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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에 가장 좋은 만남 (요 1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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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요 15 : 7 - 16
제 목 : 인생에 가장 좋은 만남

사람은 태어나서 네 번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인생의 운명을 결정짓고 살아  간다고 합니다.  그 네 가지 만남이란, 어떤 것입니까? 
첫 번째 만남은, 부모와의 만남이지요?  이것은 다른 세 가지 만남과는 달리  불가항력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만남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첫 번째 만남인 부모와의 만남을 통해, 유년기까지의 인격이 형성 되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형성된 인격은, 2차적인 수정이  없는 한, 평생 동안 나타나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은, 친구와의 만남입니다.  인생에 두 번째 발생하는  이 친구와의 만남만 잘 이루어져도, 인생의 운명은 수정될 수 있고, 더 나은 인생으로 전환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 27 : 17절에 보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아멘!! 
그래서 혹 부모를 잘 못 만나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친구를 잘 만나게 되면, 인생에 도움이 되고, 또 많은 유익을 얻을 수가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렇지 못하고, 대게는 유유상종의 만남으로 끝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친구와의 만남도 실패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은 무엇입니까?  스승과의 만남이지요. 
스승을 잘 만나게 되면, 인생에 큰 영향력을 발휘해서 좋은 꿈을 가지게 되고, 용기를 가지고 현실의 불우한 환경들을 이기며, 결국 그 꿈들을 이루며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에 배출된 훌륭한 인물들을 보게 되면, 인생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라고 했을 때, 선생님이라는 대답이 참 많이 나왔던 것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현실은 또 어떻습니까?  이런 참다운 스승과의 만남이 참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고로 “군사부일체” 라고 해서, 임금과 사부는 같다고 여길 정도로, 스승을  존경하며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따를 수 있는, 참다운 스승을 찾아보기가 참 힘든, 그런 안타까운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 이 스승과의 만남도 실패하는 경우가 이제는 많아졌다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에도 학교 선생님이 제법 많이 계시는 줄 아는데, 모든 분들이,  앞으로도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며, 참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선생님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리고 인생에 마지막으로 가지는 만남, 무엇입니까?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이 배우자와의 만남은, 결국 인생에 최종적 만남이 되어져서, 남은 인생의 전부를 좌우하게 됩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를 만나게 되면, 그 남은 인생이 참으로 행복하게 되고, 즐거울 수가 있게 되지만, 배우자와의 만남이 잘못 이루어지게 되면, 이제까지 행복했던 삶도 한 순간에 무너지면서, 남은 평생 참으로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이혼율이 세계 1위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세 쌍 중에 한 쌍은 이혼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볼 때에, 인생에  배우자와의 만남도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참 많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가집니까?  이처럼 인생에 중요한 네 가지 만남이, 오늘날 현실적인 안목으로 바라봤을 때, 뭐 하나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이 너무나도 악해져가고, 타락일로로 가다 보니까, 좋은 친구와의 만남이나, 좋은 스승과의 만남이나, 좋은 배우자의 만남도 이제는 기대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이, 참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날 이러한 현실을 바라볼 때에,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 인생에 소망을 가질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런 안타까움 속에서, 더 이상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 채 인생을 불행한 가운데 마감한다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의 인생은  분명 그들과는 다른 줄 압니다. 
