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과 신앙 (히 11:1)

  • 잡초 잡초
  • 707
  • 0

첨부 1


믿음과 신앙 (히 11:1)

기독교가 갖는 믿음((belief)이해는 ‘믿음과 신앙’(faith, faithfulness)이 바로 이어진다. 이것은 신뢰가 곧 확신으로 넘쳐나야 믿음이요 신앙생활인 것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믿고 받드는 일이요 믿음직한 데가 있는 것이 신앙이다. 신학에서 신앙이란 인간이 절대자 또는 초월자로 믿고 이해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앙은 계시에 응답하는 것으로 순종하는 행위이다. 지식은 사실이나 정보 또는 진리와 상관이 있으며 인식론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말은 종교적 용어로서 성격이 한층 뚜렷함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이 둘의 차이점을 알아둘 필요는 있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구분하는 것은 위험한 이유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이 일종의 지식으로도 나타내기에 신앙행위에 이성도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지식은 양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확신 또는 그 확실성은 둘의 속성으로 단정 될 수 있음도 안다. 성서에서의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고 그 최고의 인격화는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생명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불러진다는 신약의 선언에서 이루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신앙이란 신념이라기보다는 신뢰이며 추상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은 절대 필요한 예비 단계로서 이것 없이는 진정한 종교적 체험이 나타날 수 없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최초의 깨달음일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태도임을 명확히 하여 둔다. 그리고 인간을 향하여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움직임에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신앙이 없이는 종교적 도덕적 성취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신앙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만’이라는 말(롬1;17,;5;1, 갈2;16)이 전제됨을 알게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고로 믿음의 깨달음은 깨닫고 믿는 것이 아니고 믿고 깨달음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믿음의 전제과정이 선후가 있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역사는 성령께서 사람의 심령에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필수적인 수단이 곧 말씀이 되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는 다’는 진리가 기독교의 신앙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는 그 뜻은 창조하신 의도대로 따라 사는 사람이 사람의 본분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다워야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름 한다. 이 세상에서도 사람이 사람의 구실은 사람다움에 있다는 데에 주안점이 있다.

사람다움은 인격이다. 그 인격은 믿음이 시금석이 된다. 믿음의 여하에 따라 인격이 좌우 된다. 그래서 믿을 수 있으려면 속이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진실함과 정직함의 함량에 따라 믿을 수가 있게 된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 인간관계에 마땅히 있어야 할 기본은 믿음과 의리이다. 이것은 믿음과 의리를 신의(信義)라고 말한다. 믿음과 의리가 무너지면 인간관계의 기본원리가 무너지기 때문에 사람의 구실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의 기본질서는 믿음과 의리가 중요함을 알게 한다. 이것은 ‘믿음과 신앙’이 이어지는 관계임을 알게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주어 그를 믿는 믿음과 그 은혜의 보답의 의리로 신앙하여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성서는 인간에게 기본적인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깨달음이요 이 은총에 힘입는 의리의 믿음이요 사람과의 관계도 신의의 믿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라고 한다. 단테의 작품 불후의 서사시 ‘신곡(神曲)’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의 3부로 된 이 서사시가 있는데 지옥편의 묘사는 극적인데 제9권에는 네 원으로 나누어져 배신자들을 지옥에 수용하고 있다. 제1원에는 친척을 배신한 자들, 제2원에는 조국을 배신한자들, 제3원에는 주인을 배신한자들, 제4원에는 은인을 배신한자들이 지옥에 수용되어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인간의 죄 중에서 배신의 죄가 최고의 죄라고 한 점에 유의하게 된다.

세상에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처럼 분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를 담당 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에 상응하는 의리도 없이 배신한다고 생각하면 오늘의 우리가 믿는 믿음 이대로 되는가? 하고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가 믿는다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행위와 그 신앙에 많은 문제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믿음의 행위와 참다운 신앙인은 누군가하고 생각해 본다.

나는 우리 곁에 늘 함께 있어 따가운 광야의 소리로 이 시대를 놀라게 한 여해(如海) 강원용 목사를 생각한다. 그는 이 시대를 살다간 큰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보여주신 분이라 생각한다. 그의 ‘신앙 에세이’ “믿는 나 믿음 없는 나”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와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나를 깨닫는 가운데 ‘믿음 없는 나!’ 라고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다. 이어서 ‘신앙생활이란 현실과 목표 사이의 긴장관계,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놓는 다’고 말한다. ‘믿음이란 손에 낀 반지 같은 것이 아니다. 신앙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 일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나의 신앙고백은 아직 완결되지 못한 진행형이다’ 고 고백한다. 그는 믿음 없음을 늘 통회하신 분이다.

