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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 (롬 8: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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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롬 8 : 24 - 30
제목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

앞을 못 보는 어떤 눈먼 소년이, 친구들과 함께 연날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이웃 사람이, 그 아이를 보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애, 너는 앞을 보지 못하지 않니. 네가 지금 날리는 연이 하늘을 날고 있는지,  땅에 떨어졌는지, 너는 볼 수가 없지 않니?”
사실 그렇지요?  앞을 못 보는 아이가, 어찌 그 연의 상태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는, 그 이웃 사람을 향해 아주 확신있게 대답을 합니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세요?  지금 제 연은 공중에 높이 떠 있잖아요.”
“그래?”  그 사람은 의아해 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넌 보이지도 않는데, 그걸 어떻게 아니?”
그 때 그 소년이 하는 말이 “그래요. 저는 볼 수 없지요.  하지만 제가 잡고 있는 이 줄이 팽팽하게 끌어 당겨지는 것은, 연이 지금 하늘 높이 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해 준답니다.”  눈 먼 소년은, 이렇게 자신있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시면서,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나 회의를 품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은, 신앙의 연륜이 꽤 되시는 분들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처음 믿고,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오시면서, 나름대로 인생의 어려움들을, 다 겪으면서 살아오신 줄 압니다. 
그런데 그런 지나온 인생의 위기 속에서, 여러분의 신앙은 그때 과연 어떤 작용을 했습니까?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인생이 깜깜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찾는 이가 없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이가 없는 가운데, 홀로  그 고난을 외롭게 헤쳐 나갈 때가, 분명 있었는 줄로 압니다.
그러한 때에, 여러분의 신앙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런 때에라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 분을 신뢰하는 가운데,  그러한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가셨습니까?

만약 그러했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그 고난을 통해서, 더욱 더 단련되어졌을  것이고,  그 고난을 통해, 더욱 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가운데,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을 보게 되면,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인생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 고난의 순간에, 그 인생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아니 잃어버린 줄로 알고, 당황해 하며, 해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도로 살아가면서도, 전혀 신앙적이지 못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고, 그 결과로 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져 버리는, 그런 안타까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면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 된다는 거지요.  “내가 이 지경 될라고 이제까지 예수를 믿었나?”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나를 도와주시지 않고 이런 환난 가운데 나를 내버려 두시는가?”  신앙에 대한 회의, 더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들, 사실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분들을 말씀으로 권면하고, 또 기도로 돌이켜 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참 쉽지가 않다는 거지요. 

아마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런 신앙의 회의에 빠져 있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신앙의 회의는,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다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해, 우리의 신앙도 침체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먹구름에 태양이 가려져 있다고 해서,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니듯이, 인생의 먹구름이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헨렌 켈러는, 앞을 못 보는 소경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귀머거리인데다 벙어리인, 삼중고를 겪었던 중증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훗날 벙어리를 극복하며,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되었고,  눈은 보이질 않았지만, 점자를 익혀 결국 세계적인 교육자요, 저술가가 되어  졌습니다.  그녀가 이룩한 그 일을 오늘날도, 20세기의 기적이라 일컫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삼중고를 겪고 있던 그녀가, 어떻게 이런 놀라운 기적을 연출해 낼 수 있었을까?  세상 사람들은, 이 일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설리반 선생이라.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실로 50여 년을 함께 하면서, 그녀를 도왔던 헌신은, 정말 위대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헨렌 켈러를 도왔던 이 설리번 선생은, 헨렌 켈러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너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셨다.”  할렐루야!!

그래서 헨렌 켈러는, 그녀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다른 이에게는 나의 가는 길이 어두운 것 같으나, 나는 내 마음속에 신비한 빛을 가지고 갑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강한 영적 탐조등이, 내 길을 비춰 주고 있습니다.”  눈먼 소년의 손에, 팽팽한 연줄이 쥐어져 있듯이, 헨렌 켈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라는, 강한 줄이 쥐어져 있었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원으로 불러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으심에 아낌없이 내어 놓으셨고,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기에, 오늘 이 시간도, 이 예배의 자리로 우리들을  불러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했어요.  할렐루야!!

