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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약 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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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약 4:13~17)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Tuesdays with Morrie)" 이란 책이 있습니다. 대학시절 사제관계였던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교수와 미치 앨봄(Mitch Albom)의 대화로 내용은 전개됩니다. 미치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여 오로지 돈과 일에 매달려 보냅니다. 30대가 된 그가 무심결에 TV에서 불치병인 루게릭에 걸린 모리 교수의 인터뷰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 순간 대학 졸업식 때 모리 교수에게 자주 찾아뵙겠다는 약속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모리 교수를 화요일마다 찾아가 만납니다. 모리 교수는 생생한 삶과 죽음에 관한 강의를 통해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를 들려줍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모두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모리 교수는 불치병으로 인한 죽음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남은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줍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옵니다. 불가피한 죽음이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남은 바 인생이 결정됩니다.

지난주간에 동역자이던 김요한 목사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내내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안 하든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전도서 말씀처럼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권력이나 재산, 지식이 많은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면 누구나 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죽는 날을 알지 못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본문에는 우리의 생명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정의합니다. 인생은 헛되고 우리의 생명은 짧습니다. 고로 이사야서 40장 6-7절은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화는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은 여호와의 기운이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과 같다" 고 말씀합니다. 시편 102편 3절은 "대개 나의 사는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도다" 라고 인생을 잠깐 보이다 사라지는 연기에 비유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생은 안개와 같고 풀과 같고 연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토록 허무한 인생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는 기한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목적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말에 '철부지' 라는 말이 있습니다. 철 즉 때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것 같아도 인생의 때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 때입니까? 무엇을 행할 때입니까?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라는 본문의 질문은 이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첫째, 다가올 죽음을 인식하라

미국에 윌리암 할스트(William Hallst)라는 부호가 있었습니다. 나이 60세가 되었을 때 자녀들과 친척, 친구들을 불러놓고 내 앞에서 농담이라도 절대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도 꺼내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역사에 나오는 황제는 신하들이 아침에 자신을 알현할 때마다 "폐하, 죽음을 기억하십시오" 라고 인사하도록 시켰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윌리암 할스트라는 부자는 죽을 때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갔지만, 로마의 황제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죽음은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만 안식과 평안을 준다는 교훈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세상 사람들 가운데 죽음에서 예외인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좀더 빨리 와 좀 더 늦게 차이만 존재할 따름입니다. 결국 모두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허지만 죽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으나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그늘 앞에서 두려워하며 떱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느니라". 즉 죽음을 인식하고 사는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임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죽음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영원한 도성인 천국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현실의 유익을 보지 않고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기도의 사람 모세도 시편 90편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화살과 같이 신속히 날아가는 삶 속에서도 죽음을 카운트 할 수 있는 지혜의 마음이 필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곁에 있는 그림자와 같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 죽음이 온다해도 담대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 허탄한 자랑을 피하라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이 러시아를 침공하려고 계획을 세울 때, 부하들이 하나같이 일어나서 나폴레옹을 막았답니다. "유럽대륙을 다 정복했는데 러시아까지 침공한다는 것은 명분이 없고 이미 가진 땅도 너무 넓습니다. 그리고 각하,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성취케 하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번 일은 단념해 주십시오." 그때 나폴레옹이 말했답니다. "아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성취한다." 그 후 러시아로 침공해 들어갔다가 그는 완전히 실패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허탄한 자랑이 많습니다. 어찌하여 사람들이 자랑하는 위대한 기술이 사고를 내고 무너지고 터집니까? 이는 인간의 완벽에 대한 교만을 하나님께서 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정밀 기계도 가끔 오작동 되고 우주선의 사고도 가끔 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가 안 나면 사람은 교만해져 하나님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스스로 자랑할 수 없고 장담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여기의 '허탄한 자랑' 이란 '거만한 태도와 허풍' 입니다. 안개와 같이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주제에 거만한 태도로 허풍을 떨면서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의 자랑뿐 아니라 미래의 자랑은 불신앙적인 것이며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의 교만이기에 악한 것입니다. 인생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해보지만 안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역사를 보면 인간의 부질없는 야심들은 모두 다 깨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허탄한 자랑들은 죽음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제 힘과 능력으로 된다고 자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잠언 27장1절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미련하고 우둔한 존재인 인생들에게 허탄한 자랑을 피하라는 경고입니다.


셋째,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는 '인생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생에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입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내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이 내게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미 만났던 사람, 앞으로 만날 사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제일 중요한 사람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살 때 후회 없는 인생을 보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짧은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영원을 생각하게 하시고 선한 일을 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할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나중으로 미루어서는 더욱 안 됩니다. 인생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이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최선을 다하며, 기회가 있는 대로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여기의 '선' 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것, 참된 것, 바른 것,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을 행하는 태도입니다. 죽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기쁘게 감당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 3장12절에서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유익을 좇는 삶은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베풀며 나누는 삶은 풍성해 집니다. 그럼에도 나누지 못하고 땅에 쌓아두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좀 더 참을 것을, 좀 더 베풀 것을, 좀 더 재미있게 살 것을". 주님이 부르실 때 후회하지 않도록 선한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오늘 밤 12시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다면 지금부터 그 시간까지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웨슬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던 대로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라고 뜻깊은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매일 매일을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기에 죽음이 온다해도 새삼스럽게 다른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의 삶이 죽음의 준비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대로 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죽은 날로 기억이 됩니다. 세상을 떠나면 생일이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죽었는지가 기억됩니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름을 남기기 원하십니까? 어떤 모습으로 남기 원하십니까? 죽음을 준비하며 영원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비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코 길지 않은 인생입니다. 부디 허탄한 자랑을 피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복된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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