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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 55: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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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편 55:16~23

현대인의 삶의 특징을 말하라 하면 복잡한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농경 문화권에서만 살던 옛날에는 삶이 단순했습니다. 행동반경이 집 주변에서 다 끝납니다. 집 주변에 있는 토지에다 곡식을 재배해서 내 손으로 추수해서 먹고 뒷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 불 피우고 살면 그 뿐입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장날이라는 날에 간단한 생필품을 구입하며 살아가고 시골에 살아도 서울 구경 한 번도 안 가 봐도 불편이 없고 기차 여행이라든가 비행기 여행을 일생에 한 번도 안 해도 괜찮았습니다. TV가 없어도 행복했고 자동차 운전, 컴퓨터, 교통법규 하나도 몰라도 괜찮았습니다. 열쇠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학교 근처에도 안 가도 행복하게 살았고 은행은 구경도 못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단순 노동만으로도 행복하게 살았는데, 요즘은 어찌나 많은 것을 기억해야 하는지 하나만 기억 못해도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 복잡성이 오늘의 삶의 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일마다 사무실에 내 열쇠를 못 봤느냐고 물으러 오십니다. 자기 열쇠를 누가 봅니까? 자기가 챙겨야지요. 그렇게 열쇠를 잃어버리면 큰일 납니다.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다보니까 열쇠 찾는 사람이 주일마다 그렇게 생겨납니다. 지금 이렇게 예배드리면서도 내가 가스 불을 끄고 왔는지 안 끄고 왔는지 궁금하신 분도 계시고 영수증 하나만 안 챙겨도 손해가 납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기억해야 되고 많은 것을 행해야 되고 많은 곳을 다녀야 되고 많은 사람을 만나야 되고 끝없는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뒤떨어지고 끝도 없는 의무감이 들이닥치고 그렇게 빠른 자동차를 타고 총알같이 돌아다녀도 할 일을 다 못하는 그런 복잡성이 오늘의 삶입니다.

저는 유명한 사람은 아닙니다. 소시민적 목회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일 년에 지구를 몇 바퀴씩 돌아야 내 할 일을 다 끝낼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짐이 많은 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인간들은 누구나 갖고 있는 새로운 병이 하나 있습니다. 스트레스라는 겁니다. 이것이 암이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인간을 쓰러뜨리는 큰 마귀와 같은 존재로 인간이 누구나 다 무서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그런 것이 되었습니다. 옛날 이솝 이야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짐승들을 다 만들어놓고 당나귀에게 “너 몇 십 년 살아라.” 그러셨답니다. 그러니까 당나귀가 “나 싫어요. 나는 오래 살기 싫어요. 절반은 내버리겠어요. 조금만 살래요.” “왜 그러느냐?” 하나님이 물으시니 “하나님이 나를 평생 짐 지고 다니는 짐승으로 만드셨는데 그렇게 늙기까지 짐을 지고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그러니 조금만 살고 나는 죽겠어요.” 그렇게 절반을 떼어내어 버리니까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오래 살려고 재빠르게 그것을 집어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당나귀 대신 짐을 지느라고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다.” 이솝 이야기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라는 의식이 생기면서 짐이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 어린이집의 유치원 학생들도 스트레스 때문에 탈모증이 생깁니다. 요즘은 이상합니다. 옛날에는 머리카락이 빠지면 노쇠현상으로 나이 60이 넘으면 빠지기 시작하는데 요즘은 20~30대에 머리카락이 잘 빠집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스트레스가 많아서입니다. 저는 사춘기 시절 16살 때로 기억이 되는데 그때부터 20대 중반까지 머리카락이 다 빠졌습니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좋은 시절에 저는 여자 기피증이 생겨서 연애도 못했습니다. 나만 보면 문둥이같이 보여서 날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만 했습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한번은 병원에 갔습니다. 왜 이렇게 됐느냐고 했더니 “젊은이! 뭐가 그렇게 고민이 많으냐? 약은 없다. 즐겁게 살아라.”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 내가 나의 진로를 놓고 너무나도 가난한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참 많았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럴 때 객관적으로 내가 나를 평가하면 내가 내 자신에게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내가 나를 괴롭히는 삶을 살아야 되나?’ 그렇게 스트레스가 되어서 머리카락이 다 빠지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예쁜 자식들도 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휴! 저것들만 없다면 내가 얼마나 좋을까?’ 그럴 때도 있고 죽자 사자 애인 관계에 있던 그런 사랑하는 사람도 어떤 때는 짐이 되어서 ‘어휴! 저 사람만 없으면 평안히 살겠다.’ 그럴 때가 있고 요즘은 사회학적인 큰 문제가 우리나라에서 생겼습니다. 늙은 부모가 짐이 되기 때문에 자식들이 많이 버린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살해까지 나타나는 험악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지금 대한민국이 저출산이 문제가 되어서 국가는 출산 장려 정책을 계속 선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기를 낳고 안 낳는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국가가 그런 문제까지 참견을 하나?’ 그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면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런 자기 자녀를 왜 안 낳으려고 하는가? 짐이 무서운 겁니다. 아이들은 고사하고 결혼 자체가 무거운 짐이라고 판단이 되기 때문에 지금 Single Life People이 그렇게 세상에 많아지고 선진국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느 나라나 선진국은 의학발달로 노인 인구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퍼센트로 따지면 비노동인구가 70퍼센트입니다. 어린이와 노인 인구가 70퍼센트를 차지하고 노동에 필요한 사람이 30퍼센트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선진국은 30퍼센트가 일해서 70퍼센트를 먹여 살려야 되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노령인구는 의학발달로 인해서 점점 늘어갑니다. 미국 같은 나라도 이 문제가 너무 심각해 졌기 때문에 레이건 대통령 때 “아무래도 노년의 노동력을 살려내야 되겠다.” 그래서 은퇴 나이를 65세에서 2년 늘려서 67세로 연장을 해서 지금 67세가 은퇴 나이가 되었고 앞으로 70세까지 열심히 일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열심히 하는 개혁 운동이 “근무 시간을 늘려야 한다. 이 정도로 일해 가지고는 살 수가 없다. 프랑스 장래가 희망이 없다. 일을 더하자.”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짐은 점점 많아집니다. 짐에 따라서 염려와 근심이 점점 많아집니다. 현실적으로 목회를 하면 별 일이 다 있는데 집사님들이 저에게 하신 고백도 참 총천연색으로 다양합니다.

