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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자신의 성품을 가꾸자! (요 1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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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자신의 성품을 가꾸자! (요 13:4-15)

그렇게 무덥던 여름이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입니다.  대단히 아름다운 가을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맞았습니다.  우리는 이 좋은 계절에 모든 불신과 모든 낙심과 모든 증오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몰아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파괴적인 힘은 부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것은 다 몰아내고 다시 독수리 같은 새 힘을 가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환경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환경을 바꾸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속의 태도와 자세를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권능을 힘입고 내 삶의 태도와 자세에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나는 부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입으로 자꾸 시인을 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자기 체면을 걸어야 됩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을 긍정당과 부정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긍정적인 사람을 붙들고 일하셨습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바란 광야에서 정탐꾼들이 모여 민족회의가 열렸습니다.  열 명은 부정당이고, 두 명은 긍정당이었습니다.  두 명의 긍정당들이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자!"라고 믿음으로 밀고 나갔을 때 긍정당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은 써야 힘이 납니다.  우리 속에 생각을 써야 생각이 납니다.  우리의 생각을 항상 긍정적으로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만큼 역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하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일어나 역사의 주역이 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 모두가 가을 풍경을 한 번 그려보십시다.  무엇을 그리고 싶으십니까?  누렇게 곡식이 익은 들판이나 아름답게 단풍이 물드는 산, 잔잔한 호숫가나 한가로운 농촌 풍경을 한 번 그려보시겠습니까?  다 아름답습니다.  다 멋있습니다.  모두가 다 탐이 납니다.  잎보다, 꽃보다 열매가 더 탐이 납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자기 자신의 성품을 한 번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내 성품의 아름다움은 무엇이 있을까?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감동하고 칭찬하고 싶은 성품이 무엇일까?  이것이 어렵거든 빌딩을 한 번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빌딩을 짓는데 많은 자재들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름답지 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재들이 어떤 질서와 조화를 따라 지어지니까 얼마나 보기에 좋고 아름답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성품을 그릴 때에 좀 불만스러운 것도 있고, 좀 숨기고 싶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좀 못마땅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정리하면 아름다운 성품 빌딩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내 받은 성품과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세우기만 하면 뭔가 대단한 역사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너무 학대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성품을 너무 모나게 만들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빌딩을 짓듯이 내 성품을 하나님 안에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꽃밭의 정원을 가꾸듯이 내 성품을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가꾸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은 철저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리와 원칙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하나님의 법대로 하라고 하면 귀찮다고 그만둡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성품을 원하십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사명은 '모든 인류가 배워서 뒤를 따를 모범이 될 수 있는 순수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세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이 시대 속에서 우리들에게 부여한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탁한 공기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은 자기 집 공기가 얼마나 탁한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부정과 불법이 보편적인 사회에 묻혀서 오래 살다보면 자신의 성품을 보지 못합니다.  불감증의 환자처럼 자신의 모나고 잘못된 성품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받게 되는 상처가 얼마나 깊고 아픈지 깨닫지 못합니다.  신경조직의 마비현상이 오면 썩어도 모르고 잘라내도 모릅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사람들을 향해서 따지고 듭니다.  나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환경을 탓합니다.  결국 자신도 힘들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입니다.  죄인된 성품을 물려받은 우리들인데 어떻게 하면 변할 수 있을까?  믿음의 주요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성품을 본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만 가졌다고 한다면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도 죄인된 성품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육에 속한 죄인된 그 성품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겠다는 자기 결단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타락을 막는 힘보다 더 위대한 힘은 없습니다.  생명의 성결 능력 이상 위대한 능력은 없습니다.  이 위대한 힘과 능력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그들의 성품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갔습니다.  내 안에 육신의 죄인된 그 성품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내 안에 여전히 혈기와 모순과 부정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은 것처럼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얼마나 멋있는 고백입니까?  얼마나 멋있는 사람입니까?  사실, 바울만큼 성품이 모가 나고 거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종교적 열정주의에 빠져서 인정사정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자신의 성품이 변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하늘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 아름답고 위대한 것은 사람들의 심령 속에 그 사랑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싱싱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의 심령을 깨우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영혼이 싱싱하게 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자녀를 기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녀를 기르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부모가 자식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자식의 행복을 원합니다.  둘째는 안정된 삶, 특히 경제적 안정을 원합니다.  셋째는 장래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넷째는 우리 부모가 그 자식들에게 베푼 일에 대하여 감사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우리 자식들이 이룬 삶의 성취를 형제와 이웃과 나라를 위해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육신의 자식들이 우리의 속을 썩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속을 깨나 썩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또한 안정된 삶을 원하십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장래에 더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제껏 베풀고 행하신 일에 대해 감사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룬 삶의 성취를 이웃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기를 힘써야 합니다.  내가 이루었다고 하지만 내가 이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룬 것들을 가지고 이웃들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로 내려가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적이 없는 삶은 낭비일 뿐입니다.  목적이 없는 삶은 오히려 자신과 남에게 방해거리가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웃과 형제들에게는 평화하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여있는 썩은 물보다 무서운 급류가 더 쓸모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고여 썩은 물도 정수만 잘하면 됩니다.  무서운 급류도 통제만 잘하면 됩니다.  그러면 귀하게 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모든 생명을 정수하시고 통제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만 바로 통과하면 됩니다.  내 성품이 내가 생각해도 못마땅하다고 생각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라도 다시 주님을 붙드십시다.  주님을 붙들고 내 성품을 가꾸어 가십시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 밭의 토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마음 밭의 토양을 가꾸십시오.  성경은 언제나 마음 밭의 토양이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무데서나 열매가 맺지 않고 열매 맺는 밭이 따로 있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싹도 내지를 못합니다.  돌밭은 나름대로 싹이 나오지만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말라죽었습니다.  햇빛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해가 돋았다는 것은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뿌리가 깊지 못한 것은 햇빛이 복이 아니라 저주로 타서 말라죽었습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밭에는 가시가 기운을 막아서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의 토양을 만드십시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좋은 마음의 밭을 만드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안의 내 성품을 가꾸십시오.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마음의 밭을 옥토로 바꾸십시오.  어떤 사람은 환경 탓을 합니다.  사람 탓을 합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환경과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성품이 문제입니다.

