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혀라! (마 17:14-21)

  • 잡초 잡초
  • 321
  • 0

첨부 1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혀라! (마 17:14-21)

천국에서 이상한 대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누가 아내를 제일 사랑했는가?'라는 대회였습니다.  아주 치열한 심사를 거쳐서 각 나라의 전직 대통령들이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대회에서 동메달은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었습니다.  이유는 링컨 대통령이 아내의, 아내에 의한, 아내를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은메달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않고 내가 아내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최고의 영예인 금메달은 우리 나라의 고 박정희 전대통령이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사실적으로 이분들이 다 천국에 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 한 단어입니다.  사명.  사명,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사명, 들어도 흥분되는 말입니다.  사명, 이것은 모래알처럼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위대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믿음의 사람들인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역사적 사명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역사적 사명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교회가 가져야 할 최우선적인 관심과 사명은 생명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사단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가족들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신앙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나 신앙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 있는 시대에는 영적인 일에 무관심해 집니다.  특별히 영혼을 구원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 전도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위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라는 목사님은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갱들이 조직에 헌신하는 것만큼, 무당들이 자기 종교, 자기 신에 헌신하는 만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게 헌신한다면 세상은 뒤집어졌을 것이다."
저는 이 말이 지극히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은 조폭들의 헌신보다 못합니다.  조폭들은 조직과 그들의 두목을 위해 생명을 내놓고 헌신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버린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득만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열정은 이단들의 열정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이단들은 거짓을 진실이라고 외치면서 열정적으로 그들의 교리를 전하는데, 참된 복음을 믿는 우리는 이 참된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에 대해서 부담감을 가지고 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 우리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 시대를 향해서 사명적 존재로 다시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까?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이 땅의 교회는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매력의 대상이 아닙니다.  영적 능력을 상실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에게 영적 매력을 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을 구원할 강한 영적 힘을 잃어버린다면 이 땅은 죄악으로 더 어두워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영적인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도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무서운 실패는 기도의 실패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무서운 타락도 기도의 타락입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제일 어설픈 신앙은 기도의 생활이 없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을 대충 대충 하려는 달콤한 유혹을 거부하십시오.  신앙은 대충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분명하고도 실제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같은 죄를 범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조심하셔야 합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항상 깨어 있기 위해서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의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주한 현대인들이 잃어버리는 것, 그 첫 번째가 기도생활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기도하지 아니하고 뭔가에 쫓겨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사탄의 작전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을 차단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내 재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 것인가?  내 힘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 것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결단하십시오.
"이제 나는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겠다!"

신앙생활의 승패는 얼마만큼 기도생활을 늘릴 수 있느냐의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때문에 기도의 시간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남다른 기도의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남다른 기도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남다른 기도의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어느 날 아말렉이 쳐들어 왔습니다.  아말렉이 누구입니까?  밤낮으로 싸움만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오합지졸들입니다.  전쟁을 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어느 누가 봐도 이 전쟁은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전쟁의 승패는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패는 바로 기도에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동안에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 모세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판단으로는 칼과 창과 군사의 수에 있었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이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전쟁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손을 들어 기도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팔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팔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기는 겁니다.  너무 지쳐서 팔이 내려올 때에 아론과 훌이 양쪽에 서서 그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붙들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의 도움과 헌신으로 모세는 끝까지 기도할 수 있었고, 결국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본문을 일컬어서 주경가들은 무명 용사의 승리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론과 훌의 승리였다는 겁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승리였다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승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도는 능력입니다.

셀교회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랄프 네이버 박사가 주님이 세우시기를 원했던 그 교회,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준 바로 그 교회, 셀교회를 이루기를 원하는 교회에 던지는 세 가지의 충고가 있습니다.

