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시 꺼내보고 또 꺼내보는 나의 상처 (삼하 15:1~30)

  • 잡초 잡초
  • 583
  • 0

첨부 1


다시 꺼내보고 또 꺼내보는 나의 상처... (삼하 15 : 1~30)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밧세바도 그렇고, 압살롬도 그렇고, 다말도 그렇고, 하여튼 예쁘고 잘 생긴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잘 생겨서 하늘 나라 가기가 이렇게 힘든 건지, 애매한 고난도 많이 당합니다. 조금만 수고해도 될 걸 그렇게 고생을 하더니 너무 잘 생긴 압살롬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또 밧세바 같은 여인은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겪고 나서야 겨우 예수님의 계보에 올랐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이야기하는데도 우이독경이 돼서 우리도 다들 예쁘고 잘 생긴 게 우상입니다.

밧세바 사건의 결론으로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네 집에서 칼이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고, 네 처들을 취하여 다른 사람과 백주에 동침하게 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경고대로, 모든 것이 삶의 결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다윗에게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큰아들 암논이 누이 다말을 강간했고, 거기에 앙심을 품은 압살롬은 이 년 동안 계획을 세워서 형 암논을 죽였습니다. 암논을 죽이는데 성공한 압살롬은 그술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의 집으로 피신을 하는데, 달매는 다윗의 처 마아가의 아버지로 압살롬에게는 외갓집이 됩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면서 왕족의 딸인 마아가와 결혼하는 것은 정략적으로 매우 이익이 됐을 겁니다. 자식들 결혼시키면서 대단한 집안의 딸이 며느리가 되면 우리 아들한테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왜 안 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행했다고 하는 것까지도 살면서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다 지적하시고 갚아주셨습니다. 왕족의 딸 마아가와의 정략적 결혼으로, 보기만 해도 너무 잘 생기고 똑똑한 아들 압살롬을 주신 것입니다.

압살롬에게 그 정도로 믿을만한 외갓집이 없었다면 반역을 도모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잘 산다는 게 이렇게 세상적으로 피할 길이 됩니다. 요즘 젊은 직장인들 월급이 대개 백 만원에서 이 백 만원 사이일텐데, 부잣집 딸이 그런 사람과 결혼한다면 처음에는 멋모르고 좋아서 살겠지만 점점 성격 차이가 생기고 문제가 생기면 잘 사는 친정으로 가고 싶어질 것입니다. 핵가족 체제에 자녀도 하나 아니면, 둘만 낳다보니 부모들도 자기 자식이 어렵게 사는 걸 못 봐주는 시대입니다. '내가 얼마나 귀하게 키운 딸인데, 아들인데' 하는 생각에 믿는 분들도 도무지 적용이 안 됩니다. 지금 시작하는 젊은 부부로서 백 만원, 이 백 만원에 순종해야 할 때인데 자꾸 친정에서 돈 대주고, 옷 사주고 하니까 조금만 어려워도 피할 곳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압살롬도 그술에 피해있는 동안 못된 것만 배워왔습니다.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신명기 17장 16절에서도 말씀하셨고, 그래서 전리품으로 빼앗은 말도 그 힘줄을 다 끊어보냈다고 했는데 압살롬은 말을 이용한 최초의 지도자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맨 날 나귀하고 노새만 보다가 다른 나라에 가서 말을 보니까 얼마나 멋있어 보였겠습니까. 백성들이 보기에도 너무 멋있죠. 그래서 외적인 배경만 보고 안 믿는 사위, 안 믿는 며느리를 들였다가는 결국 압살롬처럼 다윗을 반역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분리시키는 역할만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적용)
자녀에게 어떤 배경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공부해야 할 때, 절약해야 할 때,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때에 불순종하여 피할 곳만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술로 도망간 압살롬을 대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13장 37절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 아들을 인하여 슬퍼하니라."

