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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요 10: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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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요 10:19-32)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

  어느 목사님 아들이 언젠가 "정말 엄마 아빠가 나를 낳았어요?" 하고 묻더랍니다. 그 때 사모님께서 한 마디 했더니, 다시는 그 질문을 안하더랍니다. "내가 데려와서 키울 수 있었으면 너같이 못생긴 놈 데려왔겠냐? 잘 생기고 똑똑하고 속 안썩일 놈 골라왔지."

여러분 중에도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일까? 궁금해 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명확한 기준을 말씀하셨습니다.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양은 다 약한데 듣는 것 하나는 예민합니다. 양은 목자를 보고 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양을 예로 드신 것은 우리도 주님을 보고 따라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그저 몇 명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이 들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30장21절에서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대로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양이고 우리에겐 선한 목자가 계십니다.  우리 마음대로 일을 저질러놓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란 그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이것이 양이 사는 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목자로 여기고 예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서 주님이 인도하심에 따라 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실력이 있고 없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힘이 강하냐 약하냐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어려우냐 환경이 얼마나 힘드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약해도 미련해도 상관 없습니다. 여건과 형편이 어렵고 힘들어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에겐 선한 목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목자이시고 나는 양처럼 오직 예수님의 인도만 따르며 사는 자가 될 때는 나 자신이 약해도 세상이 험해도 문제가 커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보다도 크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지혜자보다 크신 지혜이십니다.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서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인가?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 묻게 됩니다. ‘네게는 정말 주님의 음성이 들리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아직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대해서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저도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드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지난 주간까지였지만 믿음으로 사는 남자 성도들의 모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대해서 13주 동안에 말씀과 훈련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훈련 과목 중에 하나에도 목자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문제는 해결받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실제로 말씀을 들을 때는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어렵다고 합니다. 잘 못 들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그 때 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순종에 열쇠가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힘들게 여기시면 ‘나는 주님의 음성으로 깨달은 것에 대해서는 순종을 했는가?’ 하는 것을 한번 꼭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랬다면 오늘 여기에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이끌지 않으셨다면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을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내의 강요에 의해 왔든 남편에 의해서 끌려왔든 친구에 위해서 끌려왔든 누가 끌고 왔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방법이 다를 뿐이지 결국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4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순종입니다. 이미 들은 주님의 음성에 순종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완전히 순종하겠다는 결심이 없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데 어려움을 겪으실 것입니다.

  헬렌 켈러가 어느 날 숲 속을 다녀온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 친구는 별반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헬렌 켈러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두 눈을 뜨고도 두 귀를 열고도 별로 특별히 본 것도 들은 것도 없고, 할 말조차 없다니.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음성에 대하여도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여러분, 밤에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면 많은 소리가 귀에 들려옵니다. 시계 소리, 바람 소리, 물 떨어지는 소리,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실제로 우리가 들으면서도 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남편되시는 분들은 아내의 소리를 듣습니까? 사랑을 표현해 달라는 아내의 말이 들립니까? 아내되시는 분들은 남편의 소리를 듣습니까? 존중해 달라는 남편의 말은 들립니까? 자기 말을 들어달라는 아이들의 소리는 들립니까? 관심을 가져달라는 이웃의 소리는 들립니까? 듣고자 하는 관심이 없어서 못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것도 실제로 주님이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듣고 싶은 것에만 관심이 있지,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주님의 마음이 무엇일까?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여, 말씀하시면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립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을 깨달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장17절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순종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여러분, 순서를 정확히 기억하셔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다음에 하나님 뜻대로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못 듣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 뜻대로 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들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들었으나, 목자의 음성으로는 듣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20절에서 귀신들려 미쳤다고 했습니다. 24절에서는 마음에 의혹을 불러일으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반응한다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관심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신이 순종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성경 말씀 묵상이 되는 지 스스로 진단해 보면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성경 묵상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묵상이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시편 1편2절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라는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 정말 여호와의 율법이 즐거울 수 있습니까? 저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기만 해요.”

