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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후 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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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고후 4:7-15)

제가 미국에 살고 있을 때 갓 유학 오신 어느 전도사님 부부가 있었는데 그 집의 새 살림살이 장만하는 쇼핑을 하기 위해서 월마트에 함께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의 사모님께서 그날 사려고 하신 것 중에 하나가 도자기 그릇 세트였는데 그것만큼은 어떤 특별한 브랜드를 찾고 계셨습니다. 마침 그 제품이 있어서 사게 되었는데 바로 '코렐(Corelle)' 회사의 그릇 세트였습니다.
  눈치를 보니까, 그 사모님께서는 그 코렐 그릇을 꼭 장만하고 싶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내시다가 미국 월마트에서는 훨씬 싸니까 아주 행복해(?) 하면서 사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 집 부엌에 있는 밥그릇과 국그릇들도 바로 그 코렐사 제품인 것 같아서 나중에 집에 가서 확인해 보니까 역시 맞았습니다.

  우리 부부가 결혼할 때 처가 쪽 어느 친척 집안에서 선물해 준 것이었는데, 물론 저는 그 당시에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 그릇인 줄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그 사모님 덕분에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 그릇들은 신혼 때부터 그때까지 거의 20년이 다되도록 쓰고 있는데, 그동안 제 기억으로는 부엌 바닥에 떨어져서 깨어지거나 그릇 가장자리에 이가 빠진 것 하나도 없이 참 잘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주부들은 이런 좋은 그릇들을 쓰고 있지만, 옛날 사도 바울 때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질그릇'이란 것은 '코렐' 같이 예쁘고도 튼튼한 그릇이 아니라 조잡하고 깨어지기 쉬운 싸구려 그릇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위시한 모든 신자들의 인생 자체를 그런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자의 인생이 잘 깨어지거나 싸구려로 끝나는 것은 또한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그릇은 결국에는 '보배'를 담은 그릇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원래는 질그릇 같이 약하고 무가치한 인생이 과연 어떻게 튼튼하고 귀한 그릇으로 쓰이게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죽음의 각오를 할 때 약한 질그릇 인생이 깨어지지 않는 튼튼한 그릇이 됩니다.

  본문 7절에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보배"란 바로 앞의 6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복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최고의 보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원래 보배는 튼튼한 용기에 보존합니다.
  현금이나 금덩어리 깨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은행의 개인 금고 따위에다 안전하게 보관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누구나 죄 용서받고 영생할 수 있는 이 보배 중의 보배는 '질그릇'에 담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 귀중한 복음을 받고 간직하게 된 사람이라는 존재가 바로 질그릇처럼 취약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 믿는 신자라 해도 그 본성은 여전히 '죄인'이라는 지극히 불안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 해서 세상 사람들과 달리 특별히 표 나게 잘나 보이는 것도 없고 목사라 해도 강단에서 내려오면 보통 사람과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다 여전히 '못난 것, 약한 것' 많은 인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 그런 목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맡겨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질그릇에 담긴 보배'처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고 격에 맞지 않는 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질그릇 같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이 귀중하기 짝이 없는 복음의 보배가 저장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깨닫게 될 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결코 그 복음을 간직하고 있는 본인에게서 나오거나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복음의 창시자는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복음이 전파되고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 역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될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할 줄 알게 되면, 이 질그릇 같은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간직하고 전파하는 데에 아주 잘 쓰이는 튼튼하고 좋은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신자 역시 연약한 죄인이며 약점투성이의 인생임에는 변함없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입게 되면 이 세상 어디에 떨어져도 절대 깨어지지 아니하는, 아주 내구성 좋은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간증하는 체험이 그것입니다.
  8절에서 10절까지에 기록하기를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질그릇 같이 취약한 전도자들이 당하게 되는 위험들을 여러 가지로 언급합니다.
