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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데반의 믿음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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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믿음 (행 7:54-60)

  10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일 년 중에 10월은 가장 풍요로운 달입니다. 오곡백화가 무르익어 결실을 보는 계절이고, 단풍과 청명한 하늘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달입니다. 이런 좋은 계절이 우리 교회는 ‘새 생명축제’를 갖습니다. 새 생명축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하늘나라의 잔치입니다.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면 하늘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진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바로 죽은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현장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그곳에 주님이 역사하시고,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우리가 이 일에 전념하면 됩니다. 그 현장에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새 생명축제를 앞두고 우리는 계속해서 신약에 나타난 뛰어난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특히 새 생명축제와 관련한 사람들과 사건을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귀한 역사에 함께 동참하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역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만났고, 우리가 믿음으로 이 일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에 중심이 되고 있는 뛰어난 믿음의 사람 스데반입니다. 성경은 스데반에 대해 무엇이라 말할까요? 본문을 통해 스데반에게서 발견되는 뛰어난 믿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동행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을 포함한 사도행전 7장은 전체가 스데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초대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구제문제로 교회에 어려움이 있었을 때 사도는 집사를 세워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일곱의 집사 중에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본국이 아닌 헬라 말을 사용하는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와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가 언제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제자들처럼, 우리처럼, 그도 그의 인생에 주님을 영접하고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주님을 만난 이후부터 본문에서 그의 인생을 마칠 때까지 그는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기쁠 때나 슬프고 힘들 때나 주님을 끝까지 붙잡고 간 사람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아름답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그를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평온할 때는 물론이고,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모든 과정 속에 주님은 스데반을 꼭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평생 주님과 동행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주님이 계신 하늘나라를 보고 인생을 끝냅니다.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라고 말합니다. 평생 주님과 동행하던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본 하늘의 장면입니다. 그를 기다리고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마친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스데반은 이 땅에서 평생 주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귀한 믿음입니다.

  인생은 한마디로 누군가와 동행하며 가는 길입니다. 모든 인간은 혼자 살다가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생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살다가, 함께 가는 길로 인생을 살게 하셨고, 그 길을 따라 지금까지 우리가 누군가와 동행하며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남편과 아내와 함께 가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 부모와 함께 가는 길입니다. 마음을 주고받는 귀한 친구, 인생을 배우고 도움과 도움을 주는 동료와 이웃과 사람들과 함께 가는 길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동행보다 가장 귀한 동행이 바로 주님과의 동행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주님과의 동행은 영원히, 끝까지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떠나고, 친구도 배신하고, 가족도 떠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세상의 삶을 마치고 천국에 갈 때까지 동행하십니다. 평온할 때는 물론이고, 내 인생의 눈물의 계곡과 통곡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에도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는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 받지 못한 위로와 사랑으로 나와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는 나만의 고독한 자리에서도 주님은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생에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나 혼자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를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아무도 나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것이고, 외롭고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주님은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동행이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보다 힘이 되고, 편안한 동행은 없습니다.

  지금 스데반이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그의 인생에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대신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 그가 홀로 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기와 함께 하신 주님께서 그를 끝까지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진 박해와 시련과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붙잡고 승리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기록에서 귀한 믿음으로 소개합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번 새 생명축제의 주제를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정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걸어가는 길이고, 앞으로 우리와 함께 걸어야 할 사람들을 초대하고 이끄는 길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믿음이고 소중한 삶입니다. 우리 모두 이 길을 따라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변함없이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으로 천국까지 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불쌍히 여기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스데반의 설교와 복음전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54절에 보면 스데반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마음에 찔렸고, 그를 향하여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귀한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에는 자기를 대하는 모든 사람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 마음으로 공회에 섰고, 설교도 했고, 복음도 전했고, 심지어는 자기를 대하여 분노하고 욕하고 돌을 던지고 죽이려고 해도 복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스데반의 영혼 깊은 곳에는 늘 이런 믿음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불쌍한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영혼을 불쌍히 여겼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풀어야 합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스데반의 믿음은 꽃을 피운 것입니다.

