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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 아니하실찌라도”의 신앙 (단 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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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니하실찌라도”의 신앙 (단 3:16~18)

1. “ 그렇기 때문에” 신앙

어느 교회의 한 집사님이 계셨는데, 이 집사님은 그 교회의 모든 일에 헌신하여 최선을 다하는 분이었습니다. 전도 모임에 가면 거기서 열심히 전도하고 계시고, 기도 팀에 가면 거기서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 팀에 가면 거기서 열심히 음식 준비하고 계시는 등, 모든 일에 빠짐없이 최선을 다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교회 전도주일이 있었는데 이 집사님도 상당히 많은 분들을 전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자마자 이 집사님이 전도한 분들을 새가족 부원들에게 맡겨두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알고 보니 주방에서 열심히 땀 흘리면서 봉사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식사 당번도 아닌데 말이죠. 그러다가 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분이 전도해 온 분들이 어쩌다 보니까 새가족부실에도 식당에도 오지 않고 그냥 다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새가족부원들이 너무 바빠서 이 집사님이 전도한 분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이죠. 그러자 화가 난 이 집사님은 새가족부원들과 다투고 말았습니다. 마침 그 장면을 담임 목사님이 보게 되었고, 집사님은 목사님에게 자신의 사연을 하소연하면서 새가족부원들을 비난했습니다. 집사님의 말을 듣고 계시던 목사님은 고개만 연신 끄덕이다가 별 다른 말씀을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목사님으로서는 어느 누구의 편을 들 수가 없었고, 자신이 식사 당번이 아닌데도 자신이 초청한 사람들을 두고 식당으로 간 그 집사님 탓도 있는 것 같고 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일 지난 주중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던 이 집사님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 다음 주일에도 이 집사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친한 분들이 심방을 해보니 ‘목사님도 교회도 다 싫다’면서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요? ‘목사님이나 교인들이 자신의 수고와 헌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다 잡은 영혼들 놓친 새가족부원을 목사님이 야단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 목사님이 칭찬 한 마디 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가진 욕구 중에 가장 강한 것은 먹고 자고 싸는 등의 생리적인 욕구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강한 욕구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인데요. 아이들은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고, 아내는 남편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 남자는 직장과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실력을 키우며, 그 결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인정받고 칭찬을 받고 싶은 욕구는 잘못 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집사님처럼 ‘내가 얼마나 수고하고 헌신하고 희생했는데 ․․․’, ‘내가 얼마나 사랑하며 섬겼는데 ․․․’, ‘그것을 몰라주다니’, ‘그것을 상주지 않다니‘하는 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정과 칭찬의 욕심이 지나치면 그것이 그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수 있고, 주님께 도전하는 것이 될 수 있고, 그의 영혼에 심각한 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 모두가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 인정, 칭찬, 나아가 보상을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정, 칭찬, 나아가 보상을 바라는 것이 신앙생활의 동기와 목적이 되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수고하고 희생한 대가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 설사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 후대에라도 하나님이 상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죠. 또 어떤 경우는 처음부터 보상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지만, 열심히 수고하고 애쓴 다음에 은근히 보상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별로 수고를 하지 않는 중에 자신이 더 수고하고 헌신했을 경우에 주님이나 교회로부터의 어떤 보상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들과 내가 똑 같아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을 하는 경우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신앙 자세의 이름을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내가 수고했기 때문에’, ‘내가 남보다 더 충성했기 때문에’, ‘내가 죽도록 헌신했기 때문에’, ‘내가 헌금했기 때문에’, ․․․. 그래서 어떤 보상이나 주님의 복을 바라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적인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 해 오시고, 많은 세월을 살아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늘 그렇게 수고하고 헌신했다고 그 보상이 그대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가정이나 직장에서, 그리고 작게는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최선을 다한 후에, ‘내가 이 정도 했으니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이런 저런 상을 주세요’라고 바라기도 했고 또 그렇게 기도도 해왔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된 것보다는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태도, 즉 인정받고 칭찬을 바라는 것은 어릴수록 더 강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일수록 기대도 좀 덜하고 그렇게 되지 않아도 실망도 덜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여러분들이 도달해야할 성숙한 신앙의 자리는 이러한 “그렇기 때문에”의 신앙이 아니라, 오늘 본문이 말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신앙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2. “그리 아니하찌라도”의 신앙