다윗이 암논과 압살롬을 차별하고 있는 게 아닌가요?
암논이 잘못했을 때는 심히 노하더니(삼하13:21), 압살롬이 형 암논을 죽이고 도망가니까 그 아들 때문에 슬퍼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도 다윗이 암논보다 압살롬을 사랑했다고 생각되지만, 단지 압살롬이 잘났기 때문에 압살롬에 대해서만 슬퍼하는 것은 아닙니다. 39절 말씀을 보면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구원을 소극적인 구원과 적극적인 구원으로 나누어본다면 소극적인 구원은 우리 가족의 구원이고, 적극적인 구원은 모든 민족과 열방의 구원입니다. 다윗은 영적 전쟁을 잘 치르면서 적극적인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은 엉망이 돼서 큰아들 암논은 결국 구원받지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압살롬도 살인을 하고 멀리 도망갔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기 죄의 결론인 것을 알고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극적인 구원의 사명은 잘 감당했지만 자기 자식들이 하나 씩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모습을 본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그래도 공의를 위해서 삼 년 동안 찾지 않았지만 다윗에게는 압살롬을 치유하거나 바른 길로 돌이킬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몇 만 명을 전도하면서도 자식에게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는 목사님들도 많습니다.

구원 때문이기도 하고, 부모로서의 사랑 때문에도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해 간절했을 겁니다. 그 때 그런 다윗의 마음을 파악한 요압이 다시 사건을 만듭니다. 요압은 항상 악한 꾀를 가져다줍니다. 밧세바 사건에서도 다윗에게 충성으로 바른 말을 했다면 우리아를 죽이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다윗의 요구를 기가 막히게 잘 처리해준 사람이 요압입니다. 결국 그 요압이 압살롬을 데려오는데 앞장서서 다윗에게 다시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줬습니다. 꼭 나쁜 일에 앞장서주는 요압입니다.

데려다 놓긴 했어도 완전주의자 다윗은 이 년 동안 압살롬을 못 봤습니다. 압살롬은 압살롬대로 데려다놓고 만나주지는 않으니까 억한 심정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유기(遺棄)된 심령이기 때문에 매사에 아버지에게 탓을 돌립니다. 누이 다말이 강간당한 사건 하나 때문에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문제를 거기에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우리 엄마는 오빠만 좋아하고 나를 무시했어."하면서 평생 그 어머니를 용서 못하시는 분도 보았습니다. 옛날, 그야말로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엔 딸들이 많이 고생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는 교육은 둘째치고, 농사일만 시키거나 남의 집 살이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라서 잘 살게 되고 보니 그 때 어머니가 자신을 남의 집으로 보냈다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고생을 했으니 지금 잘 살게 된 것에 감사하면 좋을 텐데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그 어머니가 용서가 안 됩니다. 여기 저기 상담도 받으러 다니고, 가정에서 남편과 자녀들이 아무리 잘해줘도 엄마를 용서 못해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런 압살롬을 어쩌면 좋을까요. 누이의 일에 대한 상처 때문에 그 아버지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자그만치 십 일 년 동안을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미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당사자인 암논을 죽인 것도 모자라서 그 화살을 아버지 다윗에게 돌리는가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런 상처가 있어서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죽어도 해결이 안 되는 분들이 많습니다. 돈이 없다고, 자식이 속을 썩인다고,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그 모든 문제에 내가 미워해야 할 대상 하나를 정해 놓고는 거기에 탓을 돌립니다. 다말이 강간당한 사건의 원인을 암논에게 돌리다가, 암논이 죽었으니까 이제는 다윗에게라도 탓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탓하기 좋아하는 "압살롬의 다말"과 같은 상처가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남편일 수도 있고, 어머니, 아버지일 수도 있고, 형제, 친척, 시누이, 동서, 친구들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보지 못하고 '친정 엄마가 결혼을 반대해서 고생했으니까 내가 보란 듯이 갚아 줄거야.' 하면서 복수의 칼을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화살을 거기에 향하고,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하면서 평생 원망하고, 미워하고,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병입니다. 거기에는 말씀을 보는 것과 함께 전문적인 상담과 치유가 꼭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도 서로 너무 미워해서 이십 년, 삼십 년을 원수로 지내는 집사님들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도 다 병입니다. 인간의 타락에서 온 산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단이 그 미워하는 마음으로 역사를 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보면 자기 가족들끼리는 잘 지냅니다. 압살롬의 특징도 누이 다말을 너무나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했던지 자기 딸 이름을 다말로 짓지 않았습니까. 이런 게 가족 우상주의입니다. 거기에 젖어서 객관적 시각을 잃고 남들의 잘못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적용)
힘들 때마다 떠오르는 '상처'가 있으십니까. 내가 못나고 부족한 것이 '누구' 때문, '어떤 일' 때문이라고 습관처럼 말하지는 않습니까. 예수 믿고, 큐티를 해도 치유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직 용서하지 못한 미움과 원망, 아직 고백하지 못한 죄 때문은 아닐까요.

