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수감사절] 생명의 감사 (신 8:6-10, 고후 9:6-9, 요 6:27-33)

  • 잡초 잡초
  • 1203
  • 0

첨부 1


생명의 감사 (신 8:6-10, 고후 9:6-9, 요 6:27-33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가 뭐냐 하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받은 축복에 너무 감사하여 하나님께 다시 고맙다고 바치는 헌물이요 마음이요 신앙고백입니다.

신명기에 나타난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감사를 원하셨는지 신명기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신명기 말씀 보면 이집트에서 해방을 받아서 가나안으로 향하는 중간과정에 사막에서 40년을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갑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신 해방시키신 하나님.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를 자유롭게 자유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 진실로 감사합니다.

그 감사가 항상 드려져야 되는데 감사의 마음이 때로는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감사의 마음이 줄어들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 줄어드느냐 하면 배고플 때 줄어들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살아가는 우리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선택하고 사랑하는 백성을 이집트라 이름 하는 억압과 압제에서 해방시켜서 해방의 주가 되셨고 해방시키는 과정이 기적과 같이 홍해를 가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많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해주셨습니다.

사람은 제일 먼저 자유를 구가합니다. 자유를 진실로 즐길 수 있으려면 자유가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못 견딘 건 자유는 고맙지만 배고픈 자유는 싫다.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자.

그래서 온갖 갈등과 좌절 속에 지도자 모세에게 항변도 하고 하나님께 항변 했습니다. 오늘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광야생활을 마치자마자 가나안땅에 들어갈 텐데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땅인지 설명해주겠다 하고 신명기에 적었습니다.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골짜기마다 산마다 지하수가 흘러내리고 샘물이 흘러나오고 땅에서는 시냇물이 흐른다. 우리나라가 바로 그런 땅입니다. 가는 곳 마다 샘물도 있고요, 지하수도 나오고 골짜기 산마다 물이 줄줄 흐릅니다.

치산치수가 잘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을 들을 때 귀가 쫑긋했을 겁니다. 물도 없고 산도 없고 시냇물도 없고 샘물도 없고 지하수도 없는 사막. 거기서 너무 배고프다고 울부짖을 때 모세는 물이 흐르는 땅을 약속합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돌이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모래사장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지만 그 땅에 가면 밀이 자라고 보리가 자란다. 밭농사 지을 수 있다. 포도가 있고 무화가가 있고 석류가 난다. 과수원이 된다. 올리브기름을 짤 수 있고 젖과 꿀이 흐르고 목축도 할 수 있다.

돌에서 쇠를 얻고 구리를 캐는 나라.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읽으면 별거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그런 땅에서 살아왔는데요. 그러나 광야 사막에서 40년 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지만 도대체 우리보고 죽으라는 겁니까, 살라하는 겁니까.

자유롭게 하신 하나님 우리 보고 굶어 죽으라는 겁니까? 모든 광야생활의 역사를 보면 테마가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빵은 그렇게 잘 주시지 않습니다.

제가 도식화를 전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세계역사 가운데 저보고 크게 두 가지 역사를 고르라 하면 빵과 자유. 이 두 가지가 어떻게 교차되고 교류되면서 우리를 이끌어 왔는지 그게 저희 살아가는 인간 역사의 핵심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빵과 자유. 근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이스라엘의 지도층에서는 하나님이 누구냐 이렇게 물으면 하나님은 존재한다든지 안한다든지 일체 구약성경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는지부터 기록을 시작합니다.

모든 구약성서의 출발이 출애굽부터 시작합니다. 창세기부터 여러 기록이 있습니다만 사실은 기록의 연대순을 보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압제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하시고 우리를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창조해 주셨다고 창세기에 기록한 겁니다. 창세기 먼저 있고 출애굽기가 있는 것이 아니며 출애굽기가 있고 창세기가 적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물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신 자유의 주님. 또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메마른 땅에서 배고픈 자유가 아니고 배고픈 자유를 주시려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고 물이 콸콸 솟게 하셨고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먹을 것 입을 것으로 우리를 구해주신 분. 하나님은 빵입니다.