  이 마음은 주님의 마음이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의 생애를 보여주는 기록에서 가장 많이 반복하는 단어가 바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는 것도, 제자를 부르고 사람을 부르신 것도, 기적과 능력을 행하신 것도, 심지어는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모두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볼 때 무엇보다도 그의 영혼에 초점을 두셨고, 무엇보다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것이 주님의 삶이요, 가신 길입니다.

  또한 이 마음은 바울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오랜 시간에 걸쳐 바울에게서 발견한 귀한 믿음은 한마디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처음부터 이 믿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도 바울도 주를 위해 헌신 모든 사람들도 하나같이 주님의 이런 마음을 본받고 따라 간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귀한 믿음임을 알려줍니다. 믿음은 어떤 것인가, 바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길 때 우리는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사람을 대하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이런 관점에서 한번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를, 자녀와 부모를, 친구와 동료와 성도를, 그리고 목회자를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십시오. 훨씬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결국 그 마음으로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도, 이것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는 우리에게 적잖은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지치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딜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불쌍히 여기는 시각으로 바꾸십시오.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을 보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복음전파의 큰 열매가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 용서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말 우리를 감동시키는 장면은 스데반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용서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이야기에서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59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는 마지막 가는 길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용서했습니다. 이것이 스데반에게서 발견하는 귀한 믿음입니다. 그는 용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고, 용서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용서를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한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도 돌아가실 때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향해 비웃고 조롱하고 죽이려는 사람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바로 이런 주님의 모습을 그대로 스데반이 따라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야말로 가장 예수님을 잘 닮은 사람입니다. 그는 작은 예수였고, 주님의 진짜 제자였으며, 주님처럼 살기를 다짐하며 살던 인물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잘 알던 사람입니다. 주님을 닮고, 믿고, 따라가면서 용서라는 것이 가장 큰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결국 스데반은 용서가 사랑이고, 용서가 믿음이고, 용서가 전부라는 것을 일깨워준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용서하지 않으면 아직까지 믿음의 산에 오르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용서가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용서하고 사는가를 보면 내가 얼마나 귀한 믿음을 가졌느냐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용서하고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미움과 증오와 갈등을 겪고 계십니까? 믿음에서 용서가 가장 크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용서가 얼마나 위대한 능력과 힘을 발휘하는가를 잊지 마십시오. 믿음에서 용서가 가장 크기에, 용서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주목할 말씀이 본문 58절입니다.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스데반이 죽는 현장에 사울, 바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바울이 보는 앞에서 돌로 맞아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스데반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던 바울에게 커다란 충격이 왔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은 뒤 바울은 곧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감격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우리는 보통 바울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루어진 만남으로 압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입니다. 바울이 구원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요, 강권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편에서 전혀 원인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온 은혜가 너무도 크고 놀라왔지만,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서 적잖이 바울이 충격을 받고 동요가 일어난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저렇게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그의 뇌리 속에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주님을 만난 것이고, 주님의 부름 앞에 ‘주여 뉘시오니까’ 하면서 엎드려 스데반과 동행한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용서의 힘입니다. 스데반의 용서가 이런 능력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용서에는 힘이 있습니다.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풀어주는 힘이 있고, 많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지만, 바울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바울로 인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스데반이 아니면 결코 바울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작은 용서가 이처럼 역사의 큰 물줄기를 틀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힘이요, 믿음의 힘입니다.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용서해야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믿음 속에 큰 능력이 나타남을 잊지 마십시오.

  말씀을 맺습니다. 스데반의 귀한 믿음, 그것은 한결같이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이고, 날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믿음이며, 그리고 끝없이 용서하는 믿음입니다. 이 귀한 믿음을 마음에 새기고 한 주간도 믿음의 길, 승리의 길을 향해 힘 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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