첫째, 기도에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라.  둘째, 교회의 모든 리더십 -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기도 리더십을 키워라.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능력 있는 기도의 용사를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중직들, 모두에게 영적인 굶주림이 있어야 합니다.  불타는 목마름으로 기도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전 교회를 능력 있는 기도의 공동체로 만들라는 겁니다.  지난 2천년동안 언제나 교회의 부흥은 기도의 부흥으로 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의 부흥은 기도의 부흥으로 시작됩니다.  교회의 부흥은 기도의 부흥으로 시작이 됩니다.  기도가 없이는 그 어떤 역사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그 어떤 부흥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역사를 보고, 부흥의 파도를 타기를 전심으로 소망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이렇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한 아이가 초라하게 거품을 내뿜으며 쓰러져 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끌어안고 신음하며 울고 있습니다.  바로 곁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습니다.  귀신이 떠나가지 않고 오히려 아이를 더 힘들게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고 있습니다.  저만큼 서기관들이 손가락질하며 비웃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세 제자와 함께 섬광처럼 나타납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나무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를 이리 데려 오라."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니 그 아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결국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가 이 시대를 병들게 하고 어렵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시대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시대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경제위기입니까?  이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입니까?  정치적인 불신입니까?  교육 정책의 부재입니까?  물론 이런 것들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시대에 최대의 문제는 신자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마땅히 행해야 될 능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시대는 은과 금은 많아졌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보십시오.  교회 건물은 저마다 커지고 웅장해졌습니다.  교인들은 많아졌습니다.  재력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능력은 쇠약해져만 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비극적인 한 구절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여기에서 제자들이라는 말 대신에 교회라는 말로 바꾸어도 여전히 우리 시대의 사실이 아닙니까?  "내가 교회에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내가 교회에 이 문제를 가져와도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능히 변화시키지 못하더이다.  능히 바꾸지 못하더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잘 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  세상을 고칠 수 있느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10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이미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낼 때에 성경 공부하는 방법을 먼저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을 먼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왜요?  교회는 학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족이요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은 게임이 아닙니다.  소풍놀이가 아닙니다.  영적인 전쟁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며 세상을 다스리며 정복하는 권세를 제자들에게 먼저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무당도 배운 학습무당하고 신이 내린 강신무당하고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릅니다.  학습무당은 작두에 올라가서 춤을 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강신무당은 다릅니다.  강신무당은 작두에 올라가서 마음대로 춤을 춥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성령의 능력에 붙잡힌 사람하고 어디서 예수 믿는 것처럼 흉내를 내는 사람하고는 다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셨습니까?  성령 충만의 체험이 있으십니까?  우리의 가치관과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범죄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나니까 사단에게 순종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아담은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도록 주신 권세를 사단에게 양도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던졌던 한 가지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6절에 보면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누가 사단에게 넘겨주었다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권세와 영광을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상실하고 사단에게 이 권세를 넘겨주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의 권세를 부수시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되찾았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입니까?  바로 이 권세를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이 권세가 제대로 행해지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권세를 우리들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들에게 주어진 이 권세는 결코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포하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십시오.  복음 안에서 누리십시오.  왜 구경만 하고 있으십니까?  권세는 이미 내 것이 되었다고 회복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입으로 선포하지 않으면 결코 여러분의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특별히 주님 전에 나오신 여러분, 이 전에 나올 때마다 여러분들은 성령님의 나타남을 구하십시오.  주일날 주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 한번을 드리더라도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려 하지 마십시오.  준비된 심령으로 이 시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불타는 목마름으로 모셔들이고 마시십시오.  찬송 한번을 부르더라도 그 찬송 속에 내 신앙의 고백을 담아서 찬송을 하십시오.  기도하더라도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혀져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가정에 돌아가서 오늘부터 그 권세를 행하십시오.  교회 와서는 예수 믿는 사람 같은데 집에 가면 부부간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교회에서 밥 먹을 때는 재미가 있는데 집에서 밥 먹을 때는 자꾸 싸움이 일어납니다.  자녀들의 공부방에 사단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전화기를 타고 사단이 왔다 갔다 합니다.  