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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름받은 사람의 삶 (막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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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받은 사람의 삶 (막 1:1-8)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기독교베스트셀러 중에 고든맥도날드 목사님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여러번 읽으면서 도움을 얻곤 합니다. 이 책에 보면 두종류의 사람의 삶이 있습니다.


첫째는 쫓겨다니는 사람의 삶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항상 사람들에 의해 조종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과도하게 일과 야망에 쫓겨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쫓겨다니는 사람은 항상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갑니다.그래서 삶의 결국에 가서 겉으로는 성공했는데 내적으로는 실패한 삶이 되어짐을 지적합니다. 이렇게 쫓겨다니는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두부류가 있는데 종교계와 사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쫓겨다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몇가지 증상이 있습니다.

첫째 오직 성취함으로써만 만족을 얻는다. 내가 목표로 한 일들을 성취하였을때 행복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할때에는 항상 불만족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취의 표상들에 집착한다.  가령 더 큰 집,더 더 많은 직위,더 많은 통장을 얻는 것들입니다.

셋째 쫓겨다니는 사람들은 전인적인 인격에는 별관심이 없습니다. 가령 이런 꽃겨다니는 사람들은 믿음의 삶을 살더라도 내면의 인격보다는 외면의 활동에 초점을 모으고 살아갑니다.

넷째 쫓겨다니는 사람들은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서툴고 미숙하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것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좇겨다니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쫓겨다니는 삶은 항상 바쁩니다. 그리고 삶에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그로 인해서 내면에 항상 함몰웅덩이처럼 공허하고 만족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로 이 세상에는 부름받은 사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께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다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름을 받았다고 다 부름받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부름받은 사람으로서 부름받은 자의 삶을 산 대표적인 모델이 오늘 소개되는 사람인 세례요한입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에서 복음의 시작을 알리면서 세례요한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마가복음은 4권의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마가복음이 우리에게 쓰여진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알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오늘 마가복음에서는 공허한 세상살이로 항상 분주하게 쫓기고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고 증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복된 삶이요 기쁨의 삶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부름을 받은 자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세례요한은 자신이 부름받은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확신에 걸맞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름받은대로 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1. 부름받은 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삶을 삽니다.

4절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회개의 세례와 아울러 세례요한은 회개의 메시지를 증거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외쳤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외치고 준비시키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러 살았습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는 자로서 살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누군가 세례요한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나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나는 회개의 세례를 주는 자입니다”. 세례요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주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서 그는 결국 목숨을 바쳤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부름받은 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비록 그는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쳤지만 그는 예수님께 가장 큰 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세례요한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 삶을 감당할 때 유혹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어느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이때의 상황은 세례요한보다 6개월 나중에 오신 예수님께서 사역하실때에 세레요한에게 몰리던 많은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들기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언제나 세상에는 이렇게 저렇게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미동하지 않습니다. 열받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이 그런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요한복음 3장 28절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입은 자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알은대로 분수에 넘치지 않게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 자리에서 그 분량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최선의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이땅에서 삶을 살아갈 때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종종 인생을 오버하거나 그릇된 방향으로 열심을 낼 위험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요 메시야를 준비하러 부르심을 받은 것임을 잘알고 그 목적을 향해 살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특별한 삶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세가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다윗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바울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갔을때 너 왜 모세같이 살지 않았는가? 책망하지 않습니다. 너 왜 바울처럼 살지 않았는가 책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부르신 부름의 뜻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 분량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을 다스려가야 합니다. 내나 누구인지 자신의 용량을 오버하여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롬12:3에 “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만약에 세례요한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오버해서 자신이 메시야인첫럼 생각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제로 세례요한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메시야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세례요한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사람들의 인기와 박수에 유혹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군중들의 인기와 박수를 이길 수 있었습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확신하였기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땅에서 왜 살아가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십니가?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하고 사업하여서 이땅에서 잘먹고 잘입고 잘살라고 부르셨습니까? 주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십자가에서 대신하여 질고를 담당하시고 피흘려 돌아가신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새로운 삶의 소망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하십니다. 부르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을 증거하라고 하셨기에 우리가 그 부르심대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복음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주님을 증거하셔야 합니다.찬송으로 주님을 증거하셔야 합니다.기도로 주님을 증거하셔야 합니다. 순종으로 주님을 증거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부름받은 자로서 주님을 증거하여야 합니까?
주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해외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목회자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 자리에서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부름받은 자의 삶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주님을 증거하여야 할 자리입니다. 가정에 전업주부로 있습니까? 주님을 증거하는 주부가 되십시오. 지금 학생으로 캠퍼스에 있습니까? 주님을 증거하는 학생이 되십시오. 지금 직장에 있습니까? 지금 직장인으로서 주님을 증거하십시오.