  그 그릇은 정말 온갖 방법으로 테스트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단의 신자들을 완전 포위하고 도무지 빠져 나갈 길 없는 사면초가로 몰아붙이면서 일견 질그릇처럼만 보이는 전도자들을 시험해 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노력은 오히려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옴짝달싹도 못하고 그저 깨어지고 말 지경처럼 보이는데도 마치 무슨 초능력이나 쓰는 것처럼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시험당할 때에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적 초능력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신자들도 세상에서 정말 난처한 일, 진퇴양난의 속수무책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끝까지 신자는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불신자들은 그저 목매어 자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라도 신자들은 쌩쌩한 정신력을 유지하고 버텨내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라고, 사도 바울은 점점 더 톤을 높이고 있습니다.
  질그릇으로서는 당장 깨어질 수밖에 없어 보이는 강력한 충격의 핍박을 당해도 신기하게도 그것이 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질그릇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아군의 전투기 조종사가 적지에서 격추되어 낙하산으로 탈출하면 절대로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합니다.
  동료 전투기가 그 주위를 엄호 사격하고 헬기와 특수 구조대원들까지 동원하여 그 조종사를 구출해냅니다.
  왜냐하면 아군 중에서도 전투기 조종사는 특별히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불신 세상에 포위되어 핍박받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소중한 군사를 절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엄호하시며 끝내 구출하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분명히 죽여서 땅바닥에 거꾸러지게 만들어 놓았는데도 신자들은 금세 툭툭 털고 제 발로 또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4장 19절에 보면 루스드라에서 사도 바울이 바로 그와 꼭 같은 체험을 했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보았다면 무슨 불사신처럼 여겨졌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자기네들이 산산조각을 낸 질그릇 조각들이 다시 들어맞아 붙게 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들은 불신자들이 볼 때 오싹한 느낌이 들 정도로 놀라운 재활의지와 재생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처럼 특별히 '강화(reinforce)'된 존재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질그릇인데, 이게 보통 질그릇이 아닌 것입니다.
  도무지 세상이 어떻게 넘어뜨리고 불신자가 어떻게 낙심시킬 수도 없는, 정말 '건드릴 수 없는'(untouchable) 질그릇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강될 때, 하나님께서 결코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심을 철저히 의지할 때, 원래는 그처럼 취약했던 우리가 이처럼 기가 막히게 강력한 질그릇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질그릇이 깨어질까봐 걱정만 하면 정말 끝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담을 수도 없고 그저 가만히 제자리에 놔두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인이라 하면서도 좀 열심히 교회봉사하면 내 인생 재미있게 사는데 방해가 될까봐, 좀 정성껏 헌금하면 내 재산 손해 볼까봐 걱정만 하면서 아무 것도 못하는, 그냥 선반 위에 고이 놓여 있는 질그릇들이 교회 안에 참 많습니다.
  질그릇에 무슨 장식용 가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한 사업 위해서 충성하여 섬기는 일에 자기 인생을 바치려 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교인은 하나님 눈에 아무 매력 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차피 비싼 것도 아닌 질그릇이니까 '깨어질 때는 깨어지더라도 일단 마음 놓고 쓰고 보자.'라고 할 때에는 오히려 그 효용성이 최고로 발휘됩니다.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산다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 죽인 것"이라고 번역된 말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의 죄'를 나누어 가진다는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의 죽으심'이라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즉 복음을 위하여 충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과 '핍박'과 '거꾸러뜨림'까지 당할 때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하신 일을 꼭 같이 겪게 되는 것이라고 오히려 황공스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충성하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깨어지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쓰시는 그릇을 어떻게 실수로 당신의 손에서 미끄러져서 바닥에 떨어져 깨어지게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신자가 정말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각오를 하고 따라가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철저히 강화해 주시며, 그렇게 된 질그릇은 아무리 불신자가, 세상이, 사단이 건드리고 던지고 깨뜨리려고 해도 끄떡하지 않는 아주 튼튼한 질그릇으로 쓰이게 되는 것을 깨닫고, 이 평화시대에 오직 순교의 자세로 자신의 온 몸과 전 생애를 복음전파의 사명에 아예 완전히 내던져 바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 영생의 믿음을 소유할 때 값싼 질그릇 같던 인생이 최고의 보배를 담은 귀한 그릇이 됩니다.

