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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시 66:1-12, 딤후 2:7-13,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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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시 66:1-12, 딤후 2:7-13, 눅 17:11-19)

1. 연세가 드신 분들은 한 하운(韓 何雲)이라는 시인을 아실 것입니다. 요새는 한센 병 또는 나병이라고 하지만 통상 문둥병이라고 부르던 무서운 병에 걸렸으면서도 훌륭한 시를 남긴 유명한 시인입니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 국가적으로 어려울 때 이리 농림학교와 북경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었지만 당시 천형이라고 까지 일컬었던 한센 병 즉 문둥병에 걸려 평생을 말로 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투병하면서도 많은 시를 남겼으며 만년에는 나병환자들을 위한 사회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분이 남긴 시를 보면 당시 나병환자들이 겪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었던 멸시와 천대 그리고 고난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는 시를 봅시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 꽃과 나비가 /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 성한 사람이올시다.” 자신의 표현처럼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엄연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신의 운명을 부정하고, 항의하고, 원망하는 애끓는 부르짖음이 아닙니까?

   「전라도 길」(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시 한 편을 더 보십시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 가는 길.....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 까지 /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망가지고 뭉그러져 가는 자신의 육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전라도 길 같은 자신의 저주스런 인생길에 대한 한 맺힌 독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은 당시 아직 격리 수용되기 전 이런 환자들이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고 거리로 나와서 구걸을 하는데 다른 거지들과 달리 어느 동네에 이런 사람이 나타났다하면 아이들부터 막대기와 돌멩이를 들고 나와서 미친개 쫓듯이 동구 밖으로 쫓아내 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면서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고, 사람 사는 동네에서 살지도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는 이런 환자 10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한센 병 환자는 지난날 우리 사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병을 가진 사람들이 혼자 외딴 곳을 가다가도 저 앞에 사람이 나타나면 “나는 부정합니다. 나는 부정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서 상대방이 부지중에 가까이 접근하므로 부정을 타지 못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물론 사람 사는 사회에서 살지 못하고 외딴 곳에서 그들만의 집단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고향이 그리워도 갈 수 없었습니다. 가족이 사무치게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어서 살아있는 것이지 차라리 죽는 것만도 못한 비참한 생존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는 죄인들의 형편을 영적으로 한센 병과 같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당시 한센 병 환자가 저주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죄인인 인간도 사실은 죄로 말미암은 운명이 저주 밖에 없습니다. 한 하운 시인의 말처럼 자고 나면 손가락이 없어지고, 발가락이 없어지고 온통 얼굴이 뭉그러지듯이 죄는 우리 인간을 망가지고 뭉그러지게 만들어 결국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멸망이 그 운명일 뿐입니다. 이런 저주스런 인간들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2. 어느 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아마도 아주 외진 산골길이었을 것입니다). 한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동네는 나병환자들이 집단 거주하는 곳이었습니다. 주님이 여기 오신 것은 이 나병환자들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 같아서는 달려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서 열 사람이 함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율법이나 관습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정하다고 판정된 환자들을 보고 그곳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14절에 “예수께서 그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환자들로서는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대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 입을 여셔서 나에게 살리는 말씀 축복의 말씀을 하시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주님은 여기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 많고 부족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지만 주님을 찾고, 주님께 부르짖으면 됩니다. 그것도 열 사람이 함께 목소리를 합하여 부르짖은 것 같이 오늘 우리들도 함께 우리 마음과 목소리를 모아서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서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루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우리를 바라보시기만 해도 우리 문제는 해결되어집니다. 우리 기도는 응답받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라는 가사는 “주님 나를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멈추셔서 나를 보아 주십시오.”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답답하고 어려울 때 주님보다 세상을 향합니다. 주님보다 사람을 찾습니다. 아니면 미리 실망해 버립니다. 저는 어려울 때 먼저 여기 대 예배 실에 올라옵니다. 그리고 맨 앞자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나의 사정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룁니다. 이실직고합니다. 저는 주님이 이런 저의 탄원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응답해 주신 것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먼저 주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달리 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병환자가 무슨 자격으로 떳떳하게 주님 앞에 서겠습니까? 저 성전에 나갔던 세리도 그랬듯이 거저 주님의 은총을 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여,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사람을 주님은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예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을 보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접 만져 주셨습니다. 진흙을 이겨 환처에 바르기도 하셨습니다. 혹은 말씀을 하셔서 고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열 사람의 환자들에게는 이 중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만 하셨습니다. 엘리사를 찾아왔던 아람의 나아만 장군처럼 “나는 저가 나와서 내 머리에 손을 얹어 고쳐줄 줄 알았다.”고 섭섭함을 넘어 분노라도 할 수 있는 형편입니다. “과연 예수님도 나병환자인 우리를 차별대우 하시는가?”라고 의심할 만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나병환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의심도, 불만도, 이의도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라”고 하시니 그들은 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손바닥과 손등과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그 지긋지긋하던 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겨자씨 같았을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체험한 기적은 그야말로 태산 같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진리는 전체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머지 99%는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들은 그 1%의 이성이 “아니라!”고 했지만 미지의 99%의 세계를 오직 믿음으로 확신하면서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안셀무스는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믿어야 알게 되는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는 믿음이 기적을 창출하는 원동력입니다. 주님은 항상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크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작으면 역사도 작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 역사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큰 믿음을 소유하여 우리 주님이 이루시는 큰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4. 여러분, 죽을 병, 도저히 고치지 못할 병에서 고침 받았다면 그때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이 열 사람은 순종해 가다가 고침받았습니다. 요새 같으면 동네방네 교회마다 초청받아 간증하러 다니느라 정신없을 것입니다. 그때 저 환자들도 그랬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살아났습니다. 지옥 입구에서 천국으로 올려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서로 부둥켜 앉고 서로를 확인했을 것입니다. “꿈이 아닌가,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라.”고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맨 먼저 가족을 찾아갔습니다.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웠습니까? 이제 마침내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걸음에 달려간 것은 오히려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10사람 가운데 예외적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가족이 그리웠습니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만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이 각기 “고향 앞으로!”를 외쳤지만 이 사람은 방향을 달리 잡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고쳐주신 분을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죽음에서 살려주신 그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 그 엄청난 능력, 새 생명을 주시고, 새 삶을 주신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로 주님을 향하여 방향을 잡고 달렸습니다.

   유명한 김 현승 시인은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아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마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참 놀라운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있는 자에게 더 주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주님께 더 없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가서 사례했을 때 주님은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이 그 무서운 병에서 고침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은 있는 사람에게 더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이 행한 일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일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 그래서 그 방향을 주님께로 향하여 달려가서 그 앞에 엎드린 이 사람이 바로 주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조에는 사람의 제 일되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다고 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 가지 여운을 남기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오늘 나는 그 아홉 중에 들어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내가 오늘 나 된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모르고 산다면 나는 그 아홉 중의 하나입니다. 만일 내가 가진 모든 것, 심지어 내 생명까지도 주님이 주신 것을 모른다면 나는 그 아홉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아홉 중의 하나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 가정을 비롯해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 교회를 통해서 주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 아니 바로 그 사람들이 내게 끼친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그래서 마치 나는 순전히 나 혼자만의 노력과 능력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 아홉 중의 하나입니다.

   저 사마리아 사람처럼 생각의 방향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도 바꾸시기 바랍니다. 시편의 말씀대로 “주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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