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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하나님의 백성 (빌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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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하나님의 백성 (빌 3:3)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소련의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는 혁명 전야에 파란 많은 생애가 펼쳐지는 가운데 지식인들의 굴곡된 일면을 노출시킨 작품으로서 장군과 타냐의 대화는 매우 골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장군이 타냐에게 어떻게 해서 아버지를 잃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타냐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얼버무렸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다그쳤습니다. 이때 타냐는 대답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그러자 장군이 타냐에게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네 친아버지는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 할지라도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거다"라고 말합니다.

유대 땅에서 사람 취급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은 사람이고,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람이 아닌 그런 차이가 유대 나라 백성들이 가지고 있음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창세기 17장 14절에 보면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쳐 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합니다.
백성 중에서 끊쳐 진다는 말씀은 "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뜻입니다.

사무엘상 17장 26절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 골리앗을 보고하는 말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데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런 말을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합니다. 8일만에 받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중간 할례자! 그러니까 나이가 30대, 40대 되어서 할례를 받은 사람도 많습니다.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 받은 자라야 진짜 할례자 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8일만에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손 할례당이 있다고 합니다. 손할례당이란 할례는 할례인데 손으로 할례했다고 해서 손할례당이 아니고 이 손(損)자는 "상할 손"자로서 몸을 상하게 하여 할례받은 것을 자랑하고 돌아 다니는 것 다시 말하면... 사실 할례는 마음에 할례가 되어야 참 할례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전혀 할례를 받지 않았고.. 그저 몸에만 할례 받은 흔적이 있는... 바로 그 할례받은 상처만 자랑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손할례당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람들.. 즉 외식주의자들.. 형식주의자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 하심은 그 몸의 상처로 약속한 증거로 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할례 흔적을 볼 때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라 하심입니다. 그런데 할례 받은 뜻은 없애버리고 흔적만 가졌으니, 나는 무슨 짓해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구원 받는다 함은 형식만 갖추고 알맹이가 빠졌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을 손할례당 이라고 합니다.

율법에 따른 행위만을 일삼는 유대주의자들은 진정한 할례당이 아니고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이 진정한 할례당이라고 합니다(롬 2:25-29;골 2:11)
(롬 2: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롬 2: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롬 2: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롬 2: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전한 이신득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믿고 기쁨으로 교회를 섬기고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며 소망 중에 산 은혜로운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인 유대인 교사들이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있으며 율법을 지킴으로써만 얻는다고 가르침으로 성도들은 신앙의 동요를 하기 시작하였고 교회가 소란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옥중의 죄수의 몸으로 간곡한 편지를 보내며 참 할례당 곧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가를 밝힙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여

'봉사'(라트류온테스)는 봉사하다. 섬기다(행27:23) 예배를 드리다(마4:10;눅1:74) 희생제물을 드리다(히8:5;9:9)뜻으로 쓰인 말로 선민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실을 나타내는 말입니다(롬9:4).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은 전통이나 형식에 지배받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예배드립니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요 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의식적인 것이나 율법의 세부 사항을 엄수하며 자리를 채우고 시간을 지키는 형식도 중요합니다

셉 케이보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주의 통치하에 있을 때 아주 유명했던 인물입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어릴 때 그는 주일 아침이면 3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갑니다. 교회에 가서 2시간 30분 동안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마치면 공원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2시간 30분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다시 갑니다. 그리고 3시간 걸려서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힘을 쏟아야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요 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예배드리는 자의 자리에 임재해 계심을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며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만을 높이며 겸손을 배웁니다.

항상 낡은 옷과 떨어진 신만 신고 다니던 예수님이 잔치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허름한 옷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잔칫집에 나타나자 주인은 '거지는 이런 데 올 수 없습니다. 당장 나가세요.' 하면서 쫓아냈습니다. 예수님은 웃었지만 씁쓸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번에는 잘 차려입고 그 잔칫집으로 갔습니다. 주인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굽신거리며 윗자리로 모셨습니다. 식탁에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럽게 생긴 산해진미들이 즐비하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잔치에 온 사람들은 즐겁게 음식을 먹고 나눴지만 예수님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옷에다 부었습니다. 처음에는 실수로 그랬거니 생각하고 키득거리던 사람들이 한참을 지켜보다가 계속되는 이 행동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었습니다. '왜 음식을 옷에 부으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했습니다. '이 음식들은 날 보고 준 것이 아니라 내 옷을 보고 준 것이니 옷에다 붓는 것은 당연하지요.'