자기 성질은 타고 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천성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성은 하나님도 바꿀 수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천성은 끈질기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꾸어질 것 같지 않던 내 천성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바꾸어집니다.  모나고 거친 성질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면 부드럽고 아름답게 순화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자신의 성품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가끔 예수 믿는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개 집사님은 신앙은 좋은데 입만 열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만 해"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 좋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항상 상처나 안겨주는 사람일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신앙 좋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어쩌면 예배에 안 빠지고, 기도회에 열심히 나오고, 교회 일에 열심인 정도를 가지고 우리는 신앙의 상태를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천천의 수양을 가지고 주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삶의 내용이 없는 신앙은 헛된 신앙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찬양을 하고, 뜨겁게 기도를 할지라도 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없다면 그는 지금 신앙생활을 잘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의 삶의 내용이 증거를 합니다.  삶의 내용이 없는 신앙은 결국 죽은 것입니다.  그런 신앙으로는 어떤 역사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좀더 많은 재산을 모으는 것입니까?  좀더 높은 명예를 얻는 것입니까?  그래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으뜸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래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더 위대해지고 싶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의 신령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삶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세상 권세를 잡는 것이었습니까?  세상의 명예를 얻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가 온 것은…"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사명을 나타내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비천한 자리에까지 낮아지시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에 아주 강력한 권세로 이 땅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시고 세상의 명예를 다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그분이 하신 말씀은 어떠한 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분이 걸어가신 삶의 발자취가 세상 사람들에게 감화와 감동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의 교회가 강조하는 중요한 사명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혼 구원을 외치면서도 오늘 이 땅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좋은 영혼 구원을 외치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의 소리에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솔직히 우리는 영혼 구원을 외치면서도 그들을 올바로 섬기는 일에는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 구원과 섬김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영혼 구원과 섬김은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섬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섬김은 결국 섬김의 대상에 대한 최선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최선의 유익은 우리의 구원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섬겨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목숨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기를 결단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에수님의 오심의 목적은 바로 섬김이었습니다.  섬김의 절정의 표현이 바로 자신의 목숨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인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아하, 내가 내 목숨을 드려서 섬겨야 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내 목숨을 주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런 거창한 섬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은 일 속에서의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 주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손수 수건과 대야를 들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장면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그 길은 바로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고자 하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야고보는 자신의 어머니를 앞세워서 예수님 앞에서 높임을 받고자 했습니다.  지금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높으냐?'는 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게 파여져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낮아지고자 하시는데 제자들은 높아지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자 하는데 제자들은 살아서 권세를 누리고자 합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갖습니다.  이스라엘의 정결 예식에 따르면 식사하기 전에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의 손과 발을 씻겨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이 일을 미루고 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그들은 섬김의 자리에로 내려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는 한 그들은 먼저 무릎을 꿇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수건과 대야에 물을 담아서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이 행동에서 무엇인가 느낌이 오는 것이 없습니까?  저는 본문을 읽다가 아주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참으로 깊으신 분이시다.'