  11절과 12절에 "11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쓰이는 그릇 속에는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신자가 예수님 제대로 따라가면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죽음의 십자가 고통을 같이 겪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 또한 더욱 확실하게 간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문맥에서 볼 때 12절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원망하는 투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한다"라는 말이 '나는 고생만 하고 좋은 것은 너희들에게 다 돌아갔다.'라는 식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자들 자신에게는 십자가의 고난이 따르지만 그 결과 남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 줄 수 있게 되었다고 보람되게 여기면서 하는 말입니다.
  물론 그 생명이란 바로 부활과 영생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생명을 자기가 믿고 소유하고 있었던 까닭에 자신은 "죽음에 넘기움"을 당하는 고난까지도 넉넉히 감수할 수 있었고, 바로 그 영생부활을 남에게 전해 준다는 뿌듯한 자부심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던 까닭에 복음 전파 사명을 위해 전적으로 희생하며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그 부활 생명에 대한 믿음을 재차 강조합니다.
  13절 이하 15절에 "13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14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15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라고 한 것은, 시편 116편 8절부터 10절의 말씀 즉 "8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셨나이다 9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0a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 시편 기자는 부활의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대로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고 선포했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와 꼭 같은 부활 신앙 즉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도 "또한 말하노라"고 했던 것이며, 바로 그 믿음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날마다 전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평생 한번 겪을까 말까한 위험들을 밥 먹듯이 통과했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끝까지 인내하고 견디어 내었으며 때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도 체험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도 바울도 언젠가는 피할 길 없는 죽음을 맞게 될 것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제 명대로 살게 될지 하나님께서 그를 순교의 제물로 받고자 하셔서 일찍 데려 가실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에게도 최후의 순간,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최악의 때가 언젠가는 어차피 닥쳐올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때가 와도 여전히 태연자약할 자신이 만만했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와 함께"라는 말은 '예수님처럼' 혹은 '예수님의 공로에 의해서'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그는 예수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을 증거하면서 살기만 하면, 어떻게 죽든지 간에 결국에는 영생부활로 다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라는 말은, 그 부활이 바울뿐 아니라 그가 전도해서 '같은 예수 생명의 믿음' 얻게 한 신자들 전체에게도 한 사람 빠짐없이 다 임하게 될 것을 믿고서 하는 말입니다.
  즉 부활신앙을 공유한 신자들만이 저 영원불변의 신앙공동체, 저 영원부동의 새 예루살렘인 천국교회에 입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교인이라 해도 부활신앙 없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저 영생부활의 자리에 예수님 앞에 서게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부활신앙을 믿고 충성하는 신자에게만 "은혜가 더하여지고" "감사가 넘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존재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고 한 것처럼 오늘날의 저와 여러분들도 바로 '그렇게 믿고 또한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왜 전도합니까?
  왜 설교합니까?
  왜 말합니까?
  그냥 입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믿기 때문에 전도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에 설교합니다.
  천당의 영생을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전도하지 않고도 도무지 입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 없는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다 전도자가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합니다.
  꼭 선지자나 사도 뿐 아니라, 꼭 목사나 신학자가 아니라 해도, 바로 이 '같은 믿음'만 자기 심령의 그릇에 담고 있는 신자라면 그 누구나 바로 그 '같은 부활 신앙'에 의하여 충동을 받고 전도와 선교에 자기 생을 바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노후 보장을 준비하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은퇴 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다들 미리 생각하고 마련해 두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이처럼 사회보장 제도에 의존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영생의 보장을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양로원이나 실버타운 따위만을 예약해 놓고 살지만 우리는 영생하는 천국 회원에 다 가입되어 있고 하늘 아버지의 집에 제각기 자기 방이 벌써 지정되어 있고 결국 거기서 다 같이 다시 만나 영원히 살게 될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는 구석'이 확실해야 합니다.
