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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서와 혼돈 (행 21: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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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와 혼돈 (행 21:17~36)

좋은 게 좋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좋은 것이 다 좋은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좋은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 보면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닌 것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지금 당장에 보면 좋은 것 같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이 있고 지금은 해로운 것 같았는데 나중에 보니 사실은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때도 종종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내게 괴로움인 것 같으나 돌이켜 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복되게 하시는 길임을 깨달을 때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내 모시는가? 당장에 보면 광야의 삶이 결코 즐거울 리 없습니다. 한데 광야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다 깊이 깨닫게 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는 훈련장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깨닫게 된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습니다. 일일이 챙겨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깨닫습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나를 바로 이렇게 돌보시는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신에게 해로운 것을 해달라고 마냥 졸라대는 모습을 볼 때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그래서 또 깨닫습니다. 아하, 내가 마냥 하나님께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때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도 있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들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위해서는 들어줄 수 없는 요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신 다른 것으로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또 깨닫습니다. 나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요. 지금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즐겁게 하여 주고자 하시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입니다. 더 감사한 것은 부모 공경은 이 땅에서 장수하고 복된 날을 살아가는 비결이라고 했는데 그런 복을 내게 주시고자 해서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마 온전하셨다면 결코 허락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모시고자 했어도 그럴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당신께서는 허락하셔도 형님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의 상태는 잠시도 혼자 계시도록 할 수 없습니다. 돌봄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형수님은 사정상 미국에 계십니다. 그러니 출근해야 하는 형님으로서는 어머니를 모시고 싶어도 모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어머니를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힘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보람된 일도 없습니다. 아마 그렇지 않았으면 평생 후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섬기는 아내를 보면서 고마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들인 저보다도 더 정성이 지극합니다. 본인도 여러 가지 일을 감당하고 있고 몸도 온전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정성을 쏟는 그 모습을 볼 때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자녀들 역시 비록 주말뿐이기는 하나 정성껏 할머니를 섬겨주는 그 모습이 또한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또한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것이로구나. 그리고 이런 사랑이 넘치는 가족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그리고 나를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께 또한 영광을 돌립니다.

바울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을 합니다. 죽음을 각오한 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마저도 가벼운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함께 간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주 당당합니다. 그 당당한 바울의 모습과 그런 바울을 대하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모습을 함께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질서를 따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나가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형제들이 반갑게 맞아줍니다. 이튿날, 바울은 일행과 함께 야고보를 방문합니다. 그 자리에는 장로들도 다 모여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선교로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일을 낱낱이 들려줍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님, 아시겠지만 유대인 가운데 신자가 된 사람이 수만 명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매우 열성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당신이 이방인들과 어울려 사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서 떠나 자녀에게 할례도 행하지 말고, 유대의 관습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틀림없이 그들은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러 주는 대로 하십시오. 우리 중에 하나님께 서약을 한 사람이 네 명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정결 의식을 행하십시오. 그리고 형제께서 그들의 머리를 깎는 값을 대 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그대에 대한 소문이 모두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키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 신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우상에게 바친 음식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 것과 음란한 행동을 멀리할 것을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튿날, 바울은 그 사람들과 함께 정결 의식을 행합니다. 그런 뒤에 그는 성전 뜰로 가서 정결 의식이 끝나는 날짜와 그 날에 각 사람을 위해 예물을 바칠 날짜를 신고합니다. 

여기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요청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이고 내 생각은 다르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유대인 성도들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다 유대인들처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좀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과의 마찰이 무서워서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 아닙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것은 아니라고 자기 생각을 내세워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대로의 입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결코 바울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택하시고 가르치신 제자들이 있고 또 평신도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는 야고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지도자들의 말대로 따라주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1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할 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서로 의견을 나눴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과 똑같이 되라고 요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때 서로 합의했던 것을 내세워 자기주장을 펼 수도 있었습니다. 한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요청대로 따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교회의 평안을 위해서요. 또한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평안한 가운데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중에 바울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어디까지나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을 제일 먼저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해도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일을 어디까지나 교회에 덕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자칫 실수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면서 서로 의견이 갈라져 다툰다면 어찌 그것이 교회에 덕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하나님이 세워주신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서로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이것도 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서로의 뜻이 하나가 되지 못하게 될 때 그것은 우리로 서로 다투게 할 뿐이요 그런 모습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자기주장을 할 수가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자기주장대로가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말씀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질서를 따라서 행해야 한다고 바울은 자기가 쓴 편지들에서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 각자가 깨달은 대로 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적은 같으나 방법이 다를 때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따라서 교회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질서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 나가도록 이끄시고 또한 모든 것이 순리로 풀려나가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주장만 하게 되면 순리로 풀려질 것도 오히려 실타래 묶이듯이 될 때도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조화의 하나님, 화합의 하나님이시기에 필요를 따라 직임을 맡겨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앞서 세우신 분들이 비록 나보다 못한 것처럼 여겨져도 또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서를 따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능력을 더하시고 또 지혜를 더하여 주셔서 모든 것이 순리로 풀려나도록 만들어 가시고 그럴 때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입장이라고 해도 오히려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역시 바울의 보고를 듣고 먼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바울을 믿어줍니다. 하지만 성전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소란을 미리 방비해서 조심스럽게 바울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율법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청을 했던 것이요 또한 바울은 이런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말대로 따름으로서 하나님의 질서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되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아무리 우리가 세상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해도 여전히 세상은 교회를 핍박한다는 사실입니다.
칠 일이 거의 끝나 갈 즈음에, 아시아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이 성전 뜰에 있는 것을 보고 무리를 충동질하여 바울을 붙잡습니다. 그리고는 외쳐댑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좀 도와주십시오. 이 사람은 가는 곳마다 우리 백성과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거스르는 말로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더욱이 지금은 그리스 사람들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혀 놓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으므로, 분명히 바울이 그 사람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온 도시는 시끄러워지고 사람들이 몰려와 바울을 붙잡아 성전 바깥으로 끌어냅니다. 그리고 바로 성전 문이 닫힙니다.

