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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 (출 33:17 ~ 19, 고후 8: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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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이 왜 교회를 반대하고 흔히 ‘안티’ 세력이 되는지 아십니까? 사회인의 교회에 대한 불만 1위는 ‘일요일에 너무 시끄럽다’(29.9%)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를 심하게 한다, 주차문제, 교통복잡, 신앙생활 특히 봉헌 강요, 가정심방 등입니다. 반면에 일반인들 절반 정도는 교회가 고아원, 양로원 방문 등 지역 사회를 위해 일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습니다(48.8%). 작년에 어느 기독교 신문이 조사한 설문의 내용입니다. 교회는 참 좋은 곳이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 루이스 팔라우(Luis Palau)는 흙의 비유를 들어 교회의 본질을 포착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거름과 같다는 것입니다. 거름을 한 곳에 쌓아두면 악취가 납니다. 그러나 땅에 골고루 뿌리면 세상을 비옥하게 합니다. 교회는 전 세계를 위한 것입니다. 교회란 모여 있기만 하면 악취를 풍깁니다. 우리만의 관심으로 살면 악취가 납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면 향기를 날립니다. 세상을 비옥하게 합니다.

  영국의 대승정이었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교회는 자신의 일원이 아닌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에서 유일한 공동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남을 위해 일하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입니다.
  출애굽기 33:19 하반절에는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받을만한 자를 아십니다. 은혜 베풀 만한 교회를 아십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에 축복의 통로가 될 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 가운데도 보면 부자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좋은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8:1에는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베뢰아교회 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에게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있으므로 세상이 좋아져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려고 세우신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에 은혜와 축복을 전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5달러짜리 쇠 한 덩이를 가지고 말의 편자를 만들면 50달러 벌고, 바늘을 만들면 5,000달러 벌고, 시계를 만들면 5만 달러를 법니다. 같은 것을 가지고 만들지만 결과의 가치가 다릅니다. 같은 마음, 같은 여건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결과는 현저하게 다릅니다. 환난이 고통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환난을 가지고 기쁨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이 옹색함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가난이 풍성함을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을 만드느냐하는 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교회는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기관입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환난이 기쁨을 만들어내고, 가난이 풍성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교회가 될 때에 세상에 은혜를 줄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첫째,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을 주십니다.

  오늘 성경 말씀 2절 상반절을 보세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환난과 시련이 그들의 기쁨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은 로마인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교회적으로는 유대인들의 난동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쁨을 가졌고, 그들의 완벽한 믿음이 입증되었습니다.

  도둑은 텅텅 빈집을 털지 않고 보물이 있다고 생각되는 집을 털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시련이 있게 하십니다. 견딜만한 사람에게 시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견딜 수 없는 시험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환난을 당할수록 더 강해집니다. 박해를 받을수록 믿음이 더 굳어집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을 당할 때에 더 강해지고 더 굳어졌습니다.

  시련에 직면한 남아프리카 목회자 앤드류 머레이는 시련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나는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하신 분이 바로 주님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 주님은 나를 사랑으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셋째, 주님은 시련을 축복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넷째, 때가 이르면 주님은 그 깊으신 뜻을 따라 나를 시련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결국 나는 지금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따라, 하나님의 보호하심 받으며, 하나님의 훈련과 연단을 위해, 하나님의 정하신 기간 동안 시련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시련이 있겠습니까?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는 이미 시련이 시련이 아닙니다.

  환난이나 시련에 대한 이런 믿음의 자세는 기쁨으로 견딜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오히려 환난이 기쁨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고후 6:10 상반절에 바울의 고백처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 슈메이커는 “크리스천에게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믿음이나 사랑도 아닌 기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은 기독교의 거대한 비밀입니다. 이 기쁨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밀입니다.

  그래서 시련은 하나님이 내린 선물입니다. 인간의 진실한 가치는 삶에 있어서 시련을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슬픔으로부터의 도피가 결코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이 여전히 닥쳐와도 구속받은 자의 기쁨을 앗아 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환난과 시련이 고통이 된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차별이 예수를 믿는 가치입니다.

  두 친구가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자 비가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처마 밑에 피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비가 그치기는 할까?” 하고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다른 친구가 그 말을 받아서 말합니다. “자네, 그치지 않는 비를 본 적이 있나?” 비는 그칩니다. 믿음의 사람은 비가 그칠 때를 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비만 바라봅니다.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영국의 시인 셸리는 “겨울이 왔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모든 구원 사역의 목적이며 구원받는 것이 무엇인지 의미하는 경험적 본질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없는 곳에는 구원도 없습니다. 우울하고 희망이 없는 세상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전달하는 은혜로운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게 하십니다.

  2절 하반절을 보세요.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은 더욱 믿음이 돋보이는 말입니다. 가난이 극심했지만 연보는 풍성했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은 금광, 은광, 선박용 나무 수출 등 수입원이 많았으나 로마에 다 빼앗겼습니다. 이 지방은 경제적이 요인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 때문에 극한 가난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가 풍성한 연보를 하였습니다.