하나님은 자유입니다. 이 두 가지 주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자유가 문제겠지만 그러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그만한 먹고 마시는 문제가 해결돼야 됐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여기에 비하면 너무나 행복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과 같은 광야도 없었고요, 우리는 식민지 있었습니다만 해방 받고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 보다 아름다운 강산에서 지금까지 지냈습니다.

뭘 감사할 수 있습니까? 제가 오늘 세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21세기 살아가는 오늘 이 땅의 우리는 우리 백성 모두가 국민 모두가 사회 구성원 전체가 교인들 모두가 합동하여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빵, 진실로 감사해야 됩니다. 미얀마 보도 여러분이 접하고 계시지요.

미얀마도 지금 가난해서 그렇지 자부심이 대단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최근에 UN사무총장을 배출했다고 얼마나 어깨가 올라갑니까? 우리보다 훨씬 전에요 미얀마출신 UN사무총장이 나왔습니다. 불교 국가입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뭐냐면 제가 보기에 하나는 빵의 문제 또 하나는 자유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문제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군부독제가 너무 심해서 자유는 전혀 없습니다.

세계에서 아마 제일 자유가 없는 나라 중에 하나일겁니다. 또 하나는 빵이 없습니다. 배고픕니다. 그렇게 지하자원이 많고 젖과 꿀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절대빈곤에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절에서 명상하고 정신적인 양식을 먹고 백성에게 기도드리고 하던 탁발승들이 승복을 입고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요구는 두 가지입니다. 이 백성에게 빵을 주어라. 이 백성에게 본래 누렸던 자유를 주어라. 총살이 이어지고 총격전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언론에서 하는 말이 이렇게 바꿔질 때는 옛날 필리핀 같은 경우는 피플 파워(people power)도 있었고 이번에는 분홍색 황색 승복을 입은 승려들이 앞장서서 나왔다고 해서 샤프론 파워.

저는 이 사실을 보면서 미얀마하고 우리하고 비교할 필요는 없으나 그러나 우리도 한때 군부독제도 있었고 자유를 위한 쟁취도 있었고 빵문제도 있었는데 지나고 났더니 우리는 두 가지를 그래도 조화롭게 잘 만들어서 오늘 이 땅에 빵이 너무 많아서 걱정일 정도로 자유가 너무 넘쳐서 방만 일 정도로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가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 북쪽도 생각해 봤습니다. 거기는 군부 통치는 아니나 선군정치를 내세우고 중요한 것 하나는 북쪽 땅에 미얀마와 똑같이 자유가 없습니다. 절대빈곤이 즐비합니다.

그런데 미얀마가 갖고 있는 힘은 이제 벗어날 수 있는 샤프론 파워가 있다고 하는데 북한은 샤프론이 없습니다. 그 대신 미얀마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누클리어 파워(nuclear power)라는 게 있습니다.

핵무장. 그러나 그게 없어야 이제는 자유가 있고 빵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빵을 주어서 나누어 먹게 했듯이 하나님이 자유를 만들어 나누어 누리게 했듯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빵과 우리의 자유는 미얀마와 북쪽 땅에도 함께 나누셔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십시다.

지금 시점에 우리 한번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바칩시다. 그리고 이 감사를 우리 혼자만이 아니라 나누어 쓰겠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가 함께 해야 할 감사의 첫째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한분 한분이 자기의 기도와 명성과 헌물과 헌금과 마음가짐 속에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됩니다. 감사는 살아있는 자가 합니다. 죽은 자는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새로운 사실 하나를 최근에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정성스럽게 우리 땅에 묻습니다. 아니면 화장을 해서 보존도 합니다. 아니면 어떤 분은 병원에 실험실 재료로 써달라고 시신을 기증합니다.

그중에서 우리 교회에서 임숙희 집사님 그리고 조규탁 집사님 권오균 집사님 세분이 시신을 기증해서 교회에서 장례를 본적이 있습니다. 제가 딴것보다도 세분의 장례식, 추모식을 접하고 느낀 게 있어서 말씀드리려합니다.

죽음은 끝입니다. 죽은 시신은 아무 말도 안합니다. 시신이 살아있는 사람을 도웁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돕는 방법을 제가 깨달았습니다.