압살롬이 십 일 년 동안 쌓아온 미움의 결론을 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생각합니다. 그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그런 상처와 원망으로 힘들어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제 그만 수고하고 안식하십시오. 절대로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애매하게 당하는 것 같아도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정에 하시려고 하는 말씀이 반드시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신 것을 알고 이제는 누구를 탓하고, 사건 자체에 집착하는 것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또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고, 몸이 약하다고 그것도 "나 때문"이라고 하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도 버려야 합니다. 압살롬은 이미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유기(遺棄)된 자입니다. 압살롬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애매하게 당해도 우리는 다윗만 쫓아가면 됩니다. 내 속의 압살롬을 물리칠 수 있도록, 또 내 속에 있는 끔찍한 다말의 사건을 잊을 수 있도록, 그 사건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건임을 알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저희가 압살롬에게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압살롬이 보기에 너무 멋있다는 겁니다.

15장 1절~4절 - 이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 오십 명을 세우니라 압살롬이 일찌기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술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서 그술의 방식대로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다윗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일찌기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어도 이렇게 멋지게 부지런히 살 수 있습니다.

성문 길 곁은 법정의 기능을 하던 장소인데, 자기를 위하여 일찌기 일어나더니 재판관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월권행위를 시작하고 다윗이 세운 재판관들을 비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백성들 편을 무조건 들어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재판관에 따라서 이렇게 불공정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재판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라의 사법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무려 사 년 동안 압살롬의 불공정한 재판이 행해졌습니다. 어떤 일에 상담자가 되면서 한 쪽 이야기만 듣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꼭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들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하더라도 처음에 들을  때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생각하다가도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 이래서 바람을 피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믿음의 지체들과 나누십시오. 객관적인 의견들도 듣고, 함께 나누는 속에서 스스로를 보게 됩니다. 일반적인 상담 기관들을 보면 요즘엔 '이혼하라.'는 충고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부부간의 어떤 문제도 '이혼'이라는 답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저래서 어떻게 사나. 차라리 헤어지지.'하는 생각만 하기 때문에 쉽게 이혼을 권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이렇게 불공정한 재판을 일삼는 데에는 물론 다윗의 잘못도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하느라고 바빠서 백성들의 송사를 일일이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운 재판관들에게도 실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다윗의 직무유기를 명분으로 백성들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암논이 다말을 강간했는데 다윗이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내가 죽였다. 그런데 나까지 모른척하고 있다. 지도자가 이럴 수 있느냐.'는 압살롬의 명분도 너무나 그럴듯했기 때문에 충분히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다윗이 가만히만 있으니까 다윗에게 문제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이렇게 머리가 좋고 집요한 사람입니다. 거기에다 잘 생기까지 한 사람이 무조건 편을 들어주니까 백성들 마음이 '뿅~'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계보에 있는 다윗은 몰라라하고 우리도 다 압살롬을 좋아하게 돼 있습니다. 남편 때문에 지겹고 힘든데 '네가 왜 이러고 사니, 이혼해라.' 그러면 너무 좋아하는 겁니다.