  가난함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게을러서 가난한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일을 할 수 있는데도 거절합니다. 두 번째는 박해나 압제나 탄압에 의한 가난함입니다. 이런 경우는 노력할 수도 없고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난을 선택하는 경우입니다. 부를 누릴 수 있는 여건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위해 포기합니다. 마게도냐는 두 번째 가난함의 경우입니다.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로마에 의해 다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난이 그들의 연보를 막을 수 없었고 오히려 더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의 원인이었습니다. 이것은 역설적 사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원리입니다. 넘치는 기쁨은 환난 중에 맛봅니다. 풍성한 연보는 극한 가난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면 더 인색해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가난은 하나님께 더 풍성하게 합니다.

  “그들이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라고 한 말씀을 보세요. 풍성한 연보는 액수가 아니라 정성의 연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정성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아시지요? 예수님은 안식일에 연보궤에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이라는 작은 돈을 넣은 것을 보시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넣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런 정성이 풍성한 연보입니다. 자기에게는 풍성하고, 남에게는 인색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풍성하고 하나님께는 인색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풍성한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나타난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보세요. 성경은 이 사람을 자기에게 부한 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욕입니다. 왜 이 사람을 어리석은 부자라고 합니까? 자기에게 부하고 다른 사람에게 인색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에게 인색하고 남에게 부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은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오히려 얻지 못하고 삽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턴은 “우리 자신의 가난에 만족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그 만큼 더 가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물체에 가까이 가면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이 크게 보입니다. 가난은 자유에 이르는 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성경의 역설이 진리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연보를 잘 하는 교회들입니다. 특히 빌립보 교회는 연보에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의 쓸 것을 챙겨주고, 연보를 하여 보내주던 바울에게 가장 따뜻한 교회가 빌립보교회이었습니다. 아마 설립자인 루디아의 성품을 닮아서 그럴 것입니다. 루디아는 바울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었던 여인이었으니까요.

  연보는 헬라어로 ‘하플로테토스’입니다. 이 말은 소박, 단순, 순순함이란 뜻입니다. 봉헌의 기본 태도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음의 순수함에서 비롯됩니다. 고린도후서 9:7에 보세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고린도후서 9:5의 참 연보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인색하거나 억지가 아닌 순수함의 연보가 참 연보라는 말입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드리는 연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연보가 됩니다. 아무리 많은 액수를 드려도 순수함이 없다면 참 연보가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헌금의 규모가 아닌 희생의 규모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돈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에서 성장하는 사람의 네 가지 습관에 대해 설명합니다. 첫째는 기도의 습관입니다. 둘째는 공부의 습관입니다. 셋째는 봉헌의 습관입니다. 넷째는 친교의 습관입니다. 좋은 신앙적 습관이 좋은 그리스도인, 은혜로운 교회를 만듭니다. 좋은 연보의 습관으로 성장하는 성도,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 동인, 동신을 순교자로 만들고 교회에 감사 봉헌을 하였습니다. “두 아들을 순교자로 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봉투에 썼습니다. 목사님이 드린 감사봉헌이 1만 원이었습니다. 당시의 일반인 봉급이 80원일 때입니다. 목사님은 큰 아들 동인을 미국에 유학을 보내려고 유학준비로 모아둔 돈을 모두 바쳤습니다. 아들이 없으니 그 돈도 필요 없게 하나님이 아들을 데려가셨으니 이 돈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잃었지만 마음은 풍성하였습니다. 당시에 목사가 얼마나 재산이 있었겠습니까만 믿음이 풍성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6:10 하반절에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가난하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난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할 것을 나에게 공급하십니다. 마치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베푸실 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줄 것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결론

  토미 테니의 ‘하나님의 관점’이란 책은 참 좋은 책입니다. 그의 책에는 믿음의 확대경 이야기가 나옵니다. 확대경을 가지고 보면 하나님이 커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돋보기를 사용했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확대경 믿음이었습니다. 떠나라 하면 떠납니다. 아들 바치라 하면 아들을 바칩니다. 하나님이 커지고, 환난이 적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보려면 하나님을 가까이에 가서 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볼록거울 신앙입니까 아니면 오목거울 신앙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까이에 가서 크게 보고 삽니까, 아니면 크신 하나님을 멀리 가서 작게 만들어놓고 삽니까?

  ‘영화롭게 하다’(glorify)는 말은 ‘아름답게 하다’(beautify)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에 이 말은 ‘확대하다’(magnify)란 말이 더 가깝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확대하여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크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난과 시련을 확대하지 말고 하나님을 확대하세요. 가난을 확대하지 말고 하나님을 확대하세요. 이 때 환난과 시련이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런 은혜를 받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이런 은혜가 세상에 공급됩니다.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 기쁨을 주시고, 풍성한 연보로 세상을 풍성하게 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 세상에 희망을 주고 빛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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