어떤 집사님은 “목사님, 찬송가는 찬송가입니다. 나는 그 찬송 부를 때마다 은혜 받습니다. 어떻게 내 마음에 은혜를 주는 내 사정과 똑같은 찬송이 있는지 참 찬송은 찬송입니다.” “무슨 찬송이 그렇게 은혜스럽습니까?”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자기와 똑같다고 하시는 겁니다. 부르실 때마다 은혜 받으신다는 겁니다. “목사님! 저는 성경 중에 제일 은혜 받는 성경 구절이 잠언 21장 9절입니다.” 그런데 저도 기억을 잘 못하거든요? “그게 뭔데요?” 물었더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옛날 처녀, 총각 때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그 부인이 버리지도 않고 가지고 있답니다. 그래서 수십 년 만에 자기가 보낸 편지를 가지고 읽어보고 나서 하는 말이 “그땐 내가 치매가 걸렸었나?”

오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고백이라고 제목이 나와 있는데 얼마나 다윗이 큰 짐이 있었느냐 하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며 탄식하리니” 저녁과 아침과 정오라면 하루 종일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나는 하루 종일 근심하며 탄식합니다. 이 탄식을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부르짖는다는 말은 조용조용 이야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절규의 함성을 지르리니” 이 말입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 없어서 내가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나는 객관적 평가를 해봅니다.

유대 나라 왕이 40명입니다. 40명의 임금님들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누린 사람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제일 예뻐하셨습니다. 다윗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깃발을 볼 때마다 다윗 생각을 합니다. 그 다윗의 별이라고 옛날 다윗 시대에 별을 그려놨는데 그것이 그 날의 국기가 되어서 지금까지도 하얀 바탕에 하늘색으로 별 하나 그려놓은 그것이 다윗의 깃발입니다. 그 나라 국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지나갈 때도 사람들이 “예수여!” 그러지를 않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그러면 다윗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메시야 탄생 때도 다윗의 동네로 밝혔고 예수님을 말할 때 어디서부터 말합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이름이 다윗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역사에 가장 좋은 영광을 누린 40년 통치자 임금님께서 “아침과 정오와 저녁에 내가 너무 고통스러워 부르짖으며 탄식하리니”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왜 그랬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몇 가지 짐을 졌기 때문입니다.