컴퓨터 안에서 아이들을 점령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선포하십시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 가정의 평안을 깨는 모든 분열의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우리의 아이들을 괴롭히고 유혹하는 모든 사악한 영들은 물러갈지어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로 추방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자녀들을 맡길 때에 육체 덩어리만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맡겼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아이들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십시오.  당당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축복하고 선포하십시오.  온전히 그들의 삶에 주님의 주권이 나타나도록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아이들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강하게 나타나기를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요한계시록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 교회와 교인들은 스스로 뜨겁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뜨겁지도 않았고, 차지도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교회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문 밖에 서서 그들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와 교인은 바로 포스트모드니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찬양을 한다고 하면서도,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심령이 식어지는 이유를 아십니까?
여러분의 삶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축복한다고 하면서도 여러분의 자녀들이 비틀거리고 여러분의 남편들이 방황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사업 바깥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 문밖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심령 밖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의 방문을 여십시오.  사업의 문을 여십시오.  재물의 문을 여십시오.  교회의 문을 여십시오.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여러분의 가정으로, 여러분의 일터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터전에서 예수 냄새가 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터전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행하십시오.  놀라운 하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데 실패한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사람들이 떠나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 조용히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사랑하는 여러분, 2천년 전 제자들의 이 신음소리는 오늘 우리 성도들의 신음 소리가 아닙니까?  우리는 왜 안됩니까?  2천년 전 제자들의 한탄은 오늘 우리 교회의 한탄소리는 아닙니까?  우리는 왜 안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왜 이 능력을 행할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왜 정결하고 거룩한 삶이 어려운 것입니까?  우리는 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이 어려운 것입니까?  왜 능력 있는 기도꾼이 어려운 것입니까?  왜 우리는 이토록 복음을 전하는데 무력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우리의 사업을, 우리의 가정을 전폭적으로 주님께 맡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이 안 나타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으면 세상을 정복하고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고 이 땅을 정복할 권세가 내게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 21절에 보면 '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본에 보면 재미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 9장 2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내 신앙생활의 최우선 순위는 내 삶을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힘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하셔야 합니다.  루터는 이 기도로 당시에 거대했던 천주교 교권과 맞서 종교개혁을 완성했습니다.  칼빈은 금식기도로 제네바를 거룩한 도시로 바꾸었습니다.  모니카는 금식기도로 방황하는 아들을 성자로 바꾸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주부터 우리는 열린모임과 제자대학 가을학기를 시작합니다.  물론 다른 실패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역들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하고 한 해의 결실을 거두고 싶습니다.  내 신앙을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힘을 받는 것입니다.  내 삶을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스스로에게 결단하십시오.
"내가 새벽을 깨워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리라."

새벽기도를 해보면 기도회를 잘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중요성을 모르는 분도 있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타당성을 깨닫지 못하는 분도 있고, 다 알고는 있으나 환경 때문에 건강이 약해서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환경이 바뀌어질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초신자들, 걸음마도 못배운 사람들, 기도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믿음이 생기고 기도는 기도함으로써 배우는 겁니다.  영적으로 게으른 사람들,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육신에 사로잡혀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 기도를 중단하면 곧 패배의 시작인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새벽에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진 것이 새벽이었습니다.  한국 땅에 1907년 거대한 부흥의 물결이 새벽기도로 시작이 되어졌습니다.  축복의 문이 열려진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여리고성이 새벽에 무너졌습니다.  야곱이 씨름하여 승리한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새벽의 승리자가 신앙의 승리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혀야 합니다.  혼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안됩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히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찬양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히면 우리의 삶은 노래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히는 순간 여러분은 거룩한 바람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새벽을 깨우십시오.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힘을 받는 거룩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가을에 내 신앙을,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혀 보십시다.  내 삶을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혀 보십시다.  내 기도를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혀 보십시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