여기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끝까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저들이 바울을 그토록 반대한다면 바울이 전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어야 합니다. 그리고 왜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지 그 이유를 듣고 난 다음 잘잘못을 판단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나왔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는 귀를 막고 바울 나쁜 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과연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거스르는 말을 했던 적이 있던 가요? 아닙니다. 또 바울이 에베소 사람 즉 이방인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레짐작으로 판단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즉시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냅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성전 안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어겨서 그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경우라도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제사장에게로 가서 증인들을 내세워 잘잘못을 가리고 그리고 나서 제사장의 판결에 의해서만 사람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마구 바울을 때립니다. 모세의 율법을 어겨서 바울을 쳐 죽여야 한다면 그렇다면 그들 역시 모든 절차를 모세의 율법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생각대로 바울을 죽이려고 대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세상의 모순이 있습니다. 어떤 잘잘못을 따진다면 모든 사실을 바로 판단하고 그리고 난 다음 따져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생각에 이게 아니다 싶으면 그런 절차를 다 무시하고 그저 사람들을 선동해서 죽일 놈을 만들고 심지어는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안타까운 것입니다. 여기 유대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지금 자기들이 아는 바 모세의 율법에 어긋난다고 해서 바울을 붙잡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자기들 역시 모든 것을 모세의 법을 따라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한 두 사람의 말만 듣고 그것을 잘못된 일로 몰아간다면 세상에 잘못되지 않을 사람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지금 이런 식으로 교회를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을 몰아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해 나간다고 해도 그들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를 않습니다. 결국은 자기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무슨 짓을 해도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고 하면서도 성도들에 대해서는 자기들보다 훨씬 나은 그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교회 다니는 것들 다 죽여야 돼 하면서 가시 돋친 말을 퍼부어 댑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만큼 교회와 성도들의 도덕성을 그들이 요구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역시 세상 속에서 세상에 그대로 물들고 말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세상이 그만큼 어둡다는 말도 됩니다. 한마디로 혼돈의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바르게 산다고 해도 여전히 그들은 꼬투리를 잡으려고 할 것이고 그렇기에 세상의 혼돈은 가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 포기하고 그들처럼 살아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우리는 더욱 말씀과 기도에 힘씀으로 주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어둡고 혼돈할수록 더욱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들이요 이를 위해 말씀과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어둔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이기고 나갈 수가 있습니까? 
바울을 끌고 나간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하는 순간에 천부장이 군인들을 거느리고 달려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도시 전체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로마 군대 천부장에게 전달됐기 때문입니다. 오면서 보니 한 사람이 군중들에 의해서 마구 얻어맞고 있습니다. 그래 일단은 바울을 체포하도록 하여 바울을 군중들의 손에서 구해냅니다. 그리고는 얻어맞던 사람이 누군지 그리고 왜 군중들이 바울을 폭행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지만 사람들의 말이 제각각이어서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일단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고 가도록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바울을 폭행하려고 하자 군인들이 바울을 호위합니다. 그럼에도 군중들은 바울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해서 “그를 없애 버려라!” 하고 소리쳐 댑니다.

여기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모세의 법만 어긴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법도 어기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한 처형은 로마 당국도 인정을 하지만 그것도 반드시 사전에 로마 당국에 신고하여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절차조치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혼돈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가장 위험한 순간에 로마 군인들이 나타나 바울을 일단 보호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증언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험 당할 때에 또한 피할 길을 주시어서 능히 감당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다가 당하는 어려움들 가운데 가장 힘들어 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결국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그래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은 힘이 들고 지칠 수밖에 없지만 그리고 우리의 싸움은 마치 골리앗 앞에 선 다윗처럼 도무지 상대도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그 싸움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살아계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도우시는 힘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 날마다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상이 어둡고 혼돈으로 가득하다고 해서 결코 실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아무리 선을 추구해 나가도 여전히 우리를 향한 세상의 핍박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두려워 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는 때가 있기 때문이요 그 때에 세상은 이를 갈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이 우리들에게는 승리의 찬가를 높이 부르는 날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이기며 나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승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요?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광야로 내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광야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하나님의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될 때 비로소 우리에게는 멋진 가나안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나안도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이 싸움을 우리는 지금도 변함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족속들이 치열하게 이스라엘을 대적하듯이 지금 세상은 우리를 대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 한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서로 교제하며, 친절과 동정을 베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서로 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한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라고 한 바울의 권면대로 나 한 사람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싸움입니다. 아니 주님과 함께 하는 싸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세워주신 질서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질서를 따라 혼돈을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 된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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