무슨 짐이 있었는가? 여러분, 통치자의 짐이 무겁습니다. 통치자가 좋은 것 같지요? 반드시 역사가 심판을 하는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짐을 져 본 사람은 압니다. 여러분,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모든 통치는 90퍼센트가 독재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민주화 운동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그로 인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습니까? 이 통치자는 왜 고통스러운가 하면 사람을 죽여야 되는 결정에 자기가 사인을 해야 합니다. 사인한 다음에 사람을 죽입니다.

여러분, 다윗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성경에 죽였습니까? 성경을 보면 “수천 명, 수만 명을 죽였느니라.” 여러분,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통치자가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의 명령 마지막으로 전쟁을 해서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결정을 자기가 해야 하니까 지나고 나면 다 후회스럽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통치자의 짐이라는 것은 보통 무거운 짐이 아니란 말입니다. 교인 가정에 심방을 갔는데 아주 큰 그림이 하나 있는데 그 그림의 내용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서 어떤 시골 영감님이 개울물로 귀를 닦고 있는 그런 그림이고 바로 그 옆에는 또 하나의 시골 영감이 자기 시골 영감이 자기의 소를 끌고 가다가 고삐를 잡아당기는 그런 그림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목사님, 우리 집의 가보요 가훈입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 그림을 구해서 이 그림은 대대로 물려주며 살아라! 그 속에 교훈이 있다. 욕심 부리지 말고 너희는 소시민적 생활을 이렇게 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의 내용이 그 귀를 개울가에서 닦는 영감님은 왜 개울에서 귀를 닦느냐고 물어봤더니 “내가 오늘 너무 더러운 소리를 들어서 귀를 닦고 있다.”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그렇게 귀를 닦고 있느냐 했더니 “나더러 누가 임금 되라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씻어버리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옆의 친구는 “그러면 그 더러운 개울물 내 소를 안 먹이겠다.” 하면서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 집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너희는 권력이나 이 세상 욕심 부리지 말고 깨끗하게 이렇게 살아라.” 그래서 나도 우리 아들에게 또 물려주려고 잘 보관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이 55편인데 56편에 보면 다윗이 무슨 말을 하느냐?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하도 눈물을 많이 흘려서 병으로 가득하다는 겁니다. 임금님이 무슨 눈물을 많이 흘립니까? 임금님은 눈물이 더 많고 짐이 더 무거워서, 지금 큰 통치자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이것만 벗어버리고 내가 나갈 수만 있다면….” 그런데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 짐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끝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고난스러운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윗의 마음을 누르는 짐이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안 되었으면 양떼 기르면서 아주 별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왕이 되었기 때문에 또 죄도 많이 지었습니다. 자기에게 충성한 우리아를 계획적으로 죽여 버리고 그 아내 밧세바를 데려다 살아야 되었고 이로 인해 국민의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임금님이 안 되었다면 그런 일을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참다 참다 못하여 “칼이 내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도 다윗에게 진노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견딜 수 없는 양심의 고통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신앙 지도자 나단을 왕궁으로 불러 들여서 회개하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이 임금님의 자리는 날마다 죄 짓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의 중압감 때문에 그 짐이 너무나 무거워서 견딜 수 없는 고백! “하나님, 나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랬습니다. 또, 이 다윗에게는 오늘 성경 말씀에 “나를 대적하는 자가 많더니” 그랬는데, 임금님이 무슨 대적이 있습니까? 이 다윗은 왕만 안 되었으면 대적이 없었습니다. 왕이 되었기 때문에 대적이 수없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의 새 대적이 다윗에게 생겼습니다. 이것은 왕 되었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하나는 사울 왕입니다. 사울왕은 국가적 일등 공신된 다윗을 공주를 주어서, 자기 딸을 주어서 사위를 삼았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임금님 하다가 사위인 다윗에게 물려주던가 아니면 딸에게 물려주던가 하면 될 텐데 악신이 들려서 이 다윗이 국민적 인기가 높아지니까 ‘아무래도 사위 놈이지만 죽여 버려야 되겠다.’ 그래서 가장 전투에 능숙한 군대 3000명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다윗만 죽여라!” 그래서 다윗 죽이기 위해 13년 동안 다윗을 쫓아다니지 않습니까? 그때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아둘람 동굴 속을 헤매며 거지가 되어서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몰래 몰래 갖다 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 생명을 연장하는 그 괴로운 시절을 13년이나 살았단 말입니다. 이것은 왕이 될 가능성 때문에 생기는 고난입니다.

