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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디매오의 아들 (미 7:7,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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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매오의 아들 (미 7:7, 막 10:46~52)

성경에는 온갖 질병과 장애들로부터 고침을 받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특별히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 중에는 온갖 질병을 가진 사람들, 또 여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고치신 이야기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의 첫 사역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다.”(마4:23~24)

또 마태와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을 단적으로 드러낸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 세례를 주었던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있으면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듣고는 자기 제자들을 보내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때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눅7:22~23)

여기 보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일이 질병과 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치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질병과 장애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이 세상에 살면서 갖는 온갖 고통과 또한 한계를 핵심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이 질병과 장애에는 신체적인 고통, 거부당함, 소외, 가난, 정체성의 문제, 죄의 문제, 절망 등 인간의 온갖 고통과 한계가 한꺼번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병과 장애의 극복은 새로운 한 전인적인 인간으로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온전한 구원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즉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는 말과 질병과 장애로부터 놓임을 받는다는 말은 거의 동의어였다고 말할 수 있었고, 따라서 예수의 사역의 핵심에 이 질병과 장애로부터 치유 받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눈먼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도 복음서에 여럿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바디매오를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마20:29~34; 마10:46~52; 눅18:35~43)  예수께서 제자들과 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여리고라는 마을에서 나가실 때,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 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소리 소리를 질러 예수께 고침을 받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눈병이 확산되어 눈먼 거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눈병에 걸린 이유는 눈의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데에 있었지만, 불충분한 영양 섭취와 나쁜 기후도 한 몫 하였습니다.  그렇게 눈병에 걸려 시력을 잃은 사람은 도시 밖이나 변두리에서 구걸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복음에서는 이 눈먼 거지의 이름이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소개되는데, 사실 바디매오라는 이름의 뜻이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신의 이름도 없이 ‘디매오의 아들’로 불리다가 그것이 이름으로 굳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볼 때, 이 바디매오라는 인물은 변두리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했고, 여리고라는 마을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변두리에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또 눈이 멀었기 때문에 구걸하여 연명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었고, 다른 사람의 자선에 의지해서 근근이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는 앞을 못 보는 이유로 도시의 변두리로 밀려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회와의 접촉을 잃어버린 것만이 아니라 삶 자체의 능력도 상실하였습니다.  이런 점은 예수께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거기 바디매오가 혼자, 그것도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주목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왜 우리는 자신의 인정과 위신에 대해 걱정을 합니까?  왜 우리는 안전과 명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변두리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내적 모습이 이렇습니다.  우리 자신이 좌절과 자책감으로 어둡게 될 때, 우울한 생각이 우리 삶을 어둡게 할 때, 시기와 질투와 좋지 않은 감정에 의해 행동하게 될 때, 죄책감이 우리 심성을 마비시키고 우리 자신을 사로잡을 때, 우리는 중심을 잃어버렸다는 인상을 받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고립되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한없이 멀어진 것처럼 느끼고 고독과 외로움을 겪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고, 삶은 자신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가련한 존재로 여기게 되고, 모든 것을 어둡게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어둡게 보는 이런 삶이 눈 먼 사람의 삶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앞을 못보는 이유로 외적, 내적 고통을 당했음에도 아직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그의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키기에 이릅니다.  마가는 이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디매오가 그의 불완전한 시각 대신 청각이 더 발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드러나는 것은, 바디매오의 듣는 능력은 치유와 구원에 대한 깊은 갈망에서 생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절망하며 변두리의 삶을 살아가는 일을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한번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 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그는 즉시 소리를 지릅니다.  그는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모르고 어느 방향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소리를 지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롬10:17).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잘 들어야 합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잘 들어야 합니다.  자기 식대로만 듣지 말고, 자기 틀대로만 듣지 말고 잘 들어야 합니다.  실재를 제대로 보는 것과 함께 실재를 제대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지 못하면 듣기라도 해야지요. 