여러분, 말씀 묵상이 힘든 이유는 순종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소원이 강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합니다. 잠잠히 말씀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는 말씀 묵상을 통해서 열립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이 강한 사람은 말씀 묵상을 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너무 한가하게 생각이 듭니다. 그는 신비적인 체험만 기다립니다. 자기 문제와 관련된 바로 그 응답, 그 말씀을 하나님이 직접 들려주기를 원합니다. 지금 성경 말씀을 읽는 것이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씀을 뒤적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금요 철야기도회 때마다 말씀 기도를 합니다. 설교를 대신하여 성경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함께 듣는 시간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설교해 주시기를. 무엇을 기도하게 하실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리면서 말씀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놀랍습니다. 그 날 그 시간에 다같이 성경을 읽고 성령께서 마음에 깨닫게 하신 것을 서로 나누는데, 누가 설교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은 정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구나!’ 그런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정말 기도 조차 주님이 친히 인도하십니다!

  지난 두 주간 철야 기도회 말씀 기도 시간에 사도행전 10장-11장을 읽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하시려는데, 너무나 힘들어 하십니다.

먼저 하늘에서 온갖 짐승들이 담긴 보자기를 내려 주시면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분명히 들었습니다. 이런 정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누가 거부하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거부합니다. 유대인들은 음식 규정이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아무 짐승이나 잡아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먹으라고 하셨는데도 베드로 자기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니다. 자신이 가진 기준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느낌이 들지요?
그러고도 베드로가 정확히 하나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하신 하나님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도착했을 때, 다시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그제야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는데 고넬료를 만난 다음 베드로가 너무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의 은혜를 베푸시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행 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함으로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라”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복음을 전하니 고넬료와 그 온 집에 성령이 임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또 놀랍니다. 그게 놀랄 일입니까? 그렇게 주님께서 몇 번 씩이나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 보낸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여시는 말씀을 주셨는데도 베드로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왜 내게 정확히 말씀을 해주시지 않을까?’ 답답해 합니다만,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데도 못 알아듣는 우리를 주님이 너무너무 답답해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잘 못 듣겠다고 답답해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답답하신 것입니다. 우리 자아가 그렇게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번 옳다고 여긴 것은 좀처럼 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해도 안 꺾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못 듣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강해서 자기도 모르게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께서 제 아내와 한 10년을 넘게 상담을 했습니다. 남편이 도무지 믿음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부부 생활에 문제가 있어서 오랜 동안 상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꼭 전화 상담을 할 때 “사모님, 꼭 이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할까요?” 라고 말하기 시작해서 “하나님은 제 기도 만큼은 안 들어주시나 봐요.” 로 끝나는 상담을 10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사모님,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이 내게 주신 십자가구나! 받아들이자!’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리고 ‘내가 왜 발버둥만 치고 있었지? 이것이 남편과 아이들을 위하여 져야 할 십자가인 것을.’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기도를 했답니다. “주여, 이것이 제 십자가입니까? 제가 지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음이 그렇게 편해졌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답니다. 편안해진 자기 마음이 너무 놀라와, 전화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혹시 저처럼 자기 십자가인데,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까닭에 고통당하는 분이 계시면 제 이야기를 해 주세요.” 하고 덧 붙이셨답니다.

  이 집사님이 하나님의 소리를 이 날 처음 들은 것은 아닙니다. 이미 주님의 음성을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에는 그 소리가 원하는 응답이 아니었기 때문에 듣고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편이 기적적으로 변하기만 원했지,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꾸 “하나님께서 내 기도는 응답해 주시지 않아요!” 하고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기로 결단하니 하나님의 답을 듣게 된 것입니다.

  3개월 쯤 지나, 지난 수요일에 전화가 또 왔습니다. 제 집사람은 가슴이 두근거리더래요. 또 “사모님,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하는 소리가 나올까 봐서요. 그런데 “사모님, 오랫 동안 기도해 주셔셔 너무나 감사해요.” 하면서, 그 때 이후로 남편이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더랍니다. “사모님, 그 동안 제가 하나님을 오해했어요. 그게 너무 송구스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네요.”