종종 거리에서 자동차 뒤에 물고기를 달고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고기는 “익투스”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의미의 희랍어 머리글자따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달고 다시는 분들은 왜 그럴까요? 자신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나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신호도 잘 지키지 않으면서 그것을 달고 다니면 불신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도대체 크리스챤이 말이야”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가보면 대문입구에 교패를 부착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집은 그리스도인 집인데 그 집에서 이루어진 모습이 만약에 아니라고 한다면 얼마나 영광을 가리우는 일입니까?

제가 한번은 저희 집의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어떤 장년 여자 두분이 탔습니다. 두분이서 대화를 하는 중이었습니다.아마 계모임에 갔다가 오는 중인 모양이었습니다. 한분이 말을 합니다. “아니 걔는 왜 그렇게 욕심이 많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한편의 사람이 말을 합니다. “그래도 걔가 교회 다닌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쪽의 사람이 말을 합니다. “나는 그렇게 믿을려면 교회다니지 않을래”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부름받은 자는 단순한 삶을 삽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티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고 합니다.
약대털옷은 어떤 옷입니까? 약대는 낙타입니다. 낙타털옷은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당시의 가난한 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허리에 가죽띠를 했습니다. 이것은 장식이 없는 가장 흔한 단순한 허리띠인 것입니다. 여기 세례요한이 먹은 메뚜기와 석청은 무엇입니까? 당시의 팔레스타인 서민들이 먹는 가난한 음식이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도 못먹을때 메뚜기를 잡아서 먹었던 때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건강식으로 먹는 경우도 있지만 못살때에는 그것이 우리들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석청은 식사 후에 먹는 후식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바위로 된 곳이 많아서 쉽게 바위에서 야생꿀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 머물면서 이렇게 단순한 옷과 음식과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역사를 보면 우리가 존경하는 영적 거성을들 보십시오. 한결같이 단순했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단순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삶이 단순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차리는 것 이런 것들을 그렇게 가치있게 여기지 않습니다. 목적이 분명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 옳은 일을 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그렇게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대로 사는 것이중요합니다.여러분 지속적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말은 쉽게 합니까? 말로하면 무엇인들 못합니까? 그런데 쉽게 보이는 그것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무엇 때문에 원망하고 지도자 모세를 비판했습니까?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 먹는 것이 지겹고 싫다라고 원망했습니다. 여러분 같은 음식 반복해서 먹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세례요한은 박한 음식을 먹고 허름한 옷을 입고 지극히 가난하고 단순하게 살아가는것들에 대해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소명자는 댓가를 치루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불편하기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때로 내가 비천하게 보이고 불쌍하게 보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종종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에게 석청이나 낙타털옷같은 불편함이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좀 불편하고 고생이 요구되는 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현대교회는 주님으로 인해 고생하는 것을 못참습니다. 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들이 교회들이 지금까지는 많은 성도들의 봉사의 사역으로 움직여졌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이제는 편리주의로 가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유용하고 보기는 좋습니다. 종종 어떤 분들이 저에게 말을 합니다. “이제 청소도 돈주고 맡기자”라고 합니다. ‘이제 식당도 돈을 주고 일꾼을 사서 하자’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부름을 받은 자로서 주를 위하는 일에 우리의 불편함과 고생을 피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신앙은 점점 야성이 떨어집니다. 이땅에서 너무 편하고 잘먹고 잘입고 잘살때에 결국 우리는 하늘의 소망이 점점 희미해지는 법입니다

우리가 세례요한을 통해 생각할 것은 세례요한이 그렇게 단순한 삶을 살았던 것은 그가 머문 자리가 바로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고 먼저 머문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지금 구원받은 우리가 이땅이 바로 광야입니다.

