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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온을 생각하며 우는 사람들 (시 1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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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시온을 생각하며 우는 사람들
본  문  :  시편137:1-9

우리는 어디를 가다가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애국가가 다 끝나도록 서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안익태 선생님이 지으신 애국가를 부르면서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의 자부심을 길렀습니다. 

청년시절에 나라를 생각하면서 잘 부른 노래가 하나 있었는데, 양명문 작사, 김동진 작곡의 “조국찬가”라는 노래였습니다.

“동방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나의조국/ 반만년 역사위에 찬란하다 우리문화/ 오곡백과 풍성한 금수강산 옥토낙원/ 완전 통일 이루어 영원한 자유 평화/ 태극기 휘날리며 벅차게 노래 불러/ 자유대한 나의조국 길이 빛내리라”  이 노래는 가사가 좋고, 곡조도 장엄하면서도 심금을 울려주는 노래입니다. 

저는 어느 날 가수 조영남 씨가 부르는 “내 고향 충청도”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한 무엇을 느껴보았습니다.  조영남씨는 사실 충청도가 고향이 아니고, 피난 와서 살다보니 충청도가 고향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내 고향 충청도”  “일사후퇴 때 피난 내려와 살다 정든 곳  두메나 산골 /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 나를 키워준 고향 충청도 /  내 아내와 내 아들과 셋이서 함께 / 가고 싶은 곳 /  논과 밭 사이 작은 초가집 /내 고향은 충청도라오” 노래가 하도 구수해서 듣고 들어도 싫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공식으로 사용하는 국가는 “하티크바”라는 노래입니다.  그 말은 ‘희망’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유대의 영혼이 노래하는 한/ 동방의 시온을 사모하면서/ 언제나 그곳을 바라보는 한/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2000년을 간직해온 우리의 희망/ 그것은 우리의 땅인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는 것/ 그것은 우리의 땅인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는 것” 이라는 가사입니다.

지금도 유대인의 최고의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같은 말로 기도를 끝맺고 있습니다. “바샤나 하바아 예루샬라임” 이 말은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항상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예루살렘에 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편 137편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그 시온산을 생각하면서 망향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역만리 바벨론에 잡혀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뼈에 사무친 망향의 한을 노래하였습니다.  이 시편은 예루살렘 사모곡입니다.  그 옛날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향은 예루살렘을 한 시도 잊지 아니하였고,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이 사모곡을 불렀습니다.  1절입니다.  "우리가 바벨론 여거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 시절을 보내면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은 역으로 예루살렘을 노래하는 것이요, 우회적으로 예루살렘을 기억하면서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함께 모여 예배할 성전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동리에서 가까운 강변에 나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 강가에 나가서 모여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그들을 사로잡아온 바벨론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노래를 청하였습니다.  자기들의 어떤 잔치에서 흥을 돋우어 주기를 바라고, 유대인들을 불러다가 당신들이 예루살렘에서 부르던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온의 노래를 불러달라는 말에 기가 막혔습니다.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고 탄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을 바벨론의 여러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습니다. 아직까지는 회당을 건립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이 되면 강변에 모여서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고, 고향을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 중에는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 때에 사용하던 수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을 강변의 버드나무에 그 수금을 걸어놓았습니다.  그들은 포로 생활의 설음과 피로를 수금으로 달래고 있었는데, 바벨론 현지인들이 하도 노래를 부르라는 바람에 악기를 버드나무에 걸어두었습니다.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둔 것은 악기를 연주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유대인에게 노래를 불러보라는 것은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멸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노래에는 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인데, “불멸의 예루살렘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노래해보라”는 것으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유대인을 멸시하기 위하여 노래를 불러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노래를 부를 때는 기분이 좋아야 노래가 나오는 법입니다.  유대인을 황폐하게 하고, 짓밟아 끌고 온 자들이 자기들의 흥을 돋우라고 노래를 청하는데 얻어맞더라도 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노래를 청해 듣겠다고 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을 고문하던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끌고 온 사람들입니다.  언제는 사나운 짐승같이 끌고 오더니 이제는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에서는 여호와를 노래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땅을 불결한 땅으로 여겼습니다.  이방 땅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멸망한 고향과 조국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지고 수심에 잠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시금 예루살렘을 생각하였습니다. 