  이 부활의 믿음이 꼭 있어야 우리는 정말 가치 있는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신앙이라는 최고의 보배를 내 마음에 간직해야 우리는 질그릇일지라도 보배 그릇 같은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은 사람의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물은 손바닥에 담아 보관할 수 없고 그것을 담는 그릇, 즉 어떤 용기(容器)가 있어야 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사막에서 물도 귀하지만 그 물을 잘 보존하는 가죽부대 역시 귀중합니다.
  그것 없이는 물을 휴대할 수도 없으며 필요할 때마다 마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양심을 바로 그런 소중한 용기(容器)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박사나 대통령이나 재벌 같은, 세상에서 소위 '비까번쩍하는' 그릇들을 그런 용도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오직 참된 신자의 심령 속에만 이 귀중한 부활신앙, 천당영생신앙을 담아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마실 수 있게 해 주는 그릇처럼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인 중에서도 아무리 세련되어 보이고 잘 치장된 고급 그릇처럼 보여도 그 신앙양심에 이 영생부활이 없다면 그 역시 사실은 여전히 아무 가치 없는 질그릇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사실 이 세상사회에서 그리 '귀중한 그릇'이라 할 만한 존재가 못 되었습니다.
  실로 우리가 부름 받았을 때의 상태는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한' 형편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일단 우리가 부활신앙의 '지혜'를 담고 천당영생의 '능력'을 입게 되면 오히려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가장 귀중한 존재, 최고의 영적 상류사회사람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질그릇 같던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잘 받아서 귀히 간직함으로써 그 주님의 손에 그야말로 '최고급 그릇'으로 쓰임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릇이 비어 있을 때에는 그릇 만들어진 재료에 따라 그 이름이 불리게 됩니다.
  유리로 만들어졌으면 유리그릇이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으면 플라스틱그릇이고 금으로 만들어졌으면 금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릇에 무엇이 담기게 되면 그 담긴 내용물에 따라서 그 그릇을 지칭하게 됩니다.
  밥이 담겨 있으면 밥그릇이요 국이 담겨 있으면 국그릇입니다.

  질그릇이란 이름은 아직 무엇이 담겨져 있지 않을 때 그 만들어진 재료에 따라서, 즉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 이름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별로 예쁘지 않은 그릇,' '잘 깨어지는 그릇,' '싸구려 그릇'이란 생각만 연상될 뿐인 그릇입니다.
  하지만 그 약하고 무가치한 질그릇이라 해도 일단 그 안에 보배가, 그것도 세상에서 최고의 보배가 담기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질그릇'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보물 단지'라고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영접하기 이전의 모든 인생은 사실 질그릇일 뿐입니다.
  인생이란 일단 하나님 앞에서 판단해 보고 달아 보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참으로 연약하고 무가치한 죄인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딴에는 자기가 질그릇이 아니라 유리그릇이나 쇠그릇 정도는 된다고 자신하거나, 혹은 정말 무슨 금은그릇이나 되는 것처럼 우쭐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인생의 가치는 오직 그 그릇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이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과연 무엇을 담고 있는 그릇이 되어 있습니까?
  자기 욕심만 가득 담고 있는 그릇, 자기 교만만 가득 차 있는 그릇 - 정말 X그릇 인생인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딴에는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줄 알고 교회에서 다른 교인들 눈앞에 꽤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는 줄로 착각하고 폼을 재고 있지만, 실상은 아예 속이 비어 있는 질그릇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되어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참된 부활신앙을 담은 그릇,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껴 주시는 귀한 그릇, 또한 바로 그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몸을 완전히 내어놓고 쓰이는 그릇, 그래서 어떤 시험이나 환난에도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 그릇 - 저와 여러분들은 원래는 다 '질그릇'들이었지만 바로 이런 주님의 '보물단지'가 되어야만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입고 복음사명을 위하여 담대하게 자기 몸을 바치는 신자, 자기 속에 담겨 있는 영생부활의 믿음으로써 진실하게 증거하는 신자 - 그래서 사단이 결코 건드리거나 깨뜨리지 못하는 '튼튼한 그릇,'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영원히 아름답게 빛나는 '귀중한 그릇'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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