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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신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는 법 (요 10:33 -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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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는 법 (요 10:33 - 42)

전도를 해보면 복음을 듣고 어떤 사람은 의외로 쉽게 예수님을 믿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정말 예수 믿기 힘들어 하는 것을 봅니다. 왜 이렇게 믿음의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극단적으로 배척하기 시작합니다. 돌을 던지는 사람도 나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고 지킨다고 자랑하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0-42절에 보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들어 치려하는 유대인들을 피하여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 지역으로 가셨을 때, 거기 사람들은 너무나 놀랍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본 다음에 ‘맞구나! 메시아구나!’ 그렇게 쉽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41절) “세례 요한은 아무런 표적도 행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유대교 지도층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당시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 사람들의 믿음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똑같이 세례 요한의 예언을 들었고 똑같이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은 극단적으로 갈리는지. 한편에서는 예수님께 돌을 던지고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것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흔히 기적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더 쉽게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선교를 나가거나 전도를 할 때 예수님 이름으로 병든 자가 고침을 받거나 귀신 들린 자가 놓임을 받는다든지 이런 일이 벌어지면 복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더 귀를 기울이고 또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능력 전도라는 말도 있습니다. 전도할 때 성령님의 권능이 함께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으로 구원받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안 믿을 사람이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3절)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님께서는 안 믿어진다는 그 유대인들에게 간곡하게 말씀하셨습니다.

(37-38절)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예수님께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으면서도, 가나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이적, 오병이어의 기적,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 나면서 소경된 자를 눈뜨게 하신 일 등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많은 이적을 공개적으로 행하신 이유가 행하시는 일을 통하여서라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잘 아시면서도, 계속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인간이지만 동시에 참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사람이 죄인을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의 문제도 해결이 안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합니까?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사람이며 동시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인류를 위한 대속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적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더욱 신성모독으로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장에서도 안 믿을 사람들은 기적으로 보고도 안 믿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죽은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어 자기처럼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눅 16:31)며 거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할 때, 애급의 바로 왕은 아홉 번의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불신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맏아들이 죽어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나마 곧 후회하고 이스라엘을 좇아 가다가 홍해에서 몰살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오히려 마지막 때에는 사탄이 기사와 이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고 경고하였습니다.

(막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이처럼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여러분, 밥을 잔뜩 먹고 어느 모임에 갔는데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면 그것을 먹을 수 있습니까? 음식의 질이 아무리 높아도 먹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배가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잠 27:7) “일을 배부른 자는 꿀이라고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가 그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 하나님 하며 율법은 자기들만 잘 지키는 것처럼 자랑했지만, 실제 그 마음은 사람의 평판, 재물의 욕심, 명예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실제로는 현실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했지만 실상은 메시야에 대하여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것은 말만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이 세상이 너무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나타나니 당황스러웠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이 다 빼앗기는 위기 의식이 생겼습니다. 그런 눈으로 보니 예수님은 단지 가난하고 천한 무리들이 사는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일 뿐이었고, 또 그래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기적을 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 마음이 이 세상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단 강 건너편 사람들은 영적으로 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득권 층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메시야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요한의 증거에 순수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믿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진정으로 주님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이 복음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은혜가 되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너무 분명하게 예수님이 메시야임이 믿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시원하게 마음에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은혜의 역사가 별로 자기에게는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는 그 까닭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예수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우리가 영적으로 메마른 것은 우리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돈버는 일, 돈 쓰는 일, 여행하고 즐기고 노느라고 병이 날 정도입니다. 아이들 공부시키는 일, 집 마련하는 일 등. 그러느라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갈망은 없습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한 구원의 초청이 아닙니다. 열심을 잃은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어도 주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단 말입니다. 이미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눅 18:8) “인자가 올 때애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렇게 믿는 사람이 많은데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 다니는 자는 많을지 몰라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가 드물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그냥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주기철 목사는 고문하던 형사가ꡒ너 때문에 모든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교회를 불태워지게 되는 것이 가하냐? 고집부리지 말고 무릎 꿇어 절해! 성경에도 위에 있는 권세에 순복하라고 했잖아! 너는 왜 위에 있는 사람들의 명을 어겨?ꡓ라고 닥달하자 ꡒ아니요. 나는 이 나라 법을 지킵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이 땅의 시민이면서 나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먼저는 만주의 주시며 만유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이 우선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했던 우상숭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양이라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땅의 백성이기도 하니 당신들의 법을 어긴 대가로 나를 죽이시오. 나는 죽음으로 당신들이 만든 법의 대가를 달게 받겠소.ꡓ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자세로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럴 믿음은 안됩니까? 그러면 그런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소유를 팔아서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교회에 바쳤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 비참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 5:3-4)
그리고 그 후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일은 교회 안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사람들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성령을 속이는 식으로 겉으로는 다 예수님을 믿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세에 다시 오실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서운 불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수님 당시보다 훨씬 영적으로 악한 세상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이냐, 아니냐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 시대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엄밀히 말하면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돌 던지는 자와 믿는 자입니다. 얼핏 보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성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면 OK입니다. 부처나 마호메트나 공자처럼 종교 창시자 중 하나라고 하면 OK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처와 마호메트와 공자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유일한 구주요 메시야입니다.” 하면 돌을 던집니다. 기독교는 독선적이라고 합니다. 믿는 자는 따돌림을 당하거나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 불신 시대에 어떻게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갈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으로 꽉 차있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로 우리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한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난 주간 예수님을 사모하고 찾았던 적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모합니다! 예수님 경험하고 싶습니다.”
마음에 세상이 가득한 사람은 주님을 생각한 적이 없이 한 주간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불신 세상에 살다 보면 성도들도 세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교인들 조차 점점 세상이 주는 만족에 빠지고, 세상 염려 걱정에 빠져 삽니다.