왜 다릅니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 네 가지 만남 이외에, 또 한 가지의 만남, 곧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보세요.  왜 성도들의 인생이 복됩니까?  왜 성도들의 인생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행복합니까?  왜 성도들이 인생이 즐겁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까지의 인생에 만남이 실패로 끝나고, 그래서 불행한 인생을 살아왔다 할지라도, 그 인생이 그냥 실패로  끝나지 않고, 결국에는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행복한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생의 첫 번째 만남인 부모와의 만남과 같이  불가항력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만남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해 주셨다는 것이예요.  믿습니까?  그래서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별하여 택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들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도, 복된 사람들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강권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또 다른 세 가지의 만남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과의 처음 만남은, 부모와의 만남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처음 만남이, 성도로서의 행복을 거저 얻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처음 만남 속에, 이제는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세 가지의 만남을 추구해 나갈 때, 비로소 인생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놀라운 축복을 누리며,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 세 가지의 만남은, 인생에서 이루어지는 나머지 세 가지 만남과 동일합니다. 부모와의 만남을 제외한 친구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이 세 가지 만남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그 결과를 또한 보장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 이루어지는 세 가지의 만남은, 모든 것이 확실하고, 그 결과 또한 언제나 보장되어져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에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할렐루야!!!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장해 주시고, 허락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세 가지의 만남을, 내 속에 시작된 이 신앙을 통해  이루어 나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앙 안에서, 이 세 가지의 만남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까? 
그 첫 번째 방법은, 하나님을 친구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한 친구와 같이 여길 때, 비로소 내 인생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도, 내 스스로가 하나님을 어려워하고 가까이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영혼의 구원만 얻고, 삶 속에서의 축복은 전혀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성도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부모로만 알고, 평생을 그 밑에서 어려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부모를 대하듯이, 평소에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살다가, 잠깐 잠깐 인사하러 하나님을 찾아옵니다. 
주일에 한번, 심지어는 명절에 한번, 절기와 같은 날에만 하나님을 찾아오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상태의 신앙으로서는, 결코 인생에 변화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아직까지 이런 정도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속히 하나님과의 만남을, 친구와의 관계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셔서, 이제는 부모로서가 아닌, 친구와 같은 만남과 사귐을 원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고민들, 이제는 그것을 혼자서 고민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와 아뢰며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예요.
이것을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인생의 고민을 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주님을 표현하는 말들이 성경이 많이 나타나 있는데요, 그 중에 “모사”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사꾼이라는 말이 있어, 좀 안 좋은 의미로 들려질 수 있겠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카운슬러라고 하는 좋은 의미의 말입니다. 
카운슬러의 뜻이 무엇입니까?  상담자라는 뜻이지요.  인생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해 나가는 사람이, 바로 카운슬러인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상담자가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의 친구가 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이런 좋으신 하나님을 우리는 알지를 못한 채, 오히려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을 좋은  친구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런 친구와의 만남 으로만 발전시켜 나가도, 그 인생에는 분명 변화가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안고 있는 고민이, 다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분명 해결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정도의 변화만 있어도, 여러분은 분명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모두가 마음의 문을 여시고, 주님을 새롭게 친구로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주 자주 주님을 찾으십시오.  사소한 인생의 문제라도,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며 도우심을 구하면, 하나님 절대 외면치 아니하시고, 차근차근  들어주시고, 그 문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여러분의 좋은 친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또한 하나님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필요할 때만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것은, 좋은 친구의 모습이 아니지요.  좋은 친구는 고민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지만, 좋은 일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에 좋은 일과 나쁜 일들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면서, 기쁨은 배가 시키고, 슬픔은 반으로 줄일 수 있는, 하나님과 좋은 친구의  관계를 맺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 첫 번째 만남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으로 끝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 친구와의  만남으로 끝나버린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영적으로 청소년기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기를 흔히 뭐라고 표현합니까?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질풍노도, 다시 말해, 감정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컨트롤 하며,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두 번째 만남을, 우리가 시도해야 하는데,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하나님을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문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 학교에 들어가면 큰 돌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사람이 되자”  “사람이 되자”어떤 학교는 아주 크게 이 문구만 쓰여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배울 때 비로소 사람이 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배우지 아니하면 짐승과도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장차 성인이 되어서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훌륭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원리도 마찬가집니다.  배울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 성인이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가 스승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예요.  친구와의 관계를 넘어서, 이제는 스승으로 삼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배울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당당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에 드러난 환경에 따라 신앙의 감정이 흔들리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끝이 나고, 어떠한 인생의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견디며, 이제는 하나님께로 배운 신앙의 방법대로, 스스로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당당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여러분의 인생에 스승으로 삼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분의 말씀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의  성공비결을 배우기 위해 학교나 학원을 찾아 갑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인생의 성공비결을 배우기 위해 어디로 찾아 가야 하겠습니까?  이 성전, 하나님이 계신 교회로 찾아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성전에서 예배하며 하나님 말씀을 자주 들어야 하고, 또 시간을 내어 따로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공부도 참석해서 성경의 진리를 깨달으며,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신앙의 방법들을, 터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배움을 자청하는 성도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는 너무나도 적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스승으로 삼는 성도들이, 그렇게 많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대신해 다른 것을 스승으로 삼고, 그것을 따르고자 합니다. 
