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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보이느냐 (막 8: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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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보이느냐 (막 8:14-26)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막8:14-26)

무엇이 보이는가? 곧은 것이 굽어 보이는 것도, 같은 길이의 사물이 차이나게 보이는 것도 우리의 착시현상일 경우가 많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가시적인 것들은 환경적인 요소로 인해서 달라 보일 때가 있다. 우리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것들은 이같이 실제의 모습과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느끼는 것, 해석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조건으로 볼 때에 모든 것을 다 잃은, 즉 3중 장애를 가지고 살았던 헬렌 켈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다 가지고도 이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물론 보기를 소원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3일 간 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책을 통해서, ‘한 시간 동안 숲 속을 걸었던 친구들이 돌아와서, 특별한 것 없었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비록 볼 수 없지만 작은 잎사귀, 소나무의 거친 가지, 자작 나무의 줄기, 새싹, 그리고 여린 가지들을 만지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눈을 뜬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보는 것이 이렇게 다를 수가 없다.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자주 바다를 즐기고 싶어한다. 그들이 보지 못한다고해서 바다에 관심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이 바다를 설명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바람, 온도, 새소리, 파도소리, 배고동, 아이들의 노는 소리, 심지어는 어떤 새가 날고 있는지, 배는 어느 쪽에서 진행하고 있는지, 아이들이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지, 그들은 휠씬 자세하고 섬세하게 묘사한다.

우리는 늘 많이 보고 많이 듣기를 원한다. 그리고 더욱 더 많이 듣고 많이 보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그렇지만 많이 듣고 많이 보아야 문화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꼭 보아야 할 것을 보고, 꼭 들어야 할 것을 들어야 한다. 헬렌 켈러는 시력이 없는 것이 장애가 아니라, 비전이 없는 것이 장애라고 말하였다. 오늘 말씀의 18절을 보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우리들이 잘 나갈 때는 우리의 주위에 사람들이 서성이며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방해를 느끼게 될 것이다.

혹여 우리는 주님을 그들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는가? TV 방송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3초 룰’이라는 것이 있다. 3초 만에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그들은 다른 채널로 돌리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급하고 바쁘다. 그러나 인생의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문화인이요 지식인이 되는가?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참으로 잡다한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 때가 많다. 연애인들의 사생활과 그들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남편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가 있다면 그녀는 어리석은 자임에 틀림없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늘 원하신다. 때로는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시면서까지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통해서라도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모든 것들 위에 당신의 음성을 독점적인 채널로 우리에게 전하시려고 할 때가 있다. 그 분은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기 위해서 항상 독점적인 방법을 원하시는 분이다. 나의 모든 것들이 나를 떠나고 힘에 겨워서 자신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려고 할 때, 파리한 눈으로 자신을 돌아볼 때면 그 앞에 계시는 크신 주님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며 최대의 교제이다. 그 분은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주님은 5천 명을 먹이시고 또 4천 명을 먹이셨다. 이것은 방금 전에 일어난 기적이었지만 그들은 또 다시 의논하고 있다. 16, 17절을 보자.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주님은 안타까워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라고… 그들은 떡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주님의 손을 보기를 원하셨다. 떡을 보는 사람들은 한 끼를 해결할 뿐이었지만 주님의 손을 보는 사람은 영원히 허기지지 않을 것이다. 떡이 보인다면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없고 떡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은 떡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7, 18절을 보자.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우리는 왜 교회에 나와서 예배 하는가?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기도제목을 주님께 드리며 간구한다. 때로는 자신의 기도제목이 응답되지 않아서 고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오직 주님을 바라보자. 오늘의 본문이 주는 핵심적인 복음은 주님의 사랑보다 더 심오하고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떡을 말씀하시며 자신의 몸을 떼어주심을 말씀하고 있다.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성찬을 통해서 자신을 떼어서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우리의 허기를 해결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주님을 발견해야 한다. 떡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과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 떡의 주인되시는 주님을 믿어서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영생을 살아야 한다.

성경을 볼 때에 이 사건이 왜 여기에 위치하는지를 눈여겨 보는 것이 중요하다. 14절에서 제자들이 떡 이야기를 할 때에 주님은 생명의 떡을 말씀하시며 안타까워 하셨다. 그리고 22-26절까지는 시각 장애인을 고치시는 사건이 나온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이것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무엇을 보기를 원하시는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셨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시기를, ‘무엇이 보이느냐’ 하셨다. 그는 사람이 보이고 나무들이 걸어가는 듯하다고 말했다. 주님은 이에 만족하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다시 안수하시니 그가 만물을 밝히 보았다. 예수님은 왜 주를 보지 못하느냐고 탄식하시는 듯 하다. 예배하며 기도제목에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하여도 오직 주님만을 소유하고 기쁨으로 나아가자. 예수 그리스도를 독점하여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실패자가 될 수 있다.

F. J. Crosby라는 분을 잘 알 것이다. 그 분은 시력 장애자였다. 그리고 그 분의 부모들은 이로 인해서 충격을 받아 돌아가셨다. 그후로 F. J. Crosby는 할머니와 살게 되었는데, 할머니는 Crosby를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서 혹독한 삶으로 인도하였다. 할머니는 Crosby로 하여금 성경 전체를 외우게 하였다. 그녀의 언어능력, 작사능력 등 수많은 능력은 이렇게 형성되었고 9천 개 이상의 찬송시를 쓰게 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Crosby가 했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Crosby는 장수의 축복도 누렸다.

그녀가 남긴 감동이 되는 일화 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교회에서 집회가 있던 날이었다. 그 교회는 유난히 신유의 은혜가 있던 곳이었다. 집회를 은혜 가운데 마치고 Crosby가 교회를 나올 때에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눈을 보지 못하면서도 이렇게 은혜가 되는데 눈을 보게 된다면…오늘 당신이 앞을 볼 수 있도록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나 Crosby는 이 기도를 받기를 사양하였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눈을 뜨고 싶을 때가 따로 있습니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눈을 뜨고 오직 우리 주님을 가장 먼저 바라보고 싶은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어도 좋다고, 그리고 오직 우리 주님께만 집중하겠다는 믿음이었다. 그녀는 우리보다 훨씬 더 멀리, 우리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바라다 보는 사람이었다.

중국에는 약 2,700만 명의 농아들이 있다. 그리고 10년 전부터 농아 신학교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약 40-50 개의 신학교가 있다. 이제는 농아 목사님이 배출되고 있다. 그들은 주로 기차를 타고 다니며 수화로 전도를 한다. 대개는 20 시간 이상 기차에 머무르며 수화로 복음을 전하는데 공안당국의 요원들은 이 수화를 이해할 수없기 때문에 매우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할 줄 알고 능력이 있는 전도자들은 오히려 중국에서 전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부족하고 능력이 없어 보이는 농아들은 마음껏 전도할 수 있다고 하니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특수교육의 introduction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모든 장애자들은 정상인들과 같은 인격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공안당국 요원들은 처음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의아해 하지만 자세한 말씀을 듣고 나면 ‘지금은 도울 수없지만 나중에 당신들을 꼭 돕겠다’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엑스선, 감마선과 같은 물질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그것들이 발견된 이후에, 지금 그들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볼 수 있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혹여라도 불필요한 것을 너무 많이 보아서 이 귀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눈을 밝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이 아침에 문제를 보고 떡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손과 얼굴을 바라볼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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