적용)
나라와 기업, 가깝게는 내 직장의 행정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면서 기도는 하지 않고 비판만 하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나라의 사법부를 위해 기도합시다.가까운 사이일 수록 공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남편, 자녀, 부모와의 사이에서 내게 유리한 명분과 이유만 내세워 불공정하게 행한 것은 무엇입니까.

5절~6절 -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그것만해도 좋은데 입까지 맞추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잘생기고 똑똑한 사람이 겸손하기까지 하니 얼마나 '뿅~' 가겠습니까. 이래서 압살롬이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은 무조건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착하고 겸손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진실이 아니고 인위적인 것이라서 문제가 되는 거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도 빼어난 용모로 온 미국인의 마음을 도적질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올바른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양조장을 해서 술로 돈을 번 집안이었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 한 일이 필수과목이었던 성경 과목을 자율로 바꾸고, 게다가 창조론 수업을 없애게 했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자율과 자유를 부르짖다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허무주의와 히피, 마약, 권총 살인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케네디가 지도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케네디 가(家)에서 일어난 많은 비극들도 결국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는 것입니다.

잘 생기고, 예쁘고, 세련되고, 학벌 좋고, 좋은 출신이고, 그런 사람은 무조건 우러러보고 따르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도적질 당합니다. 그 속에 어떤 무서운 칼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나부터도 속에는  죄를 숨기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너무나 교양 있게 행동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속으면서 삽니다.

적용)
어떤 사람에게 마음이 뺏기십니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하지만 더 똑똑한 아들, 더 예쁜 딸에게 마음이 향하지는 않습니까. 겉보기에 번드르르한 사람이나 물건 앞에서 분별력을 잃는 일은 없습니까.

7절~9절 - 사 년만에 압살롬이 왕께 고하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컨대 나로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왕이 저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저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원수를 갚기 위해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는데 사 년이 걸렸습니다. 구 년 동안이나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쫓아다니던 사람이 막상 결혼하고 나니 다른 여자의 마음을 도적질하러 가는 걸 보았습니다. 국회의원들도 한 번 떨어지고 나면 그 구민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모릅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 세상 일을 위해서도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우리가 일, 이 년 노력해서 누구의 마음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인간론을 그리도 잘 알아서 사람을 분별하던 다윗이 자식이 되니까 분별을 못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아들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윗도 분별이 안 되는데 다른 사람들이 마음 도적질 당했다고 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10절~11절 -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부르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그 때에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은 이 백 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

압살롬은 골고루 인심을 얻고 치밀한 계획대로 진행을 합니다. 거기에 그냥 넘어가서 이 백 명의 사람들이 아무 뜻 없이 따랐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그렇게 뜻 없이 약속의 땅에서 떠나게 됩니다. 지금 좇고 있는 사람이 압살롬입니까. 아니면 다윗입니까. '나는 그 사람 그렇게 나쁜 줄 몰랐어,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이러면서 후회해봤자 결국 그것도 내 삶의 결론입니다. 뜻 없이 좇았다고 하지만 정말 뜻 없이 좇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내 삶의 결론으로 좇는 거죠. 보십시오.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마음을 도적질 당하지 않고 다윗을 좇는 사람들은 끝까지 다윗만 좇아갑니다. 

적용)
나는 무엇을 쉽게 좇습니까. 착하다는 소리, 세련됐다는 소리를 들으십니까. 뜻 없이 하자는 대로 다 하고, 뜻 없이 유행을 좇은 결과는 아닐까요.