여러분 성지순례를 가보시면 광야를 보실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머물던 이스라엘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모래바람으로 불편합니다. 밤에는 춥고 낮에는 더운 곳입니다. 한마디로 살고 싶지 않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거칠고 힘든 곳입니다. 그 광야에서 필요한 음식은 단순해야 합니다. 그 광야에서 필요한 복장은 단순해야 합니다. 단순하지 않으면 광야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의복과 복장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도 단순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무슨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단순해야 내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세례요한이 머물던 그 광야보다 더 힘들고 메마른 광야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광야에서 우리는 더욱 인생의 메마름을 배울 것입니다.그 인생의 메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을 것입니다. 그 메마름을 채우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더욱 메말라할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들의 광야의 삶을 단순해야 합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잠깐의 나그네 인생을 사는 존재들입니다.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지는 꽃과 같은 존재입니다. 광야는 우리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 잠깐 지나가는 곳입니다. 그 광야에서 우리는 잠깐의 나그네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행을 하면 할수록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합니다.
복잡하면 여행이 어렵습니다. 먼저 짐이 단순해야 합니다. 제가 처음 해외에 갈때와 점점 갈때에 경험한 것이 있는데 바로 짐이 줄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해야 여행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행을 할때에는 목적지는 하나로 분명하게 정하고 단순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생각이 많아서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그러면 그럴수록 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나그네길은 단순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도 믿음 생활도 단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을때 어린아이의 중요한 특성이 무엇입니까? 단순합니다. 대개 어린아이들 보면 말을 하면 그대로 믿고 단순하게 그대로 순종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요 그것이 소명자의 삶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까다로운 성품으로 태어났습니다.
목회를 하기 전까지 저는 이 까다로운 성품 때문에 스스로 괴롬이 많았습니다.
가령 남들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혼자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가령 성경을 보더라도 성경에 나와있는 것들 말고 그냥 지나가는 중요하지 않는 것들을 혼자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왜 하나님은 사탄을 만들었을까? 왜 하나님은 선악과나무를 만들었을까 왜 주님은 가롯유다를 선택했을까? 이런 것들은 성경에 명확하게 답이 나와있지 않고 성경전체적인 뜻에 비추어서 추론해야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복잡하게 생각하면서 오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고 나의 신앙에 유익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그것을 제일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꼭 알아야 할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도 모르면서 사소한 것들을 너무 알려고 하면서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좀더 단순해지기를 힘쓰면서 살고 있는데 이제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회도 나의 계획 나의 생각 나의 프로그램을 막 세워서 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광야는  복잡하고 화려한 옷으로 화려한 음식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단순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3. 부름받은 자는 들러리의 삶을 삽니다.

7절을 보십시오.
세례요한은 들러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들러리가 누구입니까? 신랑 옆에서 신랑을 빛나게 해주는 사람들입니다. 드라마로 말을 하면 주연을 빛나게 해주기 위하여 필요한 엑스트라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런 들러리의 삶은 철저하게 주인공에게 초점을 모아야 합니다. 신랑 옆에 들러리는 신랑이 빛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엑스트라는 주인공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위해서 들러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위해서 들러리의 삶을 사는 것을 사명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요한복음3장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리고 세례요한은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하게 흔적없이 사라져갑니다.

물론 들러리의 삶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들러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많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자신을 끝까지 낮추고 주님을 흥하게 하셨습니다.

종종 보면 인생 속에서 우리의 삶 중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꾸 내가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자꾸 내가 흥하려고 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흥하려고 할때 망합니다. 내가 높아지고자 할때 낮아지게 됩니다. 가인이 그랬습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가롯유다가 그랫습니다. 이들은 결국 다 버림을 받고 맙니다. 그러나 반대로 들러리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들러리로 주님의 들러리로 살았던 자들이 결국 주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주님깨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모두가 예수님의 들러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들러리인 것입니다.
세계2차 대전 뒤에 나치의 핍박 속에 살아남은 네덜란드출신의 할머니 중에 ‘코리텐 붐’이라고 하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는 나치의 감옥 속에서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살아남은 뒤에 세계적인 전도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가서 간증을 하는 곳마다 많은 큰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미국을 방문했을때도 가는 도시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미어졌습니다. 그녀의 메시지와 간증이 끝날때마다 사람들은 끝없는 박수갈채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상하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본 한 신문기자가 궁금하게 여기면서 물었습니다. “코리 여사님 정말 기쁘시지 않으십니까?” 이때 코리여사가 그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나귀가 착각하면 쓰겠는가?”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에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호산나 ’소리질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갈채였습니다. 그것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소원의 박수였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그것을 자기에게 보내는 박수로 착각한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들러리입니다.
우리는 나귀와 같은 자들입니다.
요한은 주인공되시는 예수님을 소리높여 외치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달한 다음에는 조용하게 침묵합니다. 그것이 요한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무대 위로 올라오자 그는 조용히 무대 뒤로 퇴장합니다. 그리고 순교의 제물이 되어 인생을 마칩니다.

부름받은 자는 시끄럽지 않습니다.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위해 들러리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되시는 그분을 위해 들러리로 살아가는 자리로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메신저로 우리 모두가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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