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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익한 것을 쫓지 말라 (렘 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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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것을 쫓지 말라 (렘 2:4-13)

참 신기한 이론이 있습니다. 흔히 생각할 때에 사람이 소리를 알아듣는 것은 주변이 조용하고 오직 그 소리만 들릴 때에 가장 잘 들을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랍니다. 사람이 특정한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잡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잡음 가운데 특정한 그 소리를 분별해서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아’라는 음성을 알아듣는 것은 기준이 되는 어떤 소리와 비교할 때 인식이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잡음이 하나도 없이 완전 방음된 장소에서는 아무리 큰소리로‘아!’라고 외쳐도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현재 듣고 있는 소리를 비교해볼 기반적인 소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험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이론이 그렇다고 합니다.

항상 들리는 잡음들 속에 들어야 할 소리를 듣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올바른 삶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가장 가정 어리석기도 한 것이 인간입니다. 지진의 징후가 있고, 쓰나미가 밀려오는 상황이 되면 야생동물들은 그것을 감지하고 서둘러 도망을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인간은 정작 그것을 알지 못하고 유유자적하다가 참변을 당합니다. 먼 하늘을 바라보고 비가 언제 올지를 예측하고 보이지 않는 땅 속을 탐사하여 지하자원이나 수맥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바로 눈앞에 있는 눈썹은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며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나 당장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이익을 위하여 큰 유익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런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마땅히 섬기며 따라야 할 유다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무익한 것을 좇아 하나님을 안타깝게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스스로 깨트리는 인간들, 이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본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을 위해 들어야 할 소리,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남 유다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말미암아 가슴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1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두 가지 악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스스로 물을 담아두려고 웅덩이를 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웅덩이조차도 물이 고여지지 않는 터진 웅덩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터진 웅덩이>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헛되고 무익한 우상,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보고자 하는 그 모든 행위들을 말합니다.

사실은 지금 유다가 이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다른 것에서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까? 선조들로부터 광야생활이후에 이어진 가나안 땅에서 누린 하나님의 복이 얼마나 큰데 이러느냐는 것입니다. 7절이 그 말씀이거든요. 과거 선민 이스라엘이 그 험난한 광야생활에서도 여호와를 향한 신앙을 지켰는데 지금 남 유다는 기름진 땅에 살면서도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의 기업인 가나안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여러 가지 잡음 속에서도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며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별 문제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곧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 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허탄한 것이란 히브리어로 그 뜻이“바람, 허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헛되이 행했다."는 말은"바람처럼 허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다 백성들이 바람에 속아 바람을 따르다가 바람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바람이라는 말은 정말 다양하게 쓰입니다. 자연 현상 그대로 봄바람, 강바람, 하늬바람, 마파람 등으로 쓰이는 것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거지에 일어나는 이상한 행동을 바람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이 있을까요? 신바람, 춤바람, 늦바람, 치맛바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세상 풍조를 가리킬 때도 바람이란 말이 쓰입니다. 여러분, 많이 들어 보셨죠? 세풍이니, 총풍이니, 노풍이니, 박풍이니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바람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가장 쉽게 이해가 가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을 만한 말은 뭐니 뭐니 해도 압권은 바람났다고 하는 말입니다. 아내와 남편으로 만났을 때는 우리 죽을 때까지 서로만 사랑하자고 약속하고 만났는데 살다가 둘 사이의 사랑 말고 또 다른 사랑이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하여간 바람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지기 때문인지, 바람처럼 언제 어디서 오는지 몰라서인지, 사람의 마음을 바람처럼 뒤흔들어 놓기 때문인지 이럴 때를 바람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미쳐서 적극적으로 날뛰고 돌아다니는 것을"바람피운다."고 이야기 합니다."바람났다"는 말은 심증만으로 추측하는 정도라면"바람피운다."는 말은 공공연하게 자타가 인정하고 심증뿐만 아니라 물증까지 확실할 때 흔히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람피운다는 것은 그냥 바람 난 것보다 심합니다. 남이 알든 말든 상관없이 내놓고 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유다백성들이 바람이 났다는 말입니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대놓고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우상과 눈이 맞아 바람이 나서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아예 하나님을 버리고 바람피우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꼭 붙들고 지켜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각종 바람이 붑니다. 그 바람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바람을 이겨야 합니다. 나아가 그 바람을 잠재워야 합니다.

오늘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과거 광야시대의 이스라엘백성들, 그러니까 지금 유다의 선조들의 이야깁니다. 물론 그들도 광야에서 패역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 정도가 지금 유다와 같을 정도였고 그 속에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하며 사망한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광야를 지났지만 그래도 그들 입에서는 현재 유다 백성들 같이"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배척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망각하고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삶에서 하나님을 빼버릴 정도로 뿌리 깊은 불신앙에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책망 받기 전에 이것을 알고 인정하고 돌이켰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걸 못하고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습니다.

[탐 피터스]라는 사람이<혁신의 궤도(The Circle of Innovation)>라는 책에서 미국의 첨단 기술의 산실인<실리콘벨리>의 성공요인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실리콘벨리의 성공요인은 무엇보다도<실패에 대한 인정>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디에서 잘못 되었는지 그 실패의 원인을 명확하게 알고 대처하는 것이 바로 위대한 실리콘벨리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실패에 대한 명확한 인정과 그 원인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하물며 신앙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유다가 이것을 알았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당장 편한 것, 내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을 위해서는 신앙도 버리고, 하나님도 버리고 달려가는 유다의 모습을 보고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오늘 유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가장 소중한 가치에 대한 신실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익한 것을 좇았던 유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충분히 우리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하는 황금만능주의, 명품이 그의 인격과 품위를 높여 줄 것이라고 착각하는 명품제일주의, 외형적인 조건들이 진정한 인간의 행복을 만들어 줄 것으로 믿는 외형주의, 하나님 이외에도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속성으로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비뚤어진 신앙관, 구원에는 반드시 하나님이지 않아도 된다는 종교다원주의에 의지한 불신앙,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함...이 모든 것들이 소중한 가치에 대한 신실하지 못한 오늘의 모습들입니다.

내일 모레면 추석입니다. 민족 고유 명절이라는 미명하에 갖가지의 불신앙적인 행해지기도 하는 심히 염려스러운 때입니다. 풍성한 곡식과 그로 말미암은 감사는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다도 이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내가 저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우리도 풍요를 누리고 먹고 마시고 있는데 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하여 심지어는 우상을 향하여 헛된 감사를 드리며 나갈까가 심히 걱정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엉뚱한 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문젭니다. 잘 못된 길은 가지 말아야 하는데 가고 있다는 게 문제란 말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려가다가"여기부터는 길이 없습니다."라고 적힌 문구를 보면 차를 돌려서 되돌아 와야 됩니다. 끝까지 가보겠다고 고집부리면서 내달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습니다. 그런데 죽는 줄 알면서도 꼭 달려 보는 희한한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여러분, 진리 아닌 것은 따라가면 안 됩니다. 길이 아니면 돌아와야 합니다.

[박노해 시인]은<길 잃은 날의 지혜>라는 시에서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 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 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우리에게도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근본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익한 것을 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철학자[버트란트 러셀]은"신을 가정하지 않고서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근원을 돌아보지 않고 어떻게 우리 자신을 논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울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듯이, 하나님을 통해서만 우리의 현실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물이 고이지 않는 웅덩이>를 버리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을 찾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이 계절, 이 명절에 무익한 것들과 허탄한 것들을 좇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탄식케 하는 아픔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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