다윗이 왜 그런 고난을 겪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내가 언제 왕이 되고자 했습니까?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가 나타나서 제 머리에 안수 기도를 해주어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하나님의 주권대로 내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나는 왕이 되고자 한 사람도 아니요 내 생활의 어떤 불평을 말한 사람도 아니요 야심 있는 사람도 아니요 그냥 목동의 소년으로 살아갈 뿐인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종에 의하여 내가 무슨 안수기도를 해달라고 머리를 내밀었습니까? 나를 통치자로 삼아달라고 축복 기도 받고자 했습니까?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나이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 눈물을 병에 담으소서. 고난스러워 견딜 수 없나이다.”

그 다음에는 아들이 큰 짐이 되었습니다. 왕이 안 되었으면 그 아들은 짐이 아닙니다. 효도하는 아들도 될 수 없습니다. 아들 가운데 압살롬이 아버지를 죽여 버리고 자기가 아들이 되려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성공한단 말입니다. 아버지 마음을 괴롭히는 방법으로 다윗이 왕궁에서 데리고 살던 여인들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성폭행해버립니다. “이러면 우리 아버지가 화가 나서 자살해 죽을 것이다.” 일부러 한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자기가 함께 하던 후궁들, 궁중에 데리고 살던 여인들을 아들이 백성이 보는 앞에서 성폭행하면서 “이래도 아버지가 속상하다고 자살하며 죽지 않겠느냐?” 이러고 있을 때 왕의 자리 때문에 생긴 다윗의 고난을 견딜 수 없어서 망하는 집안의 추악한 장송곡 냄새가 그 집안에 가득하게 되어 결국 어떻게 됩니까? 다윗이 울면서 맨발로 아들에게 쫓겨서 왕궁을 빠져나와 산속으로 도망을 가는데 사람들이 조소를 합니다. “너 잘 되었어! 죄 값이야! 오죽 못났으면 아들에게 맞아 죽겠냐?” 그런 식으로 막 모래를 뿌리며 조소를 합니다. “다윗이 감람 산길로 올라갈 때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 가니라.” 창피해서 못 알아보게 뒤집어쓰고 맨발로 밤중에 도망을 가는 겁니다. 다 왕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습니다.

세 번째 대적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고난을 당합니다. 아히도벨입니다. 이 사람이 누군가? 다윗에게 최고 충성하던 충신입니다. 이 사람은 기회주의자라서 다윗이 무너지고 압살롬이 득세할 것 같으니까 재빠르게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에게 가서 붙어서 다윗을 대적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최고 충성하던 아히도벨이 배반해서 자기에게 칼끝을 내밀었을 때 “이건 또 뭐냐?” 다윗의 고난은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20절 말씀에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에게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이러한 무거움을 진 이 다윗은 마지막에는 할 수 없이 살고자 하는 마지막 카드로 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터뜨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랬을 때 주신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가 갈등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갈등이라는 말의 뜻은 내가 결정한 것의 잘못을 발견한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결혼했습니다.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을 내가 했습니다. 하고 보니까 잘못 했습니다. 그것이 갈등입니다. 이미 결정해서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의 잘못을 내가 알았을 때의 심리적 상황, 그것이 갈등입니다.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잘못 뽑았다면 국민적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이미 결정되어진 일의 잘못이 발견된 마음 상태! 이때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정부와 국민간의 갈등도 생기고 기업인과 고용인의 갈등도 생기고 남편과 아내의 갈등도 생기고 부모와 자녀의 갈등도 생기고 목사와 교인의 갈등도 생기고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주고 질병스럽게 나타날 때 그 현상을 스트레스라고 하는 겁니다. 다 병이 걸렸습니다.