우리는 본문에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깊은 배려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미루다 보니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저녁을 들기 전에 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그때까지 제자들의 행동을 기다리고 계셨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모습에서 어떤 행동의 징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저녁을 드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수건과 대야에 물을 들고 오셔서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아마 저녁 식사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에 부담을 안고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제자들을 위해서 서둘러 자신의 식사를 끝내시고 섬김의 자리에로 내려가십니다.  이것은 바로 작은 자들을 향한 깊은 배려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친히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이 가장 작은 일이 목숨을 드리는 일 못지 않게 소중하다는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섬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깊은 배려입니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분들이 먼저 다 밖으로 나오기까지 기다렸다가 타는 일, 짐을 들고 있는 분들에게 문을 열어 주는 일은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배려에서 나오는 섬김의 정신입니다.

교회 봉사에도 남이 가장 꺼려하는 일들을 스스로 자원하는 일, 화장실에서 화장지 두 장 쓸 수 있는 것을 한 장만 쓰는 일, 다른 사람들이 하기 힘들어하는 냄새나고 궂은 일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데서 시작되는 섬김의 정신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섬김의 정신은 다른 사람을 깊이 배려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독교는 약함을 숭상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강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는 모든 인간의 약함을 강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약한 것들이 다 강하여 집니다.  하나님은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꺼져 가는 등불이 아니라 어떠한 바람에도 쉽게 꺼지지 않는 횃불 같은 사람되기를 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은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강해집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함은 우리의 최종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강함은 보다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과 도구입니다.  강함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섬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약한 자들을 돕고 섬기라고 강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에게 정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꾀가 우리를 강하게 한다.  그러므로 으뜸이 되려고 해라.  섬김을 받는 자가 되려고 해라.'

그러나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진리가 우리를 강하게 하며 강함의 목적은 섬김을 받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섬김이 우리의 삶과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섬김은 옵션이 아닙니다.  섬김은 명령입니다.  섬김은 수단이 아닙니다.  섬김은 목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일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될 우리 주님의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우리들에게 '본'이셨습니다.  '본'은 누군가가 따라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는 바로 그의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의 의미는 바로 '따라가는 자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자처한다면 예수님의 본을 따라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내 한 몸 조금 편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작은 고난들을 견디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스스로 하늘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섬기시고자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이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동일한 삶을 명령하고 계시다면 우리도 겉옷을 벗고 수건을 들고 섬김을 결단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닌 섬기는 자로서의 보람과 기쁨을 누려보시겠습니까?

이씨시의 성자 프랜시스의 라베르나 산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저에게는 주님처럼 섬기다가 고난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제 몸에는 못 자국이 없습니다.  저에게도 주님의 고난을 알게 해 주십시오"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의 손과 발에 생긴 거룩한 5개의 못 자국을 우리는 거룩한 흔적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도 우리의 일생을 부끄럼 없이 마감하도록 거룩한 섬김의 흔적을 만들기 위한 기도와 결단이 필요한 때가 되지 않았는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만들기 위한 거룩한 운동을 내 안에서 일으키십시오.  사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고, 믿음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만들기 위한 작은 자를 위한 아름다운 섬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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