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뜻을 이루려는 자 (느 2:1~10)

  • 잡초 잡초
  • 732
  • 0

첨부 1


뜻을 이루려는 자 (느 2:1~10)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에 탄 소식을 듣고 슬퍼하던 느헤미야는 회개와 금식을 통해 뜻을 세웠다. 그 뜻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삶의 현실은 달랐다. 공무원으로 일해야 했다. 그의 국적이나, 그의 직업이나, 그의 위치를 볼 때 자기 뜻을 털어놓고 말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어느 나라건 성벽을 재건한다는 것은 군사적 목적의 도모이다. 식민 국가의 백성으로 잡혀와 강대국 나라의 관헌으로 일하는 느헤미야가 바사 나라에게 성을 다시 중건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어떤 면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뜻은 높지만 현실은 달랐다. 느헤미야가 본국 성벽 재건론에 대해 언급했다가는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어려운 문제였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느헤미야가 겪고 있는 삶의 고통을 대면할 때가 많다. 신앙의 가치로서 세운 거룩한 뜻을 붙잡고 가야 하는데 삶의 현실이 괴리되어 있어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괴로울 때가 많다. 느2:2을 보라. 느헤미야는 이상과 현실의 부딪힘에서 오는 괴로움으로 얼굴에 수색이 있었다. 그 수색을 살핀 왕의 질문 앞에서 느헤미야가 대답을 하는데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였다고 느2:3에 적고 있다. 느헤미야로서 말을 하지 않으면 뜻을 버려야 하고 말을 꺼내 놓으면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즉 관직도 빼앗기고 안정된 삶도 빼앗기고 왕의 총애를 받은 삶도 끝장나고 생명도 빼앗길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깨닫는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니다.

첫째, 뜻을 이루여는 자는 그 고민과 갈등을 짊어져야 한다. (느2:2)

뜻이 세워지지 않는 사람에겐 바람부는대로 살면 되지만 뜻이 있는 자는 남다른 눈물과 괴롬의 순간들이 내리누르는 밤을 지내야 한다. 우리나라의 위인으로 잘 알려진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왜적을 몰아내야 하는 뜻을 세웠다. 그러나 적은 수의 해군과 배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양적, 수적 모자람 앞에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를 보라.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시름의 아픔은 바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장군의 뜻 때문이다. 느헤미야도 뜻이 이루어져야 하기에 두려움의 밤을 지내며 마음의 시름을 걷어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세상 근심이 아니다. 바로 거룩한 근심이다. 먹고 살기 위한 근심이 아니다. 나라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백성을 살리고 신앙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라고 하였다. 고후7:11에도 보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뜻을 이루려는 근심은 사람을 간절하게, 변명하게, 분하게 하고 또한 두렵게 까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담대히 두려움의 짐을 져야 한다.

둘째, 뜻을 이루려는 자는 결국 결단의 때를 놓치지 않는다. (느2:3)

느2: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느헤미야는 자기 얼굴 수색의 이유를 밝히고 난 후 느2:5下에서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라며 자기 안에 있는 뜻을 드러냈다. 느헤미야는 두려워하는 밤을 지냈지만 그 뜻을 말해야 하는 결단의 때를 놓치지 않았다. 왕께서 얼굴의 수색을 문제 삼고 근심의 연유를 물어볼 때 기회를 포착하는 용기의 사람이 되었다.

사람은 일부러 상황을 만들지 않아도 어느 때, 어느 순간 뜻을 공개해도 되는 여건이 주어진다. 바로 그 주어진 순간에 머뭇거리고 놓쳐버리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결단의 때가 주어질 때 시작해야 한다. 쇠도 닳았을 때 망치로 치라는 속담이 있다. 결단의 때를 포착하지 못하면 실패자가 되고 거룩한 뜻은 물에 떠내려가고 실종되고 만다.

우리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땅을 취하라고 하실 때 갑자기 나타난 3,862평의 대지를 살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 땅을 살 수 없다고 선언한 후 새벽 제단에 엎드리면 사야 한다는 뜻이 자꾸 불이 되어 타오른다. 무엇으로, 무슨 재물로, 누구의 손을 의탁하여 등 별별 생각이 다 떠오르는데 사는 기도, 사야 된다는 소원만이 밀고 들어온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다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강한 마음의 소리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을 했다. 결단을 하고 나니 비난의 두려움, 빈대의 두려움, 빚을 지는 두려움 등 그것은 빛 앞에 사라지는 어두움 같았다. 두려움 대신 용기 백배하고 교회는 땅의 매매를 이루었다. 삶의 한 가운데서 결단의 때를 놓치지 말자. 결단의 때를 붙잡는 사람은 뜻을 이루게 된다.

