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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 (삿 3:31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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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 (삿 3:31 ~ 31)

이스라엘은 사사 옷니엘의 치하에서 40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죄악의 길로 행했습니다.
사사기 3장 12-14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 팔년을 섬기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징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징벌로 모압왕 에글론에게 점령당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환난 가운데서 회개하며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한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 그가 바로 왼손잡이 사사 에훗입니다. 에훗이 사사로 있었던 80년 동안 이스라엘은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여기 삼갈은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사사들 중에 성경에 가장 간단하게 언급된 사사가 바로 삼갈입니다. 그에 대한 자료 또한 성경에 더 이상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본문에 기록된 대로 에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사람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모압 사람들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입니다.

삼갈, 돌라, 야일, 입산, 엘론, 압돈과 더불어 6인의 소사사로 불리기도 합니다.
드보라의 이야기에서 아낫의 아들 삼갈의 시대에 대로가 비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조직적인 집단들에 의하여 백성들이 활동하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 5장 6절에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大路)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小路)로 다녔도다』라고 했습니다.
삼갈의 시대에는 팔십 년 동안 평화 시대를 누리던 에훗의 시대 이후에 새롭게 이스라엘의 적이 등장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적들은 다름 아닌 블레셋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소위 국부전 양상을 보이면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지 않은 타격을 가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시기에 삼갈은 소를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습니다. 이 일로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Ⅰ. 그는 무명의 사사였지만 역사적 책임 의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본문 3장 31절에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라고 했습니다.
사사로 있어 '하야'(hy:h)는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는 단어에만 등장하는 말인데 이것은 문맥이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평화시대의 사사 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갈이 그 뒤를 이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삼갈이 사사로 활동하던 시기는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 다스리던 80년간의 태평성대 후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태평성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적으로 안일에 빠져있었고 육신적으로는 편안함과 쾌락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태평성대와 평화 시대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사회적 병리현상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진멸시키지 못한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에는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해야겠다는 우국 단체들도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시대 상황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있었고 물질만능의 가치관이 팽배해 있을 때였습니다. 한편 블레셋의 위협은 상존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삼갈은 에훗의 뒤를 이은 사사로서 적어도 그에게는 이스라엘의 태평성대 존속이라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런 의식 없이 먹고 마시고 즐길 때 블레셋의 위협은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삼갈은 조국 이스라엘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강한 책임의식과 역사의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Ⅱ.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은 사람입니다.

본문 3장 31절에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라고 했습니다.
소를 모는 막대기는 당시 팔레스틴이나 수리아에서 밭을 갈 때 길이 약 2.5m 정도 되는 둥글고 두꺼운 막대기를 사용하였습니다.
막대기 한 쪽은 소의 뒤를 찔러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하고 다른 한 쪽 끝에는 조그만 삽이 달려있어서 밭을 갈 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무기를 가지고 600명의 블레셋 인을 죽였다는 사실은 인간들의 합리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과학적 상식으로부터 비웃음을 사기에 족합니다.
더구나 당시 블레셋 군인들은 영토 확장을 위하여 잘 훈련된 자들이었고 발달된 철재무기들로 중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잘것없는 소 모는 막대기를 가지고 대항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그를 담대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는 막대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과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다윗이 골리앗과 대적할 때를 연상케 합니다.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향하여 싸울 때 갑옷과 투구와 창검을 다 벗어놓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 물매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진영에 나아가서 하는 말이 사무엘상 17장 45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했습니다.
삼갈은 자신이 가진 소 모는 막대기마저 의지하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은 물맷돌마저 의지하지 아니했습니다(삼상 17:45).
기드온은 처음 3만 2천 명의 사람들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의 많은 용사들을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사사기 7장 2절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기드온은 300용사마저 의지하지 아니했습니다(삿 7:3-23). 수많은 미디안 군대 앞에 300용사를 의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징벌의 빙거가 됩니다.
사무엘하 24장 1절에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군대를 의지할 때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를 맛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자신의 군대를 의지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그 무엇이라도 있을 때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군대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자책이 왔습니다.

사무엘하 24장 10절에 『다윗이 인구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 자신의 군대를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 하나로 1,000명이나 죽였습니다.
사사기 15장 15절에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명을 죽이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나귀의 턱뼈마저 의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자기가 가진 무기를 의지했다면 싸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하신다는 확신 이전에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믿는 언약적 믿음이 있었습니다.

삼갈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소 모는 막대기를 가지고 블레셋 앞에 조금도 열등감을 느끼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낙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아니했습니다. 혹시나 싸움에서 패하지나 아니할까 하는 염려도 할 줄 몰랐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와 언약적 약속을 믿는 사람은 주어진 환경이나 자신이 가진 것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아니합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신체적 조건이나 학벌이나 재산이나 명예나 환경 따위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역사의 촉매적 조건마져도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한결같이 생각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무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초과학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들의 값싼 대중적 정의와는 사뭇 다릅니다.
이사야 55장 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했습니다.

Ⅲ.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역사에 선용된 사람입니다.

본문 3장 31절에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와이솨 감후, aWhA!G" [v'YOw)』라는 말은 '그리고 그가 넉넉히 혹은 완전히 구원했다'는 뜻입니다.
블레셋은 가나안 거민 중에서도 가장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족속입니다. 삼갈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그가 힘과 용맹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큰 능력을 힘입어 이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가 만일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면 삼갈을 성경에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한결같이 사람의 계획이나 사람의 생각을 표준하고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 적용과 하나님의 의지 적용의 결과 구원의 성취를 기록한 책입니다.
삼갈의 활약으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넉넉히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삼갈을 들어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들어 쓰심에 있어서도 자유하십니다.

삼갈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 모는 막대기 하나 들고 그것도 넉넉하고 완전하게 말입니다. 우리의 보통식견으로는 삼갈은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블레셋을 600명이나 죽이는 삼갈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삼갈을 들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이 위대한 것입니다.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인 삼손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삼손을 들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고야마는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한 것입니다.
골리앗을 쳐부수는 다윗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다윗을 들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위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에훗의 뒤를 이은 아낫의 아들 삼갈은 이스라엘의 태평성대에 대한 역사적 책임 의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에훗 시대의 평화가 자신의 시대에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역사의식과 시대적 혜안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대적들이 등장하는 위기의 시대를 맞이한 삼갈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들어 쓰셨습니다. 삼갈의 신앙적 일대 용단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소 모는 막대기로 대적들을 쳐부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훈적 의미가 큽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말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32절에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면 됩니다. 이 땅의 교회운동 역사를 보더라도 하나님은 대중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일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지음받은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을 의지하지 아니했습니다.
소를 모는 막대기를 의지하는 삼갈이었다면 하나님이 그를 쓰시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물맷돌을 의지하는 다윗이었다면 하나님이 그를 쓰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했습니다.
환경이나 조건을 의지하지 아니하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마 15:21-28).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믿음은 적은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도 그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야 역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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