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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믿음(8) (롬 8: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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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믿음(8) (롬 8:35-39)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의 뛰어난 믿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지나 신약으로 오면서 신약성경의 두 중심을 이루고 있는 사람 중에 먼저 베드로를 보았고, 또 한축을 이루고 있는 바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에 대해서는 성경 기록도 풍부하고, 워낙 뛰어난 사람이라서 몇 번에 걸쳐 그의 믿음을 찾아보았습니다. 지난 7번에 걸쳐 그의 믿음을 생각했는데, 이제 오늘 마지막시간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믿음을 생각하면서 선택한 성경이 오늘 본문 로마서 8장입니다. 이 말씀을 바울의 마지막 믿음으로 찾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말하면 지난주에 보았던 디모데후서가 더 적합하지만 본문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먼저, 바울신학의 절정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상이나 신학의 대표적인 성경이 로마서이고, 로마서 중에서도 8장이 절정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신학을 말할 때 로마서가 중요하고, 8장이 중요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바울의 신앙에 있어서도 본문이 가장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부터 삶을 마치기 때까지 어쩌면 많은 시련과 환란과 어려움의 연속에서 그를 붙잡고 있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본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순간순간 이 말씀을 의지하고 위로와 힘을 얻었고,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신앙에 있어서도 이 말씀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본문은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누구나 좋아하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제 성경은 빨간 줄을 긋지 않습니다. 말씀을 대할 때 선입견을 버리기 위함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마음에 느끼는 대로 받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제 인생에 큰 위로와 힘이 되었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기에 마음속에 새긴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본문을 통해 발견하는 바울의 믿음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바울의 확신으로 시작하여, 강한 확신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으리요, 끊을 수 없으리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결정적으로 38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이것보다 강력한 믿음이 또 있을까요? 자기가 믿고 의지하고 나가는 모든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보다 귀한 믿음을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믿음을 보여주었지만, 본문에서 결론을 맺는 귀한 믿음을 말합니다. 확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확신을 갖지 않으면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확신하는 믿음이 정말 귀한 믿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에 대한 확신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연 무엇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본문을 통해 바울은 그것을 우리에게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바울은 3가지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오늘 말씀을 8장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이 결론의 말씀이 오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바울이 가장 많이 반복하며 강조하는 말이 바로 하나님, 복음,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와 자기를 만세전부터 선택하고 구별하여 자녀로 부르셨고, 사명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을 처음부터 강조하고, 본문에 와서도 다시 강한 확신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하고 자녀를 삼으시고 불러주신 확신,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확신을 밑바탕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믿음입니다. 내 신앙에 있어서 참 중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내가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 가운데 구원의 확신이 우선적이어야 합니다. 이 신앙 없이 나의 믿음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가운데 이것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이 세상에서도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시고, 죽으면 영원한 하늘나라로 가실 것을 믿으십니까? 한번 진지하게 자신을 향해 물어보십시오. 좀 더 실제적으로 묻는다면 ‘나는 오늘밤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구원의 확신을 갖다가도 오늘밤, 지금, 천국을 말하면 자신이 없어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지금의 이 모습으로는 천국에 못갈 것 같은 불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과 구원을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구원과 성숙은 다른 것입니다. 신분과 수준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바뀐 것을 말합니다. 신분이 바뀌었다고 한 순간에 우리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족해도 우리는 하나님이 자녀이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나 지금의 수준과 관계없이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수준과 관계없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천국은 분명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심판으로 옮겼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5:24, 6:37)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의 지금 수준과 관계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끝까지, 변함없이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천국까지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으로 흔들림이 없이 주님을 따라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사랑의 확신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강력하게 믿고 확신하는 것에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전에도 사랑하고 있고,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으로 본문을 시작하고, 또한 결론도 그것으로 맺고 있습니다. 35절, 39절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끝까지 사랑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결국 바울의 이런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이끈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도 갖고 살아야 하겠지만, 하나님이 나를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종종 우리 어렸을 때 아이들을 어르거나 놀릴 때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른들이나 부모가 이런 말을 처음에는 믿지 않던 아이들이 어른이 정색을 하고 몇 번씩 신중하게 말하면 어른의 속임수에 넘어가 곧잘 울음을 터트리곤 했습니다. 요즘시대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 당장 인터넷에 들어가 정보를 확인해서 오히려 어른들을 가르치려 할 것입니다. 이제 그 말이 더 이상 효력이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그 말이 참 거슬릴 때가 많았습니다. 