12절 -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아히도벨은 다윗의 기막힌 책략가, 모사가이고 그에게 묻는 것은 하나님께 묻는 것처럼 여겨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아히도벨이 왜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자기 고향 길로에 가 있었을까요. 이 사람은 벌써 초기에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것도 다윗의 결론입니다. 아히도벨의 손녀가 바로 밧세바였습니다. 그러니 다윗에게 감정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아히도벨이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 못 됐기 때문에 그 하나의 사건 때문에 다윗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단순히 배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판단하기에 압살롬이 다윗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두 주인을 섬겼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자꾸 압살롬에게로 오니까 처음에는 분명 압살롬이 유리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똑똑한 아히도벨도 권력의 흐름을 잘못 파악하고 압살롬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굳건하게 붙잡혀 있지 않으면 순간의 선택에 따라서 자꾸 곁길로 가게 돼 있습니다.

적용)
내년에 다시 큰 선거를 치르게 됩니다. 어떤 근거로 나라의 일꾼들을 뽑고 있습니까. 권력의 흐름, 경제적 위기의 대처능력, 또는 지연과 학연... 그 모든 것들은 뒤로하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택하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13절 - 사자가 다윗에게 와서 고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다윗은 완전히 망했습니다. 압살롬이 사 년이나 백성을 다독거리는 동안 다윗은 열심히 영적 전쟁을 치렀습니다. 백성들에게 잘 보이려고 옆에 붙어있기만 하면 중요한 일은 누가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좁은 소견으로 당장 내 눈앞에서 잘해주는 사람만 좋아합니다. 

14절 -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 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아버지로서 자식의 반역을 듣고 나자 다윗은 아무 소리 못하고 도망하자 합니다. 차마 하나님께 묻지도 못하고 빨리 가자고 합니다. 나단 선지자의 예언을 기억하며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에게 너무나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자식과 맞서서 전쟁을 한다면 그 전쟁이 이겨야 되는 전쟁입니까, 져야되는 전쟁입니까. 하나님께 '이기게 해주세요.' 기도하시겠습니까, '지게 해주세요.' 기도하시겠습니까. 이런 기가 막힌 어려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질 수도, 이길 수도 없는 전쟁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식의 문제를 주시는 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자식 문제 앞에서 우리가 겸손해 집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초라하게 왕궁을 내어주고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십 여 년 동안 수고해서 이룬 통일 왕국을, 그 모든 것을 내어주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들하고라도 싸워보고 죽겠다.' 하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내어주고 떠나는 적용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길로 놓는 것입니다.

적용)
자식의 문제 앞에서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배신감으로 분노하고 있습니까. 어떻게든 말을 듣게 하려고 야단치고, 달래고, 씨름하고 있습니까. 자식마저도 내려놓은 채 내가 놓고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은 어떤 것일까요.

15절~16절 - 왕의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의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하더라 왕이 나갈 때에 권속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궁을 지키게 하니라

다윗이 다 포기하고 떠나려고 한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신복들이 다윗을 떠나지 않고 다윗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후궁 열 명을 남겨 둔 것은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고, 아버지의 부인인데 설마 압살롬이 어떻게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다윗의 조치도 하나님의 섭리에 쓰여졌고, 혹독한 결론으로 주셨습니다.

20장에서 압살롬의 난이 평정되고 나서 세바의 난이 왔을 때 3절에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고 했습니다. 세바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뜬금없이 후궁 열 명과 죽는 날까지 동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세바의 난이 평정됩니다.