그는 들은 다음 바로 다음 단계로 행동합니다.  그는 큰 소리로 예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의 외침은 분명한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주저함 없이, 온 마음과 혼과 힘을 다해 간청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알림 속에는 바디매오의 고통의 깊음과 크기가 주저 없이 알려지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분명히 고백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갑자기 방해물이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즉시로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군중들에게는 눈에 띄지도 않는 바디매오의 존재 같은 것은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외침 속에 현재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이 싫었을 뿐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깨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기분 좋은 대화로 이어지는 좋은 분위기가 깨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들은 위협적이었고, 멸시하는 태도가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바디매오는 군중의 힘을 느꼈고, 충분히 위축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를 꾸짖었으나 더욱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많은 사람들은 바디매오와는 반대로 행동합니다.  무엇인가 간청할 일이 있으면, 대부분 주춤거리고, 그러다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시도합니다.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사실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방해라도 받게 되면, 자라목처럼 쏙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사실 우리의 환경은 그렇게 너그럽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내 사정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만도 아닙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자기의 문제로 씨름하는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의 위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소리 내어 알리는 것에 우리는 몹시 불안합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방해를 받았을 때 침묵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소리칩니다.  그의 삶에 대한 의지가, 그리고 갈망이 군중의 저항과 자신의 내면의 저항보다 더 컸기 때문입니다.  이 간절한 갈망과 집중력을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마침내 그 외침은 길 가던 예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눈 먼 거지의 곤경을 들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에게는 많은 사람들과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이 눈 먼 거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분은 어떤 사람이 구원과 치유를 정말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거지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태도도 변했습니다.  예수께서 거리를 부르시자 사람들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바디매오에게 아렇게 말합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사람들은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기도 하고 자기 식대로 꾸짖고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함께 기운을 모아주고 힘을 주기도 합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십니다.  이 부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부름은 그분께 다가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 부름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방황에 끝을 내게 됩니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 왔습니다.  그가 벗어던진 겉옷은 그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가리고 있었던 역할과 가면을 벗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음을 활짝 열고 무방비 상태에서 예수께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예수께 내맡겼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즉시 고쳐주시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우리가 이 질문을 들으면, 언젠가 살펴보았던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때도 예수께서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낫고 싶으냐?”  그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정말 네가 낫고 싶으냐?  네가 그 장애의 자리에서 은근히 그런 삶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니냐?  너는 정말 네 발로 이 세상을 걸어가고 싶으냐? 

그래서 오늘 바디매오에게 한 이 질문도 엉뚱한 질문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너는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무엇을 요청할 때,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당신이 이것을 내게 해달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환자가 심리치료자에게 상담을 받을 때, 환자는 심리치료자가 자신의 문제를 다 알아서 요리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야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담의 핵심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하고 책임진다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운전해 나간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까요?  당신의 말로 말해 보십시오.  정말 당신이 내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더 나아가 예수의 이 질문 “정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는 말 속에는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장애를 넘어서서 신앙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에게서 궁극적으로 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는 원하는 바를 즉시 대답합니다.  “라부니,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부니는 단지 선생님이 아니라, “나의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로 맺어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주 정확하게 말합니다.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말로는 보기를 원한다는 이 단어는 헬라어로는 “아나블렙소”라는 말인데, 이는 단지 본다는 의미를 넘어 “위를 본다, 우러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디매오의 원의에는 단순히 사물과 사람을 보는 육체적인 회복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을 위로 향하는 것, 즉 하늘을 우러르는 일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신앙의 눈으로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그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 위에 열린 하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이웃들, 자기들의 삶의 사건들, 자기 주변의 자연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라야, 다시 말하면,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자신의 삶 위에 열린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눈 먼 거지가 원하는 바를 들어 주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훌륭한 믿음을 칭찬해 주십니다.  믿음은 그 자체로 치유의 첫 단계입니다.  신앙은 치유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다시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따라 나섭니다.  그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바디매오의 치유 기사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있었던 그분의 마지막 치유 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자기의 스승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먼 신세였다면, 바디매오는 열린 눈으로 예수를 따르던 유일한 제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의 수난에서 그 이면을, 큰 고통 속에서도 열린 하늘을 바라보고, 죽음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깨닫고, 십자가의 비참함 속에서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무덤 속에서 생명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시선을 하늘에 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런 시선을 가짐으로써만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예수의 수난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디매오처럼, “위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로타르 체네티라는 사람은 예수께서 소경을 치유한 기적을 이런 말로 표현했습니다.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멀리 바라본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더 깊이 바라본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른 빛에서 바라본다.

사랑하는 교회 식구 여러분, 저는 오늘 아침, 우리 교회 식구들이 모두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희망으로 멀리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사랑으로 깊이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앙으로 모든 것을 다른 빛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집단상담 프로그램이나 영성훈련을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교회가 상담하는 교회라는 소문이 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마음의 고통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푸는 것으로 그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우리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역사와 성령의 놀라운 활동이 없다면, 상담 아니라 온갖 영성수련이 있다고 해도 우리교회는 허탕입니다.  공허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중심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매 주일 설교하는 내용을 잘 들으신 분들은 제가 진정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입니다.

저도 사실 일반 교회에 적응을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형식과 관습과 우리 사회와 기독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 질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말끝마다 하나님께 이렇게 해주셨다 저렇게 해 주셨다 달고 다니는 말을 할 때는 얼굴이 간질거리기도 합니다.  교회 성장에 올인 해서 나가는 것을 볼 때는 회의적이기도 합니다.  온갖 악기로 무장한 경배와 찬양의 집회나 간증집회, 신유은사집회들에는 걱정이 되는 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깊이깊이 새겨야 할 일은 내가 믿음의 눈을 뜨기를 바라고 있는가?  내가 신앙으로 모든 것을 다른 빛에서 보려고 하는 간절함이 있는가?  그리고 내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활동에 깊이 동의하고 승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들입니다.  디매오라는 말은 값, 가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우러를 때, 우리는 진정 가치 있는 사람, 존귀한 사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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