주전 612년, 중동의 강국이었던 앗수르가 멸망하고 새로운 강자 바벨론이 패권을 잡았습니다. 주전 605년, 바벨론은 나보폴라살의 아들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면서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그는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격파하고 유다로 침공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사로 잡아갔습니다. 이때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나라를 잃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유대인들은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이국땅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주전 605년에 바벨론의 왕이 되어 주전 562년까지 재위했는데요. 느부갓네살은 똑똑하고 유능한 피지배국 청년들과 귀족들을 사로잡아가서 그들의 두뇌를 이용할 뿐 아니라, 바벨론에 대하여 반대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봉쇄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철저히 바벨론화시켰습니다. 바벨론의 사상과 문화와 학문을 배우게 했을 뿐 아니라, 바벨론의 신들을 섬기도록 강요했습니다. 이것은 사로잡아간 사람들 뿐 아니라 제국 내의 전 민족과 부족들을 바벨론화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느부갓네살은 금 신상을 부어 만들고 ‘두라’ 평지에 세웠습니다. 이 신상의 높이는 약 27m이며, 넓이는 2.7m였습니다. 그리고는 전 제국을 향해 선포하기를 ‘누구든지 이 신상을 숭배할 것이며, 여기 엎드려 절하지 않으면 즉시로 극렬한 풀무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왕과 바벨론 정부는 이러한 정책을 통하여 중동 지역을 지배하면서 타민족들을 종교로 통합흡수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정책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 민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유대인들이었는데요. 다른 모든 민족들은 바벨론 제국에 통합이 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유대인들은 아주 지독한 신앙 때문에 바벨론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3장 8절에 보면 바벨론 사람들이 ‘유대인을 참소하였다’고 합니다. 이 ‘참소하다’는 말은 ‘먹다, 삼키다’는 뜻으로 바벨론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멸절시키기 위하여 계획적인 모의를 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악의에 찬 도모 가운데 하나가 신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절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악법을 통해서 바벨론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 그 가운데 “씰데없이” 신앙 때문에 전부를 포기하려는 유대인들을 없애버릴 참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유대인들 가운데 특히 근래에 왕의 사랑을 받고 있던 도지사급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온 세상 만물과 인간이 절하여 경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들은 그 신상에게 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연히 그들은 체포되고 고소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형 방법은 예고된 대로 풀무불에 던져져서 화형을 당하는 것이었는데요. 풀무는 금속을 용해하고 제련하는 용광로를 말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직접 혹은 화면으로 제철소의 뜨거운 쇳물이 흘러내는 장면이나 뜨거운 용광로를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정책을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을 벌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무튼, 느부갓네살 왕은 신상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을 어긴 것에 대하여 크게 진노하여 그 세 사람을 끌어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주 뛰어난 젊은이들이라는 것을 안 그는 ‘이제라도 엎드려서 금 신상에 절을 하면 용서해 주겠지만,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로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넣겠다’고 회유 반 위협 반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아주 단호하게 왕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해서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 넣으십시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께서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능히 건져낼 것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다시 말해서 ‘우리를 건져주지 아니하여서 불에 타 죽을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겠다’고 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과 그 고백은 오늘의 성도들에게 정말 깊은 신앙적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 위기를 벗어나게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뜻입니다. 즉 자신들이 풀무불 속에 던져져서 그들의 몸이 용광로에 녹아 산화되어 버리는 한이 있어도 바벨론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 말의 의미는 ‘자신들의 소중한 것을 다 잃더라도 이 신앙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생명, 자신들의 젊음과 그 멋있고 아름다운 육신, 가족, 명예, 사랑, 물질까지 다 잃더라도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겠다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앙 생활하다가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다가 모든 것을 다 잃고 마지막에 생명을 잃고 난 후에, 누구하나 자신들을 알아주지 아니해도, 아무런 칭찬이 없어도, 이 기특한 삶에 대한 상급이 없어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이름이 남지 않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버린다 해도,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하는 신앙인 것이죠.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다니엘의 세 친구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16절에 보면,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상 숭배는 우리로선 아예 논할 필요가 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 그럴 마음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우리에게 강요하려고 꿈도 꾸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왕의 입만 아플 것입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요청을 한마디로 잘라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삶과 인생을 주관하시는 근거와 능력으로 하나님 외에는 생각도 아니 꿈도 못 꾸는 자들이었습니다. 단순하고도 온전하게 하나님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음을 믿고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 있고 죽는 것이 낫다고 믿는 자들이었던 것이죠.

이것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주는 위대한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거나 바꾸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과 이 신앙으로 인한 수고가 조금 있다고 한들 그것 때문에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 역시 이들에게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그 끝에 어떤 보상이나 복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죠.

아,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상을 바라고 복을 구하는 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태도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보상을 바라고 복을 바라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거저 주님을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한 결과 주님이 상을 부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지 보상이나 복이 동기가 되고 목적이 되는 그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주는 태도처럼 보상이 없고, 복이 없고, 응답이 없을지라도 그래도 주님을 위하여 여러분의 전부를, 생명까지도 버리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더 성숙한 신앙의 자리로 나아가야 ․․․

마더 테레사 어록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풀어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워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워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행복하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것을 주어라.

이것은 인간관계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삶에 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그러므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수고, 헌신, 희생, 헌금과 헌물, 때로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 그리고 남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애쓴 것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가가 없거나 아니 도리어 잃고 빼앗기고 아프고 상처 당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기뻐하면서 하나님 앞에 의연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숙한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오늘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의 신앙이 이러한 자리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의 신앙! 죽도록 수고하고 충성해도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을지라도 그에 대한 생각이나 미련을 두지 않는 것,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감사해요!”의 신앙이 여러분의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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