결국 남겨진 후궁 열 명은 압살롬의 반역사건을 통해 다윗의 약점을 치료하는데 쓰여진 것입니다. 다윗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여자' 얻어들이는 것이었죠. 예수 믿는 백성에게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결과로 지금 다윗 왕국이 난리가 났습니다. 여자 문제에 대해서 다윗에게 깊은 죄의 자각이 없었고, 끝내 끊지 못했기 때문에 밧세바 사건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밧세바 사건이 나고서도 다윗은 후궁을 얻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가 막힌 압살롬 사건, 아들이 자신의 후궁들과 동침했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 스스로 자신의 죄에 대해 끔찍이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세바의 난이라는 사건이 왔을 때 죽어도 여자 문제만은 해결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급박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빨리 나의 죄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저에게도 그런 상황이 있었습니다. 저의 가장 큰 약점은 연주회였습니다. 연주하러 나가려고만 하면 왜 그리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지, 연주 전에는 갖은 죄를 다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전날부터 회개를 하기 시작해서, 연주회 당일이 되면 갑자기 헌금해야 할 곳까지 떠올라서 당장 헌금을 하고 가지 않으면 실수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혹시 시간이 없어서 못하면 언니에게 부탁해서라도 헌금을 하곤 했습니다. 다 믿음이 연약했던 시절의 이야기죠. 평소에 늘 회개를 해 놓으면 그럴 일이 없습니다. 

다윗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아들 넷을 잃기까지 끊지 못했던 죄를 세바의 난이 또 터지니까 드디어 끊게 되었고, 이후로는 죽는 날까지 여자를 얻지 않았습니다. 후에 늙어서 수넴 여자 아비셉을 들여 수종들게 하기는 했지만 동침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다윗이 지금 압살롬을 피해서 떠나는 이 행로는 자신의 일생의 약점, 여자 문제를 끊어내는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적용)
술, 담배, 여자, 미움, 의심, 쾌락, 게으름, 집착.... 죽어도 못 끊어낼 것 같은 나의 죄들을 어떻게 끊어내시겠습니까. 자녀를 잃고, 재산을 잃고, 집안이 망해야 끊어내시겠습니까. 그렇지 않기 위해서 지금의 사건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17절 -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머무니

"벧메르학"은 '마지막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이제 마지막 집, 더 이상 갈 데, 올 데 없는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온갖 힘든 일 다 겪어내고 왔는데 자식의 문제가 다윗에게 마지막이 됐습니다. 왕국도 재산도 자식 때문에 다 내려놓고 쫓겨가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있을까요.

18절 - 모든 신복이 그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육백 인이 왕의 앞으로 진행하니라

그러나 자식에게 쫓겨난 다윗에게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가드에서 온 육 백 명"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부터 줄곧 따르며 가드에서 시글락, 시글락에서 헤브론, 그리고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함께 한 "환난 당하고, 원통하고, 빚진 자"(삼상22:2)들입니다. 사무엘 상에는 사 백 명으로, 역대 상에서는 육 백 명으로 기록이 되어있는데, 너무 놀라운 것은 다윗이 왕이 된 후 수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많은 부하를 두었는데도 다윗과 같이 떠난 사람은 600명에서 한 사람도 더 늘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힘든 '아둘람' 굴 생활을 함께 했던 사람들 그대로가 지금 다윗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삼부 요인들 아무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잘나서, 믿을만해서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택한 백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따릅니다.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죄를 지어도 막상 행하지는 못하는 것이 택한 백성입니다. 환난이 얼마나 큰 능력인지요. 이 들이 환난을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에, 체험된 신앙이기 때문에 이렇게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나의 벧메르학, 자식이 속을 썩이고, 남편이 외도를 하고, 사업이 망하고, 병에 걸려도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제하는 지체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는 것을 경험하셨습니까. 나의 사건을 나누고, 말씀으로 해석하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지체가 있다면 그야말로 '벧메르학 - 마지막 집'이 됩니다. 마지막이 됐으니 이제 올라갈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외도를 하고, 자식이 가출했는데 어디 얘기하고 나눌 대상이 없다면 아직 더 내려가야 합니다. 아직은 고난의 기한이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자식만 의지하느라 지체를 두지 못했다면 더 애통해야 할 일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이 내 지체가 아닙니다. 환난 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 내가 멸시하기 쉬운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서 만날 내 지체들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작년에도 하루만에 갚겠다고 하셔서 빌려드렸는데 지금까지 갚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열 배에 가까운 돈을 빌려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분이 사업을 하시는 분인데, 왜 저한테만 빌리려 하시느냐고 했더니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에 돈 빌릴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평생 사업을 해왔다는 사람이 주위에 돈 빌릴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도 그 분의 결론입니다. 그런 분이 하는 사업이 잘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분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만  빨리 정리하고 직장을 구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의 벧메르학에 육 백 명의 지체가 없다면 그것이 내 삶의 결론입니다. 다윗을 따른 사람에 비해 압살롬 곁에 남은 자들이 훨씬 많았지만 그들은 다 자기 이해 타산 때문에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압살롬이 죽을 때 그를 돕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남편 때문에, 자식 때문에 괴롭고, 돈이 없어서 힘든데 얘기할 곳이 한 군데도 없다면 그것이 여러분 삶의 결론입니다. 내 신앙의 현주소가 거기입니다. 다윗은 쫓겨났어도 계속적으로 돕는 손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지금 힘든 것이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자식이 떨어지고, 사업이 망한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잘못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적용)
고난 속에 혼자 울고 있습니까. 자존심 때문에, 그 동안 쌓아온 교양(?) 때문에 혼자만의 속병으로 끌어안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지만 가난하게 살고, 고생하며 산다고 무시하고 멀리했던 친구, 형제, 자매 중에 나를 위해 기도해 온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요. 