인생의 성공을 제시하는, 보다 편한 방법들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아 가지 않습니까?  대나무 들고  굿하는 점쟁이들을 찾아가는 일은 별로 없겠지만, 흔히 말하는 예수 점쟁이들, 소위 성도들의 미래를 예언한다고 하는, 이상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사람들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신봉하며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그 사람들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도 하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요, 또한 어리석인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분들이 다 잘못되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영적인 세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사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렇게 교회에서 말씀을 통해 헌신하라고 할 때는 꿈적도 안하다가, 그 분들이 헌신하라하면, 왜 그 말을 듣고 헌신하느냐는  말입니다.  누가 하나님입니까?  지금 누구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대게 그런 헌신은, 대가를 바라는 헌신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해야 복을 받는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대가를 바라고 헌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세요.  그런 분들의 헌신은, 지속성이 없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이런 헌신은 하나님이 원하지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마음에 어떤 목적으로 헌신하는 지를 살피십니다. 만약 복을 받았다면, 그 축복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자칫 나타난 현상에, 우리가 속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딤후 4 : 3 - 4절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했습니다.  말세에 나타날 성도들의 증상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스승으로 삼지 아니하고, 다른 것을 관심을 가지고 스승으로 삼고 배운다면, 결코 그 인생에 행복과 성공을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성도들은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 55 : 2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오직 하나님만을 여러분의 인생과 신앙에 스승을 삼으시고, 그 분만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렘 26 : 13절에,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고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했습니다.  혹 지금 여러분의 신앙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그 무엇이나, 비 신앙적인 방법들을 따르고 있는 신앙이라면, 이제라도 돌이키시고, 교회에서 지도하는 대로, 또 설교 말씀을 통해 들은 대로, 성경공부를 통해 배운 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스승으로 삼은 성도들의 신앙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스승과의 만남으로까지 발전시켜 나감으로, 인생에 대한 전반을 지도받으며, 하나님이 제시한 신앙의 방법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놀라운 축복과 권세를, 인생에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마지막 남은 한 가지의 만남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물론 이제까지 제시한 두 가지 만남만, 여러분의 신앙에 제대로 이루어져도,  인생에 큰 변화와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제시하는  세 번째 만남까지 여러분의 신앙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축복의 근원으로, 또한 축복의 통로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 세 번째 만남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배우자로 만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나의 영적 신랑으로 맞이하라는 것이지요. 
아니 지금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한 상태가 아닙니까? 
그런데 또 무슨 결혼을 하라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혼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길 바랍니다. 
정략결혼이 있고, 실제 결혼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성도들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주님과 결혼을 했지만, 정략결혼, 계약결혼을 한 상태에 있다는 겁니다.