기억하고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고 정신 건강은 점점 나빠질 때 그 밸런스가 파괴될 때 성격장애가 생기고 이것이 심해지면 사람이 공연히 공격적이 됩니다. 걱정이 없어도 한숨만 쉬게 됩니다. 나중에는 자기도피증에 빠져서 피해망상자 같이 되어서 참을 수 없는 감정 폭발을 가져올 때 사회적 충격과 자살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이 현대인에게 제일 많다는 겁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는 겁니다. 중학생, 고등학생이 왜 총을 들고 아무 죄도 없는 자기 반 친구들을 쏴 죽입니까? 밸런스가 다 깨졌습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밸런스는 이미 깨졌기 때문에 정신병자가 되어서 생기는 겁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넉넉히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연히 자괴감에 빠집니다. 밸런스가 깨져서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고난을 미리 만들어 고난을 스스로 받게 되는 그런 일이 생긴단 말입니다.

우리말에 기우(杞憂)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기나라 사람 한명이 어느 날 나무 밑에 앉아서 어느 날 큰 근심을 하고 앉아있는 것을 지나가는 사람이 보고 “이보시오? 당신 무슨 큰 근심이 있어서 그런 얼굴을 하고 그렇게 나무 밑에 앉아 있습니까? 물었더니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래서 기우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기우에 빠져있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지금 다윗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생겼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이 뜻은 뭡니까? 여기서 “맡기라”고 할 때의 말과 “맡겨버리라”고 할 때의 의미는 다릅니다. “맡겨 버리라” 했을 때는 맡기고 다시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은 “네가 임금님으로서 네 힘으로 뭐든지 된다고 생각했지? 안 되지?”

인간은 임금님이 되어도 인간입니다. 약합니다. 스스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0.1퍼센트도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인간의 모든 문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진리 앞으로 오라. 다윗이여! 내게로 오라.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임금님의 능력을 가지고도 너 안 되지?” 그래서 다윗은 이때부터 믿음이 더 좋아졌기 때문에 임금님의 수행을 40년 할 수 있었고 다윗의 깃발이 생긴 겁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내가 나를 구원하는 한 가지 신앙 방법을 실천합니다. 목회 중에 일들이 참 많습니다. 수없이 많은 교우들의 관계가 생기고 교회의 어려운 일을 결정해야 되고, 또 추진해나가야 할 때 어떤 때는 깜깜합니다. ‘이야! 이거 어떡하나?’ 앞이 깜깜합니다. 그랬을 때 저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한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 그래서 하루에 내가 할 수 있는 일! 아무리 깜깜하고 큰 일이 벌어졌어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그것을 찾아서 조용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열심히 다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내일 일은 내가 또 알지 못하니 나에게 또 새로운 시간이 주어질 그때는 또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그 길을 향하여 나아가겠다.” 그래서 하루로 모든 일을 끝내버리고 종료해버리는 영적 습관이 저의 목회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사세요. 이 무거운 짐들이 어떤 때는 내가 지지 않아도 괜찮은 짐을 미리 끌어다가 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내일 염려는 내일 하자.” 이것은 아주 큰 신앙의 도움을 줍니다. 내가 계획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이 계실 때에만 성취되는 것이요, 내가 걱정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처리될 것이라고 믿는 믿음의 고백! 지금 다윗은 그렇게 하고 “하나님! 손들었습니다. 임금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도와주소서.” “그래!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그 다음에 해결이 될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것 같아도 인간은 누구나 다 한 가지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전혀 알 수 없는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아픔이 인간의 마음에 누구든지 하나씩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에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만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상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오늘 교회 오실 때 여러분이 지고오신 그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다 맡기시고 “오늘 할 일이 뭐야?” 한 날에 내가 해야 될 사명에만 충성할 때 내일은 또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다는 이런 믿음의 방향으로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다윗조차도 이런 고통에 살았습니다. 우리 소시민들은 더 고난스러울 때가 많이 있는데 그 해결 방법을 “네 모든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시는 믿음의 고백 속에 희망을 가지고 오늘 내가 해야 될 일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고 내일을 또 다시 바라보는 아침을 맞이하는 생활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되도록 영혼 가운데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예배드리는 순간에도 해결하지 못한 고난의 마음이 자신을 찌르는 가시가 있사오니 주께서 뽑아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믿음 안에서 모든 문제가 여호와의 능력으로 해결되는 기쁨이 말씀과 함께 오늘 각 영혼에 선물되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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