5절입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 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어보면 실감이 납니다.  5절입니다. “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아, 너는 말라비틀어져 버려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부르던 노래를 다시 부르지 않겠다고 하면서 새롭게 예루살렘을 기억하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찬양한다고 말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권을 빼앗기고 다른 나라의 통치를 받는 포로 생활이 무엇이 좋다고 예루살렘에서 부르던 노래를 부를 것입니까?  예루살렘에서 부르던 노래는 잊어버려도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다는 노래입니다.    지금 노래 가사를 바꾸어 새롭게 예루살렘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야, 너는 내 입천장에 붙어 버려라.”

유대인들은 자기의 기쁨의 머리에 예루살렘을 놓았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기쁨의 머리에 예루살렘을 놓지 않는다면”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가장 으뜸에 놓고 기뻐하며,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기쁨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시온을 기억하면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그의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깊은 애국심을 느껴봅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기쁨을 누리고 즐거워할 수 있어도,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예루살렘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고 하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럴 정도로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기억하면서 울었고, 그들의 기쁨은 오직 예루살렘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예루살렘, 시온을 생각한다, 기억한다는 말은 자기들의 고향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요,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이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겠다는 것이요,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이 가장 귀한 시간이라고 합니다. 

지금 시인은 예루살렘을 기억합니다. 시온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얼마나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혹 하나님을 잊고 사시는 때는 없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이 귓가에 들려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녀들을 항상 기억하고 계십니다. 

사49:14-16에 “그런데 시온이 말하기를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고,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는구나.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보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습니까?  자기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너희는 나를 잊었도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겠습니다. 

7-9절에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잊을 수 없고, 예루살렘을 그들의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날, 유대인들이 이방에 사로잡혀가던 날, 옆에 서서 고소해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당연하게 여기던 에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돌 하나가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무너뜨리던 바벨론 사람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에돔 사람들이 하는 말, “헐어버려라.  헐어버려라 그 기초가 드러나도록 헐어버려라”고 하던 그 말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멸망할 때에 고소해하고, 바벨론을 응원하며, 좋다고 박장대소하던 에돔의 자손들에게 저주를 받으라고 합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럴 것입니까?  예루살렘을 무너뜨리는 바벨론 사람들도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 옆에서 고소해하고, 조롱하는 에돔인들이 더욱 미웠습니다.  에돔인들의 하는 말이 “헐어버려라.  헐어버려라.  그 기초가 드러나도록 헐어버려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예루살렘을 성전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던 유대인들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의 울음은 나라를 사랑하는 울음이었습니다.  무너져버린 도성, 마지막까지 성전을 사수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 땅보다 더 아름답고 기름지고 살기 좋은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고, 여기서 자라났으며, 또 우리는 이 땅에서 죽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가 모이는 이 예배당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찌 보면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나라를 잃었고, 자유를 잃었고, 하나님의 임재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이역만리 타향에서도 시온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움직이는 신앙을 가지고 갔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린 것 같지만, 하나님의 임재는 어느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지고 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갔습니다.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힘을 얻었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시온을 생각하며 우는 사람들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여있는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았습니다. 

한 광주리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였고, 다른 한 광주리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였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셨습니다.  “무화과를 보고 있습니다.  한 무화과는 극히 좋고 나쁜 것을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나쁜 무화과나무인 것 같은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아주 좋은 무화과 나무가 될 것이지만,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이들은 먹지 못할 열매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고 하지만, 이방인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는 처지에 있지만, 시온을 기억하면서 우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습니다.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시온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너진 예루살렘의 회복을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 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는 사람은 웃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는 사람만이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주님의 사역을 생각하면서 성찬예식에 동참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사람은 죄를 더 범하지 않고 인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저 천성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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