오늘 여러분 가운데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식어져 가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 가지 삶에 닥쳐진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과연 내가 지금까지  지켜온 신앙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신앙의 회의를 느끼시는 분은, 혹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특별히 그러한 신앙의 회의에 빠져 있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사실 믿음이란 것이, 누가 믿으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을 우리가 깊이 묵상하며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큰 깨달음이, 오늘 말씀을 대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오늘 우리들을 부르셨는가? 
왜 나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만드셨고,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게 하셨는가?  내가 확신하든 확신하지 못하든, 오늘까지 나를 끊어버리지 아니하시고, 연줄과 같이 팽팽한 모습으로 나를 잡아당기시며, 나의 손에 이 신앙이라고 하는 줄을  쥐게 하셨는가?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 - 25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말씀하셨는데, 실제 우리의 삶에는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너희게 주노라” 말씀하셨는데, 평안을 약속하셨는데, 실제 우리의 삶에는 그러한 평안이 없습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매치가 잘 되질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이예요.  실제 이러한 신앙생활의 딜레마 때문에, 심각한 영적 고민에 빠져있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강요하신 것입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는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능히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시며,  그 일을 하게 만드시는데, 우리는 지레 겁부터 먹고, 쉽게 포기해 버리고 만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포기하는 그 곳에,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무슨 역사가 있겠어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오늘 말씀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얻은 이 구원도, 우리의 노력으로 얻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값없이 받은 것 뿐입니다. 
엡 2 :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에게 가장 귀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 가운데 친히 이루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나타나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우리에게 왜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가장 큰 구원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께서, 인생에 나타나는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를 힘들어 하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닥쳐진 인생의 문제들.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대부분  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는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 개개인을 찾아가 주셔서, 그들 마음에 소망을  주십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장래에 대한 소망이지요.
여러분 18절 말씀을 보세요.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나님은 현재의 고난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장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소망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한 소망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듯이, 장래에 대한  소망 역시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시간 가운데,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이루시는 때, 그 때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이루시는 그 때가 가장 우리에게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신앙 안에서 소망을 가진 우리들이 해야 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5절에,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장래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십니까? 시 107 : 30절 말씀에,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 하시는도다.” 했습니다.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확신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며, 욥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하나님은 그 믿음의 사람의 인생에 순풍을 동원해 주시고, 거친 파도도  잔잔케 해 주시며, 결국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행 16 장에 보세요.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들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했습니다.  옥에 갇히기 전에 채찍으로 많이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매를 맞을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그저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결코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행 16 : 26절에 보니까,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인생의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때를 생각하시고, 인내하며 여유를 갖고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과 같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찬송할 때, 욥과 같은 갑절의 축복을 받을 것이고, 바울과 실라와 같이 옥 중에서 하나님을 찬미할 때, 여러분의 답답한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정말 안타까운 처지에 처한 분도 계십니다.  그 앞에 닥쳐진 문제가 너무나도 커서, 그 문제로 기도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동일한 소망을 주신 줄 믿습니다.  또한 그 소망을 이루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내가 기도할 수 있는 힘조차 없이 쓰러져 있을 때,  그저 입술에서만 “주여, 주여” 하는 기도가 맴돌지라도, 하나님은 내 마음의 소원을 충분히 헤아려  주시고, 그리 오래지 않은 적당한 시기에, 나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26절 말씀을 보세요.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들을 부르신 이유는,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여전히 인생의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잠언 21 : 5절에,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라.” 했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소망 주심을 확신하고, 여러분의 현재의 삶에 충실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감사치 못할 상황 속에서, 정말  기뻐하지 못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크게 감동하시고, 더 큰 역사로 함께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0절 말씀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어떻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들 각자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그 계획을 우리 가운데 이루시기 위해서, 그저 이루시는 것 아니지요?  우리가 영화로운 존재로 만들어 질 때까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우리의 불완전한 모습을 완전케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저 평범한 계획이 아닌, 사전에 미리  준비가 되어진, 치밀한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까?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오늘 말씀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엡 1 :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이유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창세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 지어지기 전, 천지창조의 사역이 나타나기 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창세라는 말은 “카타볼레” 라고 하는 헬라어를 쓰는데, 그 뜻을 보면, “아래로 던지다”  “기초 시작, 수태” 하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수태가 뭡니까?  아이를 낳았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므로 창세전이라고 하는 것은, 곧 내가 어머니의 복 중에 지어지기 전이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렘 1 : 5절에 보면,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했습니다. 