쓸모없이 버려진다고 생각했던 숨이 끊어졌다고 생각이 없다고 영이 떠난다고 마지막이었다고 그런데 그 시신이 해부학교실의 수술대에 올라가서 의과학생들이나 의사들이나 간호사들이나 누구든지 시신을 가지고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질병을 퇴치하고 질병을 줄이려고 생명을 주려고 쓰이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생명을 돕습니다. 죽은 자가 산자를 돕습니다. 그런 엄청난 은총에 사실이 있다는 걸 제가 현장 추도식에서 깨달았습니다. 대부분 그렇게 바친 사람은 신앙의 결단으로 바치는 분이라고 제가 보고 들었습니다.

죽은 몸이 살아있는 사람도 도와주고 살린다는데 살아있는 몸 가지고 왜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까? 살아 움직인다고 하면서 왜 살아있는 자에게 도움을 못줍니까? 죽은 시신도 주검도 도움을 준다는데 우린 뭐하란 말입니까?

펄펄하게 살아있고도 왜 감사를 안 합니까? 죽은 자는 자기 몸으로도 감사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고이 땅에 묻어드리는 경우 또는 어떤 식으로 장례식 하는 경우 우리는 추모식을 통해서 그분을 생각합니다.

몸은 갔으나 그분의 생각, 그분의 가르침, 그분의 인격, 그분의 사상, 그분의 신앙, 그분이 품었던 모든 희망 이것들은 우리가 지금 갔으나 받아서 추모하면서 우리 살아있는 사람이 영적 양식으로 삼아가면서 살고 있습니다.

죽은 자는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이 산자를 살리는 역사가 이렇게 몸을 통해서든 추모를 통해서든 우리에게 역사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말씀입니다. 살아있는 그대들 생명이 있는 그대들 영도 있고 육이 있는 그대들은 뭐하고 있습니까?

감사 하는 게 다른 게 아니라 살아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산자는 산자를 도울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몸과 내 피를 떡과 포도주로 먹고 마시는 사람마다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다시 오실 때 까지 선포하라.

그게 무슨 말일까? 예수의 죽으심 자체가 살아있는 우리들을 살리는 죽음. 예수님은 자기 시신을 하나님께 기증한 겁니다. 그리고 땅에 묻힌 겁니다. 그 목적은 뭐냐 하니까 죽음이 목적이 아니고 죽음을 통해서 살아있는 앞으로 수많은 생명들 다시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먼저 부활하셨고 부활 생명을 우리한테 약속해 주신답니다.

작은 몸이지만 해부학교실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살리듯이 한 몸 예수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 모든 살아있는 사람을 살리신답니다. 증거는 부활입니다. 제가 살아있음에 오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살아서 살아있는 사람과 함께 있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살아있어서 먼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추모하고 괴로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감사합시다. 세 번째는 어떻게 감사하란 말입니까? 오늘 고린도후서 얘기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사랑하는 여러분 적게 심은 사람은 적게 거둡니다.

많이 심은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달란트 준대로 또 심고 거둔 데로. 중요한 것은 적게 거두었다고 적게 결단하고 많이 거두었다고 많이 결단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하는 것 그것은 여러분이 결정하십시오.

단 마음으로 결정하되 한 가지만 부탁합시다. 아깝게 생각하고 감사하지 마십시오. 체면 때문에 의무 때문에 마지못해서는 감사하지 마십시오. 죽은 자가 산자를 돕고 산자가 산자를 돕고 생명이 생명을 돕는 하나님의 진실을 알았으면 감사는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예수께서 자기 스스로를 여러분께 주셨을 때 그분은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내주는 기쁜 마음으로 아깝거나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쁜 맘으로 정성스럽게 진실로 우리한테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신 것은 여러분이 바치고 헌신하고 헌물하고 하는 모든 감사 속에서 당신들은 기쁜 마음으로 하십니까? 진실로 하십니까? 진심으로 하십니까? 나한테 필요한 것은 양이 아닙니다. 진심, 기쁨.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말입니다.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사람한테 하나님은 다시 사랑을 보태주시는데 그 사랑을 받고 나면 적게 거두었던 많이 거두었던 어느 경우든지 넉넉하여 온갖 선한 일을 얼마든지 행하고 남음이 있을 정도로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진실 하십시다. 기뻐하십시다. 자발적으로 하십시다. 감사하십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