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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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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 15:1-11)

오늘 저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은혜는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와도 같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위한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은혜의 관점에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바르게 아는 것은 믿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 지식에 박학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 수 없습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복음을 듣기만 한다고 믿음이 저절로 생긴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때 비로소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믿음이 생겨야 구원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골로새서 1장 6절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듣긴 들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소유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믿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아는 그 만큼 믿음도 자라납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이 구원에 대하여 언급할 때는 항상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죄인되었다고 말하면, 이를 부당하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을 언급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의 생각이 얼마나 죄에 오염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악한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죄에 감염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선한 사람은 악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악한 생각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0)…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언급된 악덕들을 다 행해야만 죄인인 것이 아닙니다.

이 여러 가지 악덕 가운데 하나만 행할지라도 그것으로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합니다. 죄인이라고 착한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악한 행위보다 착한 행위를 더 많이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논의의 핵심은 죄를 많이 지어야만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도 단 한 가지의 악을 행했다면 그것으로 죄인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남을 미워하거나 교만한 생각을 품는 것을 살인과 마찬가지로 죽을 죄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고 말씀합니다(롬 3:19, 23). 디도서 3장 3절에 보면, 구원 받기 이전의 우리 상태에 대하여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의 비참한 신분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2장 10절에는, 전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긍휼을 얻지 못하던 자들이었다고 하였으며, 에베소서 2장 11절 이하에서는 “11)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비참한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절망적인 것은, 죄인에게는 자기의 비참한 운명을 개선할 아무런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상태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3장 9절에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범죄한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는데 절대 무능하다고 말씀합니다.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그 사람은 입은 옷과 가진 것을 다 빼앗겼을 뿐 아니라, 강도들에게 맞아서 거반 죽게 되어 버려진 상태로서 때마침 사마리아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강도만나 상처입고 버려진 사람은 곧 범죄한 인간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사마리아인과 같은 구원자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사마리아인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이 죄와 사단에게서 해방되어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수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 받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는 골수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습니다. 이는 그가 허세를 부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율법대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가 다메섹 길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뵌 후에는 이전에 그가 가졌던 자만심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그는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랑했지만, 이제는 죄인 중에 괴수인 그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자기의 율법 지식을 자랑하고, 가문과 학벌을 자랑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로는 자기를 낮추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기로 작정한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주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아무 자격도 없는 자에게 값없이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서 주님의 일에 더욱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의 구원 뿐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소속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런 만큼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무조건 만사형통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믿기 전보다 더 불편하고 갈등하고 고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을 보세요.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으나 그들이 발을 디딘 곳은 나일강 삼각주의 비옥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옥한 애굽의 고센 땅을 떠나서 황량한 광야길에 들어섰습니다. 신명기 8장 1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통과했던 광야를 가리켜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이라고 했습니다. 광야는 한 마디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지금도 베드윈 족이 광야에서 목축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들은 통틀어 4만 명 미만이라고 합니다. 소수의 베드윈 족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살아갈 수는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장정만 60만이나 되는 큰 민족이 지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비옥한 고센 땅에 거주했습니다. 그곳은 나일 삼각주 동쪽으로서 농사가 잘 되었고, 목초가 풍부해서 목축하기에도 좋았습니다. 비록 강제 노역에 시달리긴 했지만 먹을 양식이나 마실 물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야처럼 밤낮의 기온차가 극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16장 3절에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양식이 다 떨어졌을 때,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1장에 보면, 광야에서 매일같이 만나만 먹다보니 애굽에서 먹던 음식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울며 푸념하기를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자손이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굽에서 지낼 때 그들은 그 같은 식물을 풍부하게 먹을 수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애굽을 떠나오자 오히려 그들은 박하고 단조로운 음식을 먹고 갈증으로 고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는 그들이 영구한 거처가 아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가는 노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를 지나는 동안 특별한 보살핌을 베풀어 주심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우선,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주셔서 양식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해 주셨습니다. 비록 만나가 단조로운 식물이지만 맛도 좋고 조리하기 편리하고 또 그 안에 건강에 필요한 모든 영양분이 들어있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을 보내셔서 내리쬐는 햇빛과 광야의 열기를 막아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을 보내셔서 추위로부터 지켜 따뜻하게 해 주셨습니다. 물을 쉽게 구할 수 없는 광야였지만,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한 사람도 굶어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았고, 그들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신이 해어지지 아니했습니다(신 29:). 이렇게 볼 때, 광야생활은 날마다 놀라운 이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산 증거였습니다.

이 광야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지상의 삶을 의미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전에 믿지 않을 때와 같이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면 안 됩니다. 마귀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람답게 이제는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때로 영적으로 타성에 젖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즐거움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지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떠나온 세상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옛 생활로 돌이키는 것은 다시금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에 속한 만나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영의 양식을 삼고, 성령의 은혜로 우리 심령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늘 담대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까지 광야 같은 인생 여정에서 영과 혼과 몸과 생활 전반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세상 유혹을 이기고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은혜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광야를 낙원으로 변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기에 광야 같은 세상에서 믿음을 지켜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또한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은혜를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그는 광활한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실로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의 자랑이나 공로로 삼지 않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먹고 마시는 것조차 주의 일로 인정받게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날과 같이 생존경쟁이 심한 때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입술로 시인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를 주셔서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앞날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할 때 이미 받았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구원은 장차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구원은 과거에 일어났을 뿐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되는 것이며, 미래까지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날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였을지라도 그 믿음이 현재까지 지속되지 않으면 과거의 믿음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과거의 믿음이 인정을 받으려면 현재 나의 믿음이 변함없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현재의 믿음이 인정을 받으려면 우리의 믿음이 미래에도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에서 중도 탈락하지 않도록 서로 신앙생활을 격려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기복이 심하면 안 됩니다. 더구나 뒤로 물러가면 안 됩니다. 제자리걸음 역시 후퇴와 같습니다. 오직 꾸준히 믿고 나가야 합니다. 방심하면 믿음이 떨어져서 실수하기 쉽습니다. 히브리서 3장 12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와 결심으로 과연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믿음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빌립보서 1장 6절에 이르기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이란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 궁극적인 구원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 곧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에 주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기 위해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결심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신실하심으로 인해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우리 믿음을 지켜주십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일상생활의 앞날도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합니다. 현대는 경제위주의 시대가 되어서 그리스도인들도 경제문제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생활도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합니다. 공중의 새들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의 피로 값 주시고 사신 그 자녀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방인처럼 염려 걱정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날을 책임져 주십니다.

요즘 한국인들을 보면 노후대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조차 노후대책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노후대책도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합니다. 이제 수능시험을 한 달 앞두고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이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수능시험도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합니다. 수험생은 수능시험을 대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 성공 출세해서 떵떵거리면서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기 위한 목적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이는 사회 진출을 앞두고 준비하는 우리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미래를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로 로마 세계를 종횡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이룩한 업적에 대한 공로를 자기의 것으로 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를 핍박하던 그를 불러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고 그 엄청난 사역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사도 바울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저와 성도님들도 동일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 광야 같은 인생여정을 지금까지 살아온 것, 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내일의 삶과 궁극적인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과 같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지금까지의 나의 삶은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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