(잠 4:23)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보석이나 고가의 골동품은 잘 보관합니다. 온도와 무게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오면 자동 경보가 울리고 문이 닫힙니다. 돌멩이 하나에도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돌멩이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우리 마음을 소홀히 하고 삽니까? 아무 책이나 보고 아무 말이나 귀에 담습니다. 너무 많이 공부하고 너무 많이 일하고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스케줄이 너무 바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과 삶을 조정하고 대화할 시간이 없습니다. 주님과 보내는 시간을 소홀히 하면 처음에는 말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다가 기도에 대한 열망이 식어지고 나중에는 성경을 읽어도 들어도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임재와 권능에 대한 믿음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세상 것으로 가득하니까 주님 음성을 듣고도 주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서도 전혀 믿음의 반응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사람 마음을 밭에 비유하셨는데, 길 가 같은 밭이 있고 돌짝 밭 같은 마음이 있고 가시 덤불같은 밭이 있다고 했습니다. 길 가 같은 밭은 이미 딴 주인이 들어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마귀가 주인인 사람입니다. 돌짝 밭 같은 사람은 세상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고 가시 덤불같은 사람은 먹고 사는 염려가 많은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 갈망을 버리는데는 약간의 고통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고통을 감수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건강식은 처음에는 입에 맞지 않습니다. 오직 건강 때문에 먹습니다. 그러나 곧 입맛이 달라집니다. 오히려 맛이 강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 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영적인 체질이 변해야 합니다. 과감하게 하루 이틀 만이라도 시간을 떼어 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오직 성경 읽기와 기도에만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의 임재와 음성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만나고 싶어하시고 말씀하고 싶어하시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성전 지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성소에서 세상으로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머물고 싶으신 곳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거듭난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실 때 인간 영혼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주님을 향한 갈망만 있으면 소원만 있으면, 말씀과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 앞에 나가면, 놀라운 경험을 반드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광야에는 모세가 정신이 산란해 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경쓸 데가 아무 데도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시키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게 했습니다. 모세는 계속하여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오직 예수님만 갈망하기 위하여 세상을 떠나 광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까? 돈도 벌지 말고, 직장도 버리고 기도실에서 성경을 보고 기도만 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는 그 곳에 여전히 있으면서도 또 하고 있는 일을 하면서도 심령 만큼은 광야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권력과 명예와 재물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중심은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 86:1)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다윗은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세상 것으로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영적 갈급함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광야에서 돌아다닐 때, 현실에 불만이 가득하고 곤궁에 처했으며 빚에 시달리고 고난에 찌든 무리 400여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과 어울려 10년 동안 살았습니다.

(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은 그들과 10년을 함께 지냈으니 그들의 분노, 불안, 난폭함, 무정함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다윗을 통하여 변화되어 유다 왕국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 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영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솔로몬은 다윗 처럼 부귀영화를 누린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임재 안에 누리는 즐거움을 마끽하지는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대미문의 지혜, 부귀영화, 아름다운 여인, 명성에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그의 결국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고 탄식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도 왕의 자리에 마음을 빼앗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간음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다윗은 회개하며 하나님께 처절하게 간청하였습니다.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좇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잃고 난 다음에야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자리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십니다. 적당한 마음에는 결코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지만 전심으로 드리는 사람에게만 나타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부유함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이 재물로 만족하였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타락은 간음을 하거나 알콜 중독자가 되거나 횡령을 하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기도 시간에 무관심하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세상에 대한 욕심이든, 먹고 사는 걱정이든지, 건강이나 자녀들로 인한 염려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것으로 마음이 가득한 사람은 예수님을 바라볼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1907년 장대현 교회에서 설교하던 길선주 장로는ꡐ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입니다.(요 3:20)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고, 귀중한 몸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애로우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한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길 장로는ꡒ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주를 환영하라!ꡓ고 외쳤습니다. 이 외침에 회중들은ꡒ주여!ꡓ소리를 지르며 통회하며 자복했습니다. 장내는 금세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회중들은 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고 은혜의 도가니인 예배당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죄인을 잡으러 왔던 순사가 회개하고, 기독교를 비판하러 왔던 중이 개종하고, 신부가 은혜 받고 감격하여 염주를 길 장로에게 기념으로 주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 최고의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로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 생명으로 사는 복이 가장 놀라운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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