예배는 마음의 잔치입니다. 외모와 주변을 의식한 예배는 주님의 옷에 음식을 붓는 잔치와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을 드려 주님의 마음을 채우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참 할례당은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자들로서 모든 만족과 소망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오는 것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자신의 돈이나 명예, 권력, 지식, 도덕적 수양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하나님의 죄 용서입니다.
어거스틴의「고백록」이 위대한 것은 그가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주셨는지를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몰래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울이 자기 입으로 이름을 바울이라 고치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때 사도바울이 깨달은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실패한 메시야인줄 알았는데, 그리고 예수님이 살았다고 하는 제자들의 말이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 거짓말하는 놈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여태껏 가졌던 신앙의 경험이나 지식이나 명성을 생각해서 앞장서서 외국에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죽였는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큰 충격을 받았고 그 후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바뀌는가 하면 예수를 아는 지식이 율법을 아는 지식보다 더 낫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합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자

'육체'(사르키)는 일반적으로 몸(눅 24:39), 인간의 성품(요 1:14), 타락한 본성(롬 7:5) 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Schweitzer, Muller)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 것 즉 인간의 의식이나 공적 등을 가리킵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알려진 영국의 유명한 학자이며 군인이며 저술가인 토마스 로렌스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1919년 파리에서 개최된 평화회담이 진행될 때, 그가 맡은 특별한 임무는 아랍대표들과의 중재역할이었습니다. 그는 아랍 대표들을 위해 프랑스의 최고급 호텔에 방을 예약해 놓고, 그들을 프랑스의 이곳저곳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랍 대표들에게 제일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에펠탑도, 루브르 박물관도 아닌 호텔의 목욕탕이었습니다. 사막에서 얼마나 물이 귀합니까? 그런데 호텔의 목욕탕에는 조그맣고 이상하게 생긴 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욕탕을 볼 때마다, 감탄했습니다. "야, 여기 이런 신기한 것이 있었구나!" 그런데 회담이 끝날 무렵에 토마스 로렌스에게 호텔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로렌스경. 지금 아랍 대표들이 호텔 목욕탕을 다 뜯어 가고 있습니다." 로렌스 경은 급하게 달려갔습니다. 달려가 보니까 그들이 정신없이 목욕탕을 뜯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아랍대표들은 이것 다 뜯어서 아라비아로 가져가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의견인즉 사막에 그 목욕탕만 가져다 놓고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쏟아질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에 로렌스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랍 대표들에게 그 목욕탕에 물은 수도꼭지만 튼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도꼭지를 연결해 주는 수도관이 따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관을 통해 물이 공급된다는 사실을 설명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수도꼭지와 같습니다.

이필재 목사님이 L.A에 있을 때 서울의 대형 교회 목사님이  그 교회에 오셔서 부흥회를 하는 중에 하신 이야기를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평소에 안면이 없는 여신도 한 분이 목사님을 만나서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다고 해서 오라고 그랬더니 무슨 조그맣고 예쁜 궤짝 하나를 목사님 앞에 놓는데, 그것도 얌전하게 놓지 않고 소리가 "팍" 나게 책상에다 "쾅!" 놓더니 "이것 좀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뭡니까?" 그걸 열어보니까 그 속에 값진 다이아몬드 보석이 가득하게 차있었습니다. "아니, 이거 귀한 건데 이걸 왜 가져오셨어요?" "네.. 저는 지금까지 보석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저거 다 내가 가장 마음을 써서 준비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이거 가지고 사시지 왜 가지고 오셨습니까?" 저렇게 많은데도 날마다 속이 상해 못살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보석상 앞에 지나가면 속상하다는 겁니다. '저게 다 내 거여야 되는데...나는 병적으로 이런 맘이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날마다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데도 날마다 속상하고 더 많이 갖고 싶고.. 솔직히 저는 아침에 기도를 안하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예수님께 문안 기도는 안 드려도 날마다 이 것을 나 혼자만 아는 비밀 장소에 묻어두고 안녕하신지 매일 문안하고 여행을 가도 이것 때문에 잘 있는지 없는지 마음이 불안하고, 어쩌다가 집에 전기 고치는 사람, 수도 고치러 오는 사람이 오면 다 도둑같이 보이고... 내 정신은 온통 이 궤짝에만 있습니다. 어느 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잘못 사는 것이다! 이 궤짝 안에 갇혀있는 반지 몇 개, 쇠붙이 몇 개에다 내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억울하고 창피하고 헛되게 살았고,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내가 뭔데 내 인생을 이렇게 허비하느냐? 없애버려야 되겠다!' 이거, 내 손으로 처리하는 것보다 목사님께서 처리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마음에 평화가 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쾅!" 집어던집니다.

외모를 자랑하지 않습니까?
나의 학벌을 내세우지 않습니까?
나의 신분을 과시하지 않습니까?
나의 실력과 능력을 뽐내지는 않습니까
나의 부를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까?
참 하나님의 백성은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 합니다.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대상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신뢰하면 절망합니다.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으면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지전능,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인으로 모시면 절망도 좌절도 없습니다. 자신을 신뢰할 만했던 모세도, 바울도 숱한 고난과 어려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될 때에 소망이 싹텄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좌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어려움에서 도움을 얻고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봉사하며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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