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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종류의 의와 결국 (롬 9: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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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의와 결국 (롬 9:30-33)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의 추천으로 예전에 테니스를 배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초보라 레슨을 처음부터 받게 되었고 그 목사님은 테니스를 10년이상 즐겨온 선수급이었습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요 레슨을 받다가 멍하니 그 목사님 게임하는 것 구경하다 코치에게 지적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수급인 목사님이 하루는 레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목회 그만두고 테니스 선수하기로 했습니까 그렇게 잘 치시면서 웬 레슨입니까 그때 그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 일년 중 한달 정도는 레슨을 받곤 합니다. 테니스는 원래 폼인데 게임만 하다보면 폼이 무너져 있기에 멋진 테니스를 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 한번씩 폼을 교정하기 위해 레슨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오늘 로마서 9장을 마무리하는 가운데 본문은 복음이 복음되는 원리를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롬1장부터 부지런히 들었던 말씀인데 부지런히 들었던 복음의 원리인데 행여 복음안에서 폼이 무너졌을지 모르는 염려속에 복음이 복음되는 원리를 강조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7:21-23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천국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들은 우리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했고 귀신도 좇았고 많은 권능도 행했는데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믿음이 믿음인 줄 알았는데 믿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열심히 했는데도 은혜가 은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단이라는 말은 한문으로 표기하면 다를이에 끝단입니다. 처음에는 비슷한데 처음에는 같은 것 같은데 나중에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배속에서 많은 말씀들을 듣지만 말씀이 말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요 복음이 복음인 줄 알았는데 얼마든지 복음이 복음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을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의 폼을 한번씩 교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유대인이요 그리고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은 한마디로 하면 자격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들었고 율법도 알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민족이었습니다. 마땅히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의 은혜를 입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이방인은 자격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율법과도 상관없는 자요 메시야의 기다림과도 상관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저들은 의를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땅히 복음에서 구원에서 제외되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게 나왔습니다. 하나님도 율법도 모르던 이방인들 의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던 이방인들은 의를 얻었고 의를 좇던 이스라엘은 의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입었고 유대인들은 용서도 구원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평생에 메시야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예수와 상관없는 자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까? 매일 교회를 다니며 봉사하며 수고하던 집사님이 의와 구원을 얻지 못하였고 매일 술만 마시고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사람이 어느날 예수를 믿고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의를 추구하던 유대인에게는 의가 주어지지 않았고 의를 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악에 빠져있던 이방인들에게 의가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해답을 주기 위해서 두 종류의 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방인들에게 의를 얻게 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겼던 행위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유대인들은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내게 의로운 것이 전혀 없던 이방인들은 자격없는 자였기에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가지게 되었고 행함으로 의를 이루며 자격 있는 자였고 유대인들은 참 의요 절대의인 예수그리스와 충돌하고 만 것입니다.

3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찌 그러하는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예수그리스도와의 충돌입니다. 33절에서 읽고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8:14절에 29:16절에 예언된 말씀이니 시온의 눈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은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에게만 영접되지 행위로 말미암은 자에게는 충돌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과 예수께서 끊임없이 충돌하셨던 이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헌금도 많이하고 기도도 하고 종교적열심이 대단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세리 창기와 같은 죄인들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성전에 가까이 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앞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였습니다. 오 하나님 저는 저 세리와 같지 않았습니다. 나는 많은 것으로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반대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죄인 이들 중 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신앙생활하는 중에 가장 위험한 것이 있다면 언젠가부터 자격있는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시절 한 나이가 지극하신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일제시대에 한국교회는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바로 강제로 신사참배를 하도록 한 일본의 압제앞에 교회와 목사들은 큰 고초를 당해야 했습니다. 위기앞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님도 있었고 적당히 참배하신 목사님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님들이 참배에 동참하신 목사님들과 신학적인 노선이 다르다하여 교단을 분리하였습니다. 은사셨던 목사님도 거부하여 옥고를 치루고 죽음을 앞두고 있다 해방이 되어 풀려났습니다. 풀려난 후 타락한 목사님들과 함께 할 수없다며 평생을 저들을 정죄하며 신사참배한 것들이 하며 비판의 칼날을 내려놓으신 적이 없으셨다 합니다. 한국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한경직 목사님도 신사참배 하셨거든요. 저들의 비난앞에 감옥에 가지않았던 목사님들은 늘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합니다. 신사참배에 거절하여 의롭다 하신 목사님들은 목회가 잘 안되고 참배하고 감옥에 안간 목사님들은 목회가 잘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사참배 안 한 것이 평생에 그것 하나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사로잡혀 더 이상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인 목사님들은 그저 죄인입니다. 벌을 받아도 정죄를 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늘 죄인으로서 늘 은혜로 사는 자로 서니 목회가 은혜스러운 것입니다. 남보다 기도많이 했다고 그것이 자기의가 되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합니다. 전도많이 했다고 자기 의가 되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합니다. 헌금많이 했다고 그것이 자기 의가 되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평생에 겸손해야 합니다. 평생에 자격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죄인됨의 고백도 예수안에서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와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 가장 안타까운 것은 사단은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유대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했던 성도가 가장 자격없는 자라 말했던 성도가 어느날에서부터인가 은혜가 아니라 율법으로 율법적 신앙으로 자격있는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32절 부딪힐 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가 기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기준이고 주님 마음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 판단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돌에 부딪힌 경험이 있습니까 길을 가다 책상모서리에 부딪힌 경험이 있습니까 33절은 기록된 바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합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가장 큰 용서를 받은 자로 첫 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라 마지막 구절은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고 율법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거치는 돌은 무엇입니까. - 아멘 -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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