불완전한 우리들의 모습이지만, 완전한 모습으로 다듬어 가시기 위해, 하나님은 복 중에서부터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이모양 저모양 으로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고, 때를 따라 역사해 주셔서, 결국에는 우리들을 흠이 없고 완전한,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들은, 삶이 즐거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예요.  삶이 기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자존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그런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나를 존귀하게 보신다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는 보잘 것이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비록 가난하고, 무식하고, 병들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여전히 사랑해 주시고, 끊임없는 관심 가운데 나를 이끌어 주셔서, 결국 온전케 하여 주시고, 나를 영화롭게 높여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비록 힘든 처지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또한 여러분을 홀로 있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중국에 “황군벽” 이라는 유명한 동양화가가 있는데, 그는 폭포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를 방문을 해서 기자회견을 갖는데, 기자들이  즉석에서 폭포 그림을 한 장 그려줄 것을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웃옷을 벗더니, 아무 말 없이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제법 흘렸는데도 기자들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까, 폭포는 그리지 않고 엉뚱한 그림만 그립니다.
풀을 그리고, 바위를 그리고, 폭포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러던 중, 인내심이 부족한 한 기자가 화가에게 말을 건냈습니다.
“화백께 저희들이 폭포를 그려달라고 했는데, 저희 말을 잘 못 들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황군벽이라는 화가는 댓꾸를 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그림을 그려 나갑니다.

어느덧 시간이 흐리고, 그림이 완성이 되어졌습니다.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기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폭포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가 그린 그림은 온통 풀과 바위뿐이었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화가가 그림을 들고 벽에 그 그림을 걸어 놓았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가까이서 볼 때는 몰랐는데, 멀리서 그 그림을 바라보니까 웅장한 한 폭의 폭포 그림이 완성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가 붓을 들고 그린 것은 분명 풀과 바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까, 그려지지 않은    흰 여백이 웅장한 폭포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말없이 진행이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하나님의 계획이,  아직까지 여러분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 질문을 던져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더니,  겨우 이 정도입니까?  하나님 혹시 실수하신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그러한 질문에 대답치 않으십니다.  왜입니까?
대답한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예요.  우리는 눈으로 확인을 해 보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미리 말씀하신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의심할 것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들을 향한 놀라우신 계획에, 기쁨으로 동참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8절 말씀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너무나도 단편적으로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우리의 모든 불우한 환경까지도 섭리하셔서,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해석도 맞습니다.  틀린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씀 가운데는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 간의 화목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에 드러난 여러 가지 환경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교회의 공동체 속의 성도들 간에도, 합력하여 아름다운  선을 이루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 5 : 18절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 달란트들을 활용해서, 성도들 간에 화목케 하고, 그들을 힘써 돕는 선한 사역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돌아보는 가운데 부족한 것이 있거든, 자신의 넉넉한 부분으로 부족한 형제와 자매들을 도와주고, 또 자신에게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거든, 다른  형제와 자매의 넉넉함으로 도움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또 오늘 우리 성도들을 향한, 거룩하신 뜻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한 신실한 성도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남에게 많이 주면서,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너무나 풍족하게 베풀어주시니, 제가 나누어주지 않고서는 압사 당할 지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요, 또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가정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웃의 하나님이시요, 또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라는 개념 속에서, “모두” 라는 개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며, 서로가 도와주며 합력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명하신 선한 사역들을  감당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오늘 우리들을 부르셨고, 또한 귀한 직책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형제와 자매를 위한 삶으로, 더 나아가 우리의 이웃을 위한 삶으로 변화되어진 삶,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복음 증거의 삶,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하여, 오늘 우리들을 부르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 여러분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하는 이 말씀을, 개인적인 환경에만 국한시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내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하시면서, 그들이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내 주변의 모든 이들과 함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데 더 초점을 맞추시고, 이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분명한 목적을 알고 행하는 일은, 그다지 힘이 들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하는 일이  어렵질 않습니다.  오히려 성취감이 있고, 하는 모든 일들이 즐겁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러한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알고, 신앙의 목적을 분명히 깨닫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삶은 항상 기뻐하게 되고,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고, 또한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귀한 신앙의 삶으로 변화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부르신 이유, 우리 인생에 소망을 주시기 위해, 또한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합력하여 모든 주의 일들을 선하게 이루어 가게 하기 위해 부르셨다는, 이 세 가지 이유를 깨닫는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러한 신앙의 삶을,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살아가시는, 우리 성천 교회 모든 성도님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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