 항상 풍성합니다. 요즘은 농사 기술이 발달해서 한 톨의 볍씨에서 850개의 쌀알이 나온다고 합니다. 백배의 축복이 전혀 불가능한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를 설명하기를 23절에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에서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의 축복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데 있습니다. 말씀에 전념하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할 때 풍성한 결실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는 가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좋은 열매를 맺는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우리의 문제는 생명의 길이, 축복의 길이 바로 여기 있는데 욕심만 앞서고 마음만 급하다는 데 있습니다. 충분히 하나님 말씀 읽으십시오. 예배에 전념하십시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열매 있는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이나 이런 방법을 마치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러분 결코 돌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 빨리 앞서 갈 수 있고,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씨뿌리는 자를 위한 주님의 격려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렸는데 일부는 길가로 떨어지고 일부는 돌밭과 가시떨기에 떨어져 결실을 제대로 맺지 못한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 때문에 실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들이 이런 실패와 손해들을 능히 보상해 주기 때문입니다.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는 날에는 그동안의 수고나 아픔은 깨끗이 보상을 받습니다.

우리 인생의 수고가 그렇습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노력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실망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 모든 수고의 곡괭이 끝에 금맥이 발견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지나간 모든 수고가 오히려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전도의 수고도 그렇습니다. 전혀 열매가 나타나는 것 같아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뿌린 열매는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손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서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오늘 내가 거두는 전도와 부흥의 열매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미리 뿌려놓은 기도의 열매입니다. 그렇게 옥토에 뿌려진 씨에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때 우리는 지난 모든 수고에 넉넉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이를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이 그러했습니다. 무리들은 떡만 먹고 신기한 기적을 구경하기 위해 주님을 따랐을 뿐입니다. 이 무리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길가 밭처럼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와 같이 옥토에 떨어진 씨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초대교회를 이루고 땅 끝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파했으며 결국 로마 사회를 뒤집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고라면 어떤 실패에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좋은 결실을 얻게 될 날이 이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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