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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 (요 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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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 (요 2:13-22)

  오늘 본문을 바로 앞서는 1-11절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한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신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저자는 곧바로 예수님을 그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정도의 이적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이적, 온 인류역사에서 가장 크고 단 한 번뿐인 이적을 행하신 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요1:29)고 증언했듯이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대속의 주”이심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전하는 사건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 안에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신 일이 유월절에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며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유월절이란 말이 어떻게 해서 생겼습니까? 하나님께서 애굽 땅의 모든 장자들을 다 치실 때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신 일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그 명절에 맞춰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의 행위는 곧 그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실 이로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드러낸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그가 보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더 큰 일” 가운데 첫 번째이며 가장 작은 일로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을 기록했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장 크고 궁극적인 일인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을 예고한 사건을 나란히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을 예고한 사건이란 다름 아니라 본문 19절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리라” 말씀하신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행동의 주된 목적이 당신이 모든 사람의 대속의 주로 오셨음을 선언하시는 데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고전5:7)이심을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 행동과 명령의 정당성을 입증할만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본문 18절).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깜짝 놀랄 표적을 행하시겠다고 공언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전을 헐면 예수님께서는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제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헐라고 말씀하신 성전은 당신의 몸을 가리키신 것이고(본문 21절)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신 것은 당신의 부활을 뜻하신 것이었는데, 그 사실과 그 사실을 알리시려는 예수님의 행동과 발언의 의미를 유대인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신 것이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을 뜻하신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의 저자는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번 예수님의 육체가 성전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본문 16절에서 보듯이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은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라면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요1:14에서는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습니다. 또 요14:10-11절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시라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전이시라면 우리의 진정한 예배는 손으로 지은 성전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 성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졌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대속의 희생제물은 예수님의 몸에서 이미 바쳐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몸이 예배당 안에 있음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을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신 것은 단지 성전을 물리적으로 깨끗하게 하신 일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과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일임을 보게 됩니다. 즉 외형적인 믿음에서 내적인 믿음으로, 성전 중심의 예배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로 참된 믿음과 예배의 의미를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신 것은 그것들이 다 필요하기는 한데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며 돈 주고 받는 모양이 보기 안 좋으니 성전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해서 이제는 그런 희생제물 자체가 필요하지 않게 된 때가 이르렀음을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단 한 차례 영원한 속죄의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히9:26-28, 10:10, 12, 14, 18). 이제 성전과 예배와 믿음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하고, 오직 그가 계심으로써 성전과 예배와 믿음이 온전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짐승들과 장사꾼들을 내쫓으시는 행동으로 엄숙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 없이 성전만 찾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믿음과 예배의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고 삶의 원동력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기쁨이고 감사의 이유이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는 국가적 정체성과 신앙적 정체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첫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예수님의 탄생 직전부터 헤롯에 의해 개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사는 예수님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으며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기 7년 전인 63년에 가서야 완공된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새 성전건축을 메시야의 도래와 함께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성전의 파괴와 그 삼일만의 재건을 언급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것으로 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자체의 파괴와 함께 그 성전 중심의 율법적인 신앙의 변혁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아니 예언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의 몸으로 그것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을 통해 던지신 또 한 가지 메시지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을 용납할 수 있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에게 국가적 정체성의 상징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는 이스라엘이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고 정복자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에 대한 반감이 거세져 있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더더욱 유대인들의 애국심의 요새가 되어 있었습니다. 종종 포괄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예루살렘 성전은 몇 겹의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엄격한 의미의 성전은 성소입니다. 제사는 성소에서 드려지는 데 거기에는 제사장만 들어갑니다. 성소 안에 있는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제사드리러 온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허용되는 구역은 성소 밖에 있는 [이스라엘의 뜰]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뜰 밖에 있는 구역이 [여인들의 뜰]로서 제사드리러 온 이스라엘 여자들에게 허용되는 구역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외곽구역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의 뜰은 제일 외곽구역이긴 하지만 넓은 의미로 예루살렘 성전이라 할 때 그 안에 포함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제물에 바쳐질 짐승들을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은 바로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들어와 예배드릴 수 있는 유일한 구역이 이 이방인의 뜰이었는데 거기를 짐승들과 장사꾼들에 의해 어지럽혀지게 만들어 이방인의 예배를 차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모두 마치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그들이 주의 크신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왕상8:41-43). 또한 이사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6-7).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막 11:17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성전 뜰에서 짐승들과 장사꾼들을 내쫓으신 후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이 이사야서 56:7을 인용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만민”이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이 하나님을 찾는 만민에게 열려진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다시 실현하셨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안에 갇혀있던 유대인만의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신앙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보다 순수하고 그 모습이 보다 경건해지기를 가르친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언행을 지켜보며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했다고 본문 17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품되 그 열심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장삿속 계산을 따르는 열심이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어떤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동기와 목적으로 교회를 찾고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은 우리의 믿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신 일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짐승들과 장사꾼들을 쫓아내시며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이시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성전은 거의 믿음의 표현 그 자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제물에 바쳐질 짐승들과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심으로써 성전이 믿음의 대상일 수 없고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매번 심혈을 기울여 지은 성전이었지만 허망하게 파괴되는 역사를 반복해 보여주었습니다. 헤롯 때부터 야심차게 개축한 예루살렘 성전도 완공된지 7년 만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단 한 번 장사되신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 일어나셨고 영원히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는 성전건물에 믿음과 소망을 거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고 온전히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참된 믿음과 지혜로운 삶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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