여러분이 정말 양이 되면, 양이 된다는 말은 순종을 결단했다는 말입니다. 양은 목자에게 순종하므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비로서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살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순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노력으로 순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죽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노력으로 순종하는 것은 언제나 실패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끝까지 순종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 것이지요? 죽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우리 죽음인 것입니다. 진정한 순종은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순종하는 자가 주님의 음성을 명확하게 듣습니다. 죽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고집이 없습니다. 조급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이 우리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은 자라야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음으로 처리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나 자신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고집도 없습니다. 조급할 것도 없습니다. 그 때 비로서 주님께 완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해결하실 수 있도록 내어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나를 시험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순종하는 자만이 사탄의 미혹도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은 사람은 마귀가 건드릴 자리가 없습니다.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 마음을 흔듭니다.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4절)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C.S.루이스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짧은 책을 썼는데 대단히 재미있는 책입니다. 서열이 높은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또 다른 악마 웜우드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로 쓴 이 책은 악마가 우리 인간을 어떻게 미혹하는지 재미있게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환자는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적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제가 내용을 악간 각색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웜우드에게
  언젠가 내가 맡았던 환자는 골수 무신론자였는데, 대영 박물관에서 책 읽기를 즐겼지.
  그런데 하루는 책을 읽고 있던 환자가 '진리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거야. 아차! 하는 사이에 원수가 내 환자 곁에 바짝 달라붙었던 거야.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20년 동안이나 공들여 쌓아온 탑이 통째로 흔들리는 순간이었어.
  그래서 나는 그 즉시 말했지. ‘밥먹을 시간이야!’ 그러자 환자가 시계를 보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군.
  도서관을 나온 환자는 길을 걷다가 갑자기 “진리에 대한 문제는 밥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라고 말하잖아. 아마 원수가 무엇이라고 말했나 봐. 우리로서는 원수가 사람들에게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 전혀 엿들을 수가 없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내가 즉시 말했지. ‘중요하고 말고, 그러나 이건 점심 먹기 전 자투리 시간에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야. 점심 먹고 와서 개운한 머리로 다시 생각하자.’ 라고 말하자 환자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거야. 다시 식당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어.
  그런데 이 환자가 석간 신문이 나왔다고 외치는 신문팔이 소년을 보더니 다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진지해지는 거야. 또 원수가 그에게 무엇인가 말하는 것이었어.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와 지나가는 73번 버스를 보여 주었지. 그리고 그의 머리 속에 근사한 생각 하나를 단단히 심어주었어. ‘진리는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서 책을 읽고 있을 때 깨닫는 것이 아니야. 진리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아는 것이라구. 이러한 삶의 현실 앞에 그 따위 추상적인 진리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자 환자 자신도 그 때가 위험한 고비였다고 느꼈던 모양인지, "삶의 현장이 더 중요해, 보이는 것만이 우리의 실제야!" 라는 말을 훗날 입버릇처럼 뇌까리곤 했어.
  물론 그 환자는 지금 우리 아버지 집에 안전히 거하고 있지.“
                  너를 아끼는 삼촌 스크루테이프로.

성도 여러분, 명심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영적으로 답답하고 인생의 방향을 알지 못한 채 두렵고 염려하고 꼬꾸라지는 삶을 살 것입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놓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양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인도하시기에 강한 자입니다.

  C.S.루이스는 “평화로울 때는 하나님께서 속삭이시지만, 위기에는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조상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 교인들이 경험하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평안할 때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같다가도, 힘든 일이 닥치면 전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나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내가 안 죽으면 어려운 일을 겪으면 나는 더 큰 어려움에 빠집니다. 마귀가 내 주변 상황으로 내 마음을 더 격동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이 더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못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7-8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빌립보서 2장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4장2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양인 것은 주님만 따르는 자이기 때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양은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먹고 사는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 보다 잘나야 한다는 조급함도 필요 없습니다. 목자만 따라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이 받는 복입니다. 양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면서 오직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이 시간에 제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혼란이 제 앞에 있고 큰 산이 앞에 가로막혀 있고 두려움과 염려가 제게 너무 많습니다. 저는 주님의 양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제가 할 일은 주님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님, 무서워하지도 않고 방황하지도 않겠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께 순종하겠으니 말씀해 주시옵소서.”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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