그렇다고 울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의 고난이 나의 '벧메르학 - 마지막'이 되어서 이제는 올라갈 길만 있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23절을 보면 "온 땅 사람이 대성 통곡하며 모든 인민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고 했습니다. 30절에는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고 했습니다. 

기드론 시내는 어떤 시내입니까. 요한복음 18장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건너시는 곳이 기드론 시내입니다. 천 년 후에 똑같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 십자가의 길로 가셨습니다. 그 어두운 탁류의 길.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모든 것이 내 죄의 결과인 것을 알고 건너는 그 길에 주님이 함께 건너 주시면 그 건너에는 '기름틀의 집' 겟세마네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사건이 내 살아온 결론인 것을 인정하고, 지체들과 함께 맨 발로 울며 건널 때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지금의 고난이 우리 모두에게 '벧메르학 - 마지막'이 되기를 원합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기를, 이제부터는 내내 올라가는 길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손 꼭 붙잡고 함께 걸어가는 길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 가운데 회개의 영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말씀에 반응하게 하여주옵소서.

모든 사건에서 압살롬을 보기를 원합니다. 내 속의 압살롬, 내 옆의 압사롬, 내 자식 압살롬을 보기 원합니다.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재판관 노릇을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한 압살롬처럼 이 세상 권력과 부유함 속에서 다른 이들의 송사를 들어주고, 상담자가 되어주는 것의 결론이 무엇인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또 그렇게 갖춘 자에게 마음이 도적질 당할 수밖에 없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세상이 아직도 너무 좋고, 안주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압살롬에게 마음이 간절한 다윗처럼 날마다 마음이 향하고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속에는 그런 정욕과 야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씀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씀을 안다고 하면 할수록 그렇게 포장하는 것들이 많은 것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님, 저희들의 마음을 저희가 어떻게 주장하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을 주장하시기 위해서 압살롬을 허락하신 것처럼, 그래서 벧메르학까지 가게 하신 것처럼, 저희도 저희의 마지막 벧메르학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처지가 저희에게 마지막이 되어서 이제부터는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나의 기드론 시내를 건너며, 맨 발로 울며 오르는 감람산 길에서 이 모든 것이 내 살아온 것의 결론이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붙잡고 가기를 원합니다. 이 어두운 탁류를 주님이 등불되셔서 함께 건너 주실 것을 믿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나를 끝까지 놓지 않으시고 건너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내가 잘못 살아왔기 때문에 나의 벧메르학에서 함께 통곡해 줄 지체가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주옵소서.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친척이 있어도 내가 마지막까지 이르렀을 때 따라 줄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고 이제부터는 그런 지체를 한 사람, 한 사람 더해 가는 것이 저희의 기도제목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