저도 종종 들었던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말 내 부모의 자녀가 아닌가, 부모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 고민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의 확신에서 흔들릴 때가 언제일까요?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무엇을 하고 계시나, 나를 정말 사랑하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만큼 고난당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 고난에 대해 36절에서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삶의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8장 1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혹, 고난을 당할 때 흔들리지 마십시오.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앞으로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또 언제 사랑의 확신에서 흔들릴까요? 우리가 범죄할 때입니다. 죄를 짓고 잘못하면 하나님이 이런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책하면서 나는 아니야,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집니다. 물론 죄를 짓지 않으면 좋겠지만 여전히 우리의 수준이 그리 높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를 짓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7장에서 깊은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8장에 들어오면서 그리스도 예수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용서의 확신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죄인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극복하고 이길 수 있도록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7절에서 넉넉히 이긴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확신을 가지십시오. 고난을 당할 때, 내가 죄를 짓고 잘못할 때 하나님의 사랑에서 흔들릴 수 있지만, 바울처럼 넉넉히 이기는 믿음으로,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환경의 확신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인생에게 나타난 환경은 그것이 끝이 아니고 다 지나간다는 확신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강력한 확신을 강조하면서 나열한 모든 단어들을 보십시오.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이 모두가 다 환경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 모두가 다 우리 인생에 나타나고 경험되는 것들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인생이었고, 앞서간 많은 신앙의 선진들이 처한 환경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 인생에 전혀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마디로 이것의 연속입니다. 이런 환경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 있고, 지금도 이런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있고, 앞으로도 찾아올 수도 있는 환경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런 환경을 말하면서 깨달은 진리가 바로 모든 환경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지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환경이 영원히 나를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당면한 모든 어려움의 환경을 맞이할 때 그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이제 지나간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환경은 바뀌고 변한다는 확신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울의 평생을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모든 상황 속에서도 비굴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환경을 초월하는 확신으로 인생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고, 요즘 같은 때에, 우리가 한 평생을 사는 인생에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믿음이요,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환경은 다양합니다. 환경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변하고,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환경은 끝이 아니라 과정일 뿐입니다. 어떤 환경도 나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환경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환경이든지,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바울을 포함한 신앙의 위인들이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전해오는 이야기가운데 이런 의미 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다윗 왕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다윗이 가장 뛰어난 세공장을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가장 멋진 반지를 만들어 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반지를 주문하면서 다윗은 그 반지 안에 자기가 평생 기억하고 새길 문구를 하나 적으라고 말했습니다. 세공장은 자기의 기술을 알아준 왕을 위하여 몇 날을 밤새워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글귀를 쓸까를 고민하다가 당시 지혜롭기로 소문난 솔로몬왕자를 찾아갔습니다. 솔로몬은 이야기를 다 듣더니만 한참 고민하다가 이렇게 적어 넣으라고 했습니다. “이제 곧 지나가리라”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왕이 영광의 순간에 이 글귀를 본다면 결코 교만하지 않을 것이다, 곧 지나가기 때문에... 만약 왕이 고난의 때에 이 글귀를 본다고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이것도 지나가기 때문에...’ 다윗은 이것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좌우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영예와 축복을 누리는 순간에도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통과 괴로움의 때에도 결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이것 역시 지나가기에, 다 지나가는 과정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영광의 순간도, 아픔의 순간도 지나갑니다. 기쁨의 시간도 눈물의 계곡도 지나갑니다. 우리 인생에 그 어떤 환경도 우리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만해서는 안 되고, 또한 우리는 낙심하거나 절망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나를 영원히 지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교만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바울을 연구하면서 바울의 기록과 서신가운데 가장 많이 반복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어로 ‘remind'라는 말입니다. 번역하면 ’생각나게 하다, 상기시키다, 기억나게 하다, 일깨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모든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늘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진리를 생각나게 했고, 상기시키도록 권면했습니다. 그것은 오늘 바울의 믿음의 결론을 내리는 이 시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바울의 믿음을 기억하고, 다시 상기시켜 보십시오. 여덟 번에 나누어 보았던 그의 믿음은 풍성을 누리는 믿음을 시작으로, 직분의 고귀함을 아는 믿음, 자기를 비교하는 믿음, 기뻐하는 믿음, 자족하는 믿음, 긍정적인 믿음, 부끄럽지 않는 믿음, 담대한 믿음,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믿음, 죽는 믿음, 사는 믿음, 부활의 믿음, 수고하는 믿음, 전도하는 믿음, 떠날 기약을 아는 믿음, 달려갈 길로 가는 믿음, 사람들과 함께 하는 믿음, 치유되는 믿음, 말씀을 끝까지 붙잡는 믿음, 그리고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이 귀한 바울의 믿음을 늘 기억하고, 상기시키면서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한 시대를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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