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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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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1~4)

  하박국서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의 기도는 개인적인 관심사를 아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니 바로 오늘 우리가 간구하는 기도의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어째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합 1:2)

  그는 당시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불법과 폭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결코 잘못된 것을 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그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어떤 조치를 취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숨어 계신 것 같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현상을 보고 입을 다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 따지는 것을 건방진 것처럼 생각해서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실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행동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매우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돌하게 그 까닭을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의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궁금증도 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또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어째서 죄악을 통제하시지 않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가 문제로 삼은 것은 죄악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죄악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나라에서 악한 자들이 율법의 통제를 받아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뭐라고 부르짖었습니까?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합 1:3)

  그가 생각할 때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면 그 율법이 바르게 기능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문제는 그 때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훌륭한 사법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오늘 우리도 또한 그가 물었던 것처럼 왜 하나님께서 죄악을 통제하시지 않느냐고 묻고 그 답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물음에 답하셨습니다. 하박국 1장 5절부터 11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입니다. 그가 기대했던 대답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직접 그의 물음에 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좀 더 근본적인 답을 들려 주셨습니다. 일하시는 모습이 뚜렷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그 일은 시작되었으며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먼 바벨론에서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을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누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갈대아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합 1:6)

  그의 생각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그가 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만일 그가 영적으로 눈을 뜨고 있었으면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가장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영의 눈을 밝히 뜨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가 제기한 문제는 당시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불법과 폭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제기한 그 문제의 해결 방안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답변으로 인해서 매우 당황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봐도 매우 충격적인 답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악한 자들을 벌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바벨론을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범죄한 민족이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바벨론을 들어서 벌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때문에 그는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물론 범죄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벌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스라엘이 악하다고 할지라도 갈대아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악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범죄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훨씬 더 악한 자들의 손으로 행해지는 심판은 차마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 2:1)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의 물음에 다시금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물음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답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장차 묵시가 올 것인데 그 묵시를 판에 새기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묵시가 오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조급해도 그는 참고 기다리는 법부터 배워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때와 인간의 때가 다르다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만 말씀에 순종하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또 정직하지 못한 갈대아 사람을 잠시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그러나 그 바벨론도 결국에는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최후의 승리는 악한 자들이 아니라 의인들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의인들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이 의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정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온갖 불의와 불법, 부정과 부패, 음모와 모략, 음란과 퇴폐, 사치와 향락 등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악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잘못을 고발하는 교회의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목회자들도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거의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죄를 꾸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다만 거짓 평안과 거짓 은총을 속삭이는 소리만 강단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심각하게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의 현실을 모르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한국 교회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실 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주님을 영의 눈을 뜨고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면 마침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도 고난을 당할 때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참 믿음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공동번역성서는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멋대로 설치지 말아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신실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한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더럽고 추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모두 다 자복하고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은 극히 절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로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만 믿고 그 주님께 우리의 삶 전부를 맡김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싸워 승리하고 마침내 그 주님으로부터 썩지 않는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아 쓰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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