일산 금란교회에는 주성민이라는 젊은 목사가 있다. 개척한 지 몇 년 안에 몇 천명이 되는 성도들이 모여 들었는데 그 교회에 대해 “서울 금란교회가 19억을 들여 예배당을 건축해 주고 시작했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김홍도 목사의 이름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이는 바로 성령의 도와주심이고 둘째로는 주 목사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김홍도 목사가 감리교 최대 교회를 이룬 것을 배우고 싶어서 김홍도 목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절대로 교역자로 쓰지 않겠다고 불가, 찾아갈 때마다 불가하다고 하여 그는 각오를 했다고 한다. 나는 목사님의 목회를 배우고 싶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뜻을 알리기 위해 결단을 했는데 불가라고 말하는 목사님 앞에서 손가락을 물어 뜯어 혈서를 썼다고 한다. 뭐라고 썼느냐 하면 “충성 오직 충성”이라고 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 결단을 보고 감동을 받아 그를 사용하였고 개척을 해 주어 크게 역사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뜻을 이루려는 자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때를 포착하면 결단해야 한다.

셋째, 뜻을 이루려는 자는 순간을 중요시 여긴다. (느2:4下)

느2:4을 보면 느헤미야는 왕의 새로운 질문 앞에 선다.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때 느2:4下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고하되...”

그는 왕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그 짧은 반 호흡 사이에서 자기의 뜻을 펼쳐야 하기에 기도한다. 곧 하늘의 하나님께 조용히 묵도하는 느헤미야가 된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나의 대답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아니면 형벌 받고 삭탈 관직의 신세가 되느냐의 순간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순간적인 묵도를 한다. 아무도 모르나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드린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경건이다. 몇 일동안 눈물의 기도, 자기를 치는 회개의 기도를 했지만 일상의 한 가운데서, 궁중의 한 가운데서 가장 높으신 왕과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을 개입시키려 한다. 느헤미야는 순간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다. 한 호흡 속에 담긴 자신의 한숨과 기도를 아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계약의 순간에 사업 경영을 펼쳐가는 순간에 즉시 곧 묵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화살 기도를 쏘아 올려야 한다. 한 순간을 승리하면 한 시간을 승리하고 한 시간을 승리하는 자는 하루를 승리하고 일생을 승리한다. 순간이 중요하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도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하고 뜻을 이루려는 자는 순간에 강한 자다. 순간 순간을 중요시 여기기에 바로 이 순간, 예배하는 이 순간, 이야기하는 이 순간에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교회는 성도들이 그 순간에 기도한다. 목사가 혼자 강단에서 성령 사역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일하는 순간에 성령을 신뢰하는 성도들이 역사하심을 위해 묵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치유가 나타나고 은사와 열매가 나타난다.

넷째, 뜻을 이루려는 자는 침착하게 일한다. (느2:7~8)

느헤미야는 느2:5에서 성읍 중건을 위해 고국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왕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응답함을 듣고 느헤미야는 조서를 요구한다.

느2:7 유다까지 여행길을 보장받는 조서와 느2:8 삼림 감수 아삽에게 집, 물, 성곽 재건을 위한 들보 재목을 제공하는 조서를 내려달라고 한다. 느헤미야는 침착하였다. 보장 받아야 할 모든 것을 세밀하게 부탁하였다. 느헤미야는 이것을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조서 내림을 허락했다고 고백하지만 (느2:8) 이 고백이 바로 느헤미야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돕는 손을 믿는 느헤미야이기에 그는 침착하다. 덤벙대지 않는다. 뜻을 이루려는 자는 믿음에서 인연한 침착함으로 나가야 한다. 왕의 호의, 왕의 은혜, 왕의 감정을 헤아리는 참착함이 저의 성벽 재건의 날수를 효율적으로 단축하게 하였다. 여기서 그의 평소의 삶은 왕께 신뢰받는 삶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술 관원에 최선을 다하며 섬긴 그의 됨됨이가 왕과 왕비 앞에서 신임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려면 더 많은 관련 요소들이 필요하다. 신임받는 인품이다. 사람됨, 이것은 어떤 세계, 불신자의 세계에서도 통하는 언어이다. 그러므로 품성을 개발하라. 이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나의 우유부단과 게으름 때문에 뜻이 꺾여서는 안된다. 느헤미야처럼 거룩한 뜻을 위해 도전하자. 그러면 문제가 풀리고 길과 방법과 해답이 주어진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돕고 계신다.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뜻을 이루려고 결단하라. 순간 순간 기도하며 필요한 것을 요구하라.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심을 가슴 벅차도록 체험하게 될 것이다. 뜻을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이 돕고 계신다. 뜻을 이루려는 자는 지금 시작하라. 실수 없으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