믿음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야 함으로 일깨운다. 그의 신앙은 항상 하나님이 누구인가 보다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그 시대적 양극화의 갈등과 회복을 위해 진솔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십자가의 의리를 생각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역사 속에서 십자가의 사도로서의 그 믿음의 삶을 보는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 비기독교도의 선교문제, 배타주의, 남과 북의 화해, 우리문화에 맞는 복음으로서 토착화와 상황 화 등은 오늘의 사회현실을 믿음으로 채우려는 그의 신앙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 여기서’(now and here)라는 슬로건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 말씀이 되도록 하는 그의 신앙이 오늘의 우리시대에 한 신앙인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가 설교를 할 때 검은 가운을 입는 이유로 형식이라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리고 목사가 예배 시에 가운을 벗고 해도 상관은 없지만 입지 않으면 설교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어떻게 감히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검은 보자기를 쓰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고 겸손의 모습도 보게 한다. 그리고 말한다.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으니 받들어 전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점에서 그의 솔직한 인간의 한 편모(片貌)로 “믿는 나 믿음 없는 나”의 신앙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진실한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신앙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재능이나 노력이나 업적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에 유의하게 한다.

그러므로 참 신앙인은 자기의 믿음 없음을 보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믿음,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가? 생각하게 한다. 교회 안에서 속된 세상과 담을 쌓고 교회주의에 젖어 열광을 들어내는 극열한 교인이 되면 그를 당장(當場)에 믿음이 넘치는 자로 인정한다. 그 믿음은 오늘의 사회가 잘못 되어 가는 것을 보고도 불한당을 만나 쓰러진 이웃을 보면서도 거기에는 외면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한다. 성령 충만함으로 신유, 만사형통, 목적달성의 성취욕, 물질축복만을 능사로 알고 그런 사람들로 교회가 넘쳐 남은 무슨 연고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에서 멀어져가는 이유를 알게 하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라면 어떤 태도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사람을 대할 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 그리고 이웃과 나와 사이에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서는 믿음이요 가장 근원적인 원리인 믿음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믿음은 서로 속이지 않는 것이요 상호신뢰 하는 것이요 서로 믿고 나누는 것이다. 오늘의 사회에 불신 풍조가 만연한 이유는 서로의 신뢰하는 믿음을 잃은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불안하고 불행해 진다. 이 세상에 불신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세상만사가 서로 믿지 못하면 모든 관계는 무너지고 만다. 오늘의 이 시대는 믿음이 없는 시대이다.

누가 이 믿음이 없는 시대에 믿음의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B.C 9세기경에 폐니키아(Phoenicia)인에 의하여 세워진 카르타고(Carthago)는 상업도시로서 번영하여 신흥로마세력과 충돌하여 포에니(Poeni)전쟁을 거쳐 B.C.146년에 로마에 멸망 하였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수백 년 동안 싸웠다. 이 기간에 일어 난 전쟁사에 아름다운 미담을 소개한다. 로마의 유명한 장군이 카르타고군에 포로로 잡혀있어 사형의 일정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때 로마의 장군은 카르타고의 군대에게 사정을 말한다. ‘나를 로마에 잠간 갔다 오도록 해 달라 본국에 가서 왕과 부모처자와 친구를 만나보고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겠다. 그 때에 나의 목을 베어라’ 카르타고의 군인들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너는 우리가 바보인 줄 아느냐. 너는 우리를 속이려고 한다. 네 말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사실 그 말은 믿기가 어려운 말이다. 그때 다시 로마의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여러분들은 내 말을 믿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믿기가 어려운 말 인줄 안다’. 로마의 장군은 또 이어 이렇게 애걸한다. ‘확실하게 말하지만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것을 약속한다. 나는 이 자리에 돌아와서 처형을 받겠다. 하나님 앞에 맹세한다. 나는 죽어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모든 로마인의 명예와 양심을 걸고 돌아 올 것을 약속 한다. 내 말을 믿고 나에게 로마를 다녀 올 기회를 한번만 달라’고 애원 하였다. 그 장군의 얼굴은 엄숙했고 표정은 진지했고 말은 힘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거짓말이 아닌 듯싶었다.

군인들은 장군의 진지한 말과 표정과 태도에 감동을 하여 어느 날까지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로마로 갈 것을 허락받았다. 그는 로마에 귀국해서 왕과 부모처자 친구들을 모두 반갑게 만났다. 그리고 왕에게는 적의 병력과 군사에 관한 정보를 모두 제공하였다. 그리고 카르타고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모두가 죽을 자리로 간다는 말에 이를 말렸다. 그러나 이 장군의 약속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내가 만일 돌아가지 않으면 카르타고 사람들은 모든 로마인을 향하여 거짓말쟁이라고 할 것이다. 나 하나가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 로마의 명예와 신뢰에 관계되는 일이다. 카르타고와 약속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고 만류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국과 부모처자와 친구들을 멀리하고 카르타고로 갔다. 카르타고의 사람들은 그의 용기 있는 믿음에 감동했고 그는 약속대로 처형했다. 그 후 카르타고 사람들은 로마사람들의 신뢰에 대해 로마사람들을 인간보증수표처럼 여겼다. 이후 로마가 장사 거래를 할 때에도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말이 곧 계약서요 말이 곧 보증수표이다. 당시 ‘나는 로마인이요’라는 말은 ‘로마인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요’라는 말이 통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신뢰회복은 믿음을 낳는다. 이렇게 신뢰하기까지 믿음은 십자가의 의리가 따른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믿음은 믿게 하는 행위인 신뢰회복으로 믿는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관계는 정직과 진실에서 믿음이 생긴다. 이 기독교의 믿음과 신앙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알게 한다. 십자가 없는 믿음은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다. 이것이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