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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말씀대로 (창 2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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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대로 (창 21:1-34) 

창세기 21-23장은 여호와께서 마침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세우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장에는 이삭을 주신 사건과 이삭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인 이스마엘을 내보내심으로써 그 가정을 복의 근원의 가정으로서 바르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비해주신 사건, 그리고 이삭의 장래 안전을 위한 조치로서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이 맺히도록 인도하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21장 전반부는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여러 번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습니다(1).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아들을 주셨습니다(2).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방법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고, 때도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아이의 이름을 “이삭”(3)이라 하였고,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했습니다(4). 참으로 이상적인 왕의 모습과 이상적인 백성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식 문제만큼은 전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역사하셨습니다. 사라는 90평생을 살아오면서 늘 자식문제만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에 어두웠겠지요.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그녀로 활짝 웃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삭’이라는 이름 자체가 ‘웃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6)라는 고백에서 사라의 기쁨이 물신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그 백성으로 인도하시며 결국은 약속하신 말씀대로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너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을 보면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어 보이고, 심각해보이고 답답해 보이는 인상을 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웃게 하실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웃을 사람입니다. 바울은 일생동안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의 일군들의 삶의 특징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라고 했습니다.

요즘 노령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사회적으로 노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노년에 웃으며 여유 있게 살려고 뼈 빠지게 고생하여 돈을 모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반면에 평생 고생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노년에 ‘웃음거리’가 되거나 ‘울고 싶은’ 사람들도 많은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인간은 아무도 미래의 웃음을 보장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웃게 하셔야만 웃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벧전 5:6)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높이셔서 하나님의 때에 웃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삭이 자라서 젖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8). 고대 애굽과 앗수르에서는 보통 세 살쯤에 젖을 뗐습니다. 흥겨운 잔칫날에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9). 이스마엘은 15살 쯤 되었을 텐데, 이삭을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았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라고 기록합니다. 이스마엘의 행동은 “핍박”이라 표현될 만큼 상당히 거칠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마엘은 자신은 종의 아들이며, 이삭은 주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인정하지 못하고, 방자한 마음으로 이삭에게 몹쓸 짓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일을 빌미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도록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10) 사라는 이삭만 “내 아들”이며 이스마엘은 종의 아들일 뿐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이스마엘도 제 아들이고, 하갈도 여종이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마음 깊이 근심되었습니다(11).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그 후손 세대의 위계질서가 달라지는 중대한 기로였습니다. 이 문제에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12a)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2).

아브라함은 ‘인간의 도리와 정’ 때문에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사라는 참 매정한 사람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업’을 중심으로 생각한 사라의 판단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비록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따를 할지라도 감내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할지라도 결코 선택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결코 정으로 감싸주거나 정을 따라서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는 심히 고민할 수밖에 없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말씀대로 태어난 약속의 자녀와 육신대로 태어난 약속되지 않은 자녀를 동일하게 취급하여 함께 유업을 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전에도 계시를 전수할 그릇인 아브라함과 계시를 전수하기에 합당치 못한 롯이 분리되게 놓아두셨습니다. 물론 이 ‘분리’ 자체는 인간의 허물 때문에 시작되었으므로 가슴 아픈 것이고 전혀 칭찬할 바가 못 됩니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허용되어지는 분리나 이별이 있습니다. 인간의 허물을 통해서조차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실 자를 선택하시고, 배제할 자를 배제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준 후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큰 위로를 받았다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굳게 믿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결정하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자신의 허물이 빗어낸 일이지만,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수습하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겼습니다.

14-21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그 모자의 생애를 책임져주셨음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스마엘이 언약의 계승자로 선택받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인자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곤궁에 처한 하갈의 울부짖는 기도를 들으셨고, 그 아이의 소리 또한 들으셨습니다(17).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고, “그 아이와 함께” 계심으로 그가 마침내 약속하신 말씀대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20).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심판 중에 롯을 구해내신 것처럼,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필요들을 채워주셨습니다. 언약의 자녀로 선택되는 특별한 은총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 때문에 일반적인 은총은 받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이긴 하지만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인격적으로 완전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대상이 된 것은 말 그대로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그들은 독특하게 구별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갈등의 순간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따라 결정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때로는 약속하신 말씀을 오해하여 실수와 허물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게 되었을 때는 즉시 돌이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노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가슴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약속의 말씀에 의지해서 과감하게 결단하며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아브라함의 구별됨은 단지 내면적인 구별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음만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되고 생활은 세상 사람들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경건의 연습은 대부분, 갈등하는 문제를 두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를 고민하는 가운데, 그의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태도는 그의 마음속에만 남모르게 감추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 마음에 숨은 가치관과 원칙은 어떤 모양으로든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는 22-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그 군대 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화평조약을 맺고자 합니다. 대체로 이런 조약은 아쉬운 쪽에서 먼저 청하겠지요. 아비멜렉은 이미 소왕국의 왕이고 아브라함은 이방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멜렉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와 아쉽게 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말 속에 답이 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2) 아비멜렉이 보기에, 아브라함은 모든 일에 신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두렵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과 손자에게도 거짓되게 행치 않기를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도록 요청했습니다(23). 이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성숙하게 되면, 외인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 된다는 증거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그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해서 책망합니다(24-25). 아브라함은 둘 사이에 먼저 공의가 시행되도록 했고, 그 터전 위에서 화평 조약을 체결합니다(26-32). 그 후 아브라함은 언약을 세운 브엘세바 땅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33)을 불렀습니다. 자기는 죽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셔서 후손들에도 약속하신 말씀을 모두 이루시며, 이를 위해 보호하시며 인도하실 것을 믿고 그리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말을 뒤집어보면 아브라함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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