법적으로 실제 부부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천국 법원에 가서 혼인증명서를 떼보면, 틀림없이 예수님이 나의 신랑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동거함이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내가 예수님의 신부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랑 되신 주님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나를  실제 신부로 인정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잘못이 아니지요.  성도들이 신랑 되신 주님을 거부한 탓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 인생의 전부를 책임지지 않으시는 겁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신 장면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어떤 곳이었습니까?  혼인 잔치가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주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설명하시기 위해, 일부러 혼인잔치가 열리는 곳을, 첫 번째 기적의 장소로 선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가장 필요한 포도주가 동이 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일은 주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다른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었으면, 대단히 서운해 했을 그런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인생에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 모자라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 때 들려오는 음성이, “이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런 음성이 들려온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상하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야속하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아직 주님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때가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겠습니까?  그 혼인잔치에 주님은  주인공이 아닌, 일개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혼인잔치의 일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아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혼인잔치의 주인공과 같은 자격이 주어졌을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는,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셨던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포도주로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듣게 되지 않았습니까?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천국에서나 맛 볼 수 있는 포도주를 사람들 앞에 내어 놓으므로, 모두를 즐겁게 하고, 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배우자로, 신랑으로 만나게 되면, 친구로의 만남이나, 스승으로의 만남과는 비교가 되질 않은 축복이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배우자로서의 만남은, 단순한 계약이 아닌, 실제 동거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예요.  부부가 무엇입니까?  한 지붕 밑에서, 한 이불 덮으며, 날마다 같이 사는 것이 부부 아닙니까? 
이러한 생활이 없는 부부라고 한다면, 그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실제 내 신앙이 주님이 함께 동거하는 신부가 되어질 때, 하나님은 나의 배우자로서의 역할을, 나의 신랑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내 인생의 가장이 되어 주셔서,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책임져 주시고,  모든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주님이 채워주시며, 주님이 내 인생의 자랑거리가 되어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주님이 만들어 주신 그  신비한 능력으로 인한 축복이 내 인생에 넘쳐나게 되어져서,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축복으로 인해 함께 즐거워하며 기뻐하게 되는, 그야말로 복의 근원이요, 축복의 통로가 되어지는, 놀라운 삶을 살아가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귀한 인생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신앙이, 주님과 동거하는 신앙, 하나님을 배우자로 만나는 신앙이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결혼 생활을 떠올리면, 금방 이해가 될 줄로 압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내가 같이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하고, 기도하는 자리에 내가 있게 될 때, 그 신앙이 바로 주님과 동거하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공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매일 새벽마다 교회 나와서 기도하는  신앙, 이런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이, 진정 주님을 배우자로 삼는 신앙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신앙이, 하나님을 배우자로 삼는 신앙입니까? 
교회의 모든 일을 내 일같이 여기며 수고하고 힘쓰는 신앙, 바로 이런 신앙이 주님과 함께 동거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우자로 삼는 성도가, 어찌 교회 일을 남의 일같이 여기겠습니까? 주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배우자가 되는, 주님의 신부가 되는 성도들이, 주님의 집안일인 교회 일을 거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배우자로 삼은 성도들은, 교회 일에 항상 충성합니다.  늘 부지런합니다.  여러 모양을 봉사하고, 또 전도합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며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일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이 헌신하는 신앙, 이 신앙이 바로 주님과 동거하는, 주님을 배우자로 삼은 신부로서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 15 :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주님과 연합된 삶, 주님과 함께 실제적으로 동거하는 신앙, 이러한 주님의 신부로서의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진정  인생에 행복과 기쁨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신앙 안에서 이 세 가지의 만남을 어떻게 이루어 갈 수 있겠습니까?  친구로서의 만남이나, 스승으로서의 만남이나, 배우자로서의 만남이나 동일한 것은,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고, 찾고 찾을 때, 비로소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들이 내 신앙 가운데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렘 29 : 12 - 13절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전심으로 찾고 찾는다는 말은 열심히 찾는다, 부지런히 찾는다,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찾는다는 말입니다.

때로 우리의 인생에, 예기치 않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유지해 나갈 수 있다면, 인생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줄 압니다.  그 문제가 오히려 축복이 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어졌듯이, 내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이런 귀한 축복으로 변화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성천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만나되, 인생의 친구로서, 인생의 스승으로서, 나아가 인생의 진정한 배우자로서 만나게 되어, 앞으로 남은 인생은 어느 누구보다도 복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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