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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황무지를 옥토로 경작하라 (창 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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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를 옥토로 경작하라 (창 2:4-17)

지난주에 우리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주셨던 그 다스림의 권한을,
죄악으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빼앗겼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다시 다스리는 권한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을 대하여 명령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선포하고 나아갈 때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다스림의 또 다른 차원인 “경작하는 삶”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본문 창2:4-6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이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땅을 간다는 것은 노동과 수고를 통해서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하고 경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역 성경에는 땅을 간다는 말을 경작한다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 NIV에는 "There was no man to work the ground"
Living Bible에는 “nor was there anyone to farm the soil”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땅을 일구는 것이나 농사를 짓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비록 땅은 비옥했을지라도 그곳에 아직 그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초목이나 채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이제 이 흙은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람은 다른 수많은 피조물들과는 사뭇 다른 존재였습니다.
우선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또 다른 의미에서는 아직 황무한 땅을 옥토로 개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세상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창조적인 행동을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온도계와 같이 세상에 영향을 받으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온도조절계와 같이 세상에 영향을 주며 변화를 주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선포할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스림의 통치권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완되어야 합니다.
즉 변화와 영향을 주는 삶은 우리의 수고와 노동과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단순히 명령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때로 사단의 권세에 대해서 대적하고 명령해야 하지만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우리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런 생명의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그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가를 치르고자 할 때
거기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구원하고 또 우리 교회로 인도한다고 할 때에
이것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귀한 대가를 치르고자 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노력도, 수고도 없이 전도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나요?

사실 전도는 어떤 기술이 아닙니다. 은사가 아닙니다.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가?
이것이 전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흘리는 눈물과 땀과 피는
값지고 위대한 것입니다.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값을 치러야 합니다.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한 수고의 바탕 위에서 우리의 가정도, 직장도, 지역사회도
서서히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농부가 있습니다.
한 농부는 기름진 땅을 소유하고 있어 무엇을 심든지 잘 자라납니다.
열매가 잘 맺히고 늘 풍성한 수확을 거둡니다.
그런데 다른 농부의 땅은 정반대입니다.
땅이 황폐하고 양분이 없어서 식물이 잘 자라지 않습니다.
비옥한 땅을 가진 농부는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황무한 땅을 가진 농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에 찌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땅 때문에 이들의 마음에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황무한 땅을 가진 농부는 갈수록 운명적인 삶의 자세를 가집니다.
부정적이고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원망과 불평의 마음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아가고 싶은 의욕이 상실되고
‘열심히 수고해도 소용없어’라는 생각만 갖게 됩니다.
그리고 ‘조상으로부터 좋은 땅을 물려받지 못한 탓이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이런 식으로 살아갈까요?
어떤 농부는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는 황무한 땅을 바꾸어 보려고 시도합니다.
황무한 땅이므로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없지만,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연구하고,
지혜를 짜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고, 땀을 흘려가며 수고를 합니다.
땅의 성질을 파악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또 그 땅에 늘 심던 작물이 아니라,
혹시 그 땅에 맞는 다른 농작물이 있는지 새로운 시도를 해 봅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땅에 맞는 작물을 발견하게 되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도 됩니다.

1991년 YWAM에서 파송된 두 형제가 몽골로 선교를 위해 떠났습니다.
이들은 그곳에 살면서 그곳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그들은 몽골 사람들은 평균 수명이 40세를 넘지 못했으며,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죽을 만한 어떤 신체적인 증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문제가 몽골 사람들의 식생활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식이 육류입니다. 채소를 먹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몽골 사람들이 사는 땅은 고원지대여서 짧은 여름에만 푸른 색깔을 볼 수 있고,
대부분의 시기에는 황무한 고원뿐입니다.
일년 중 3분의 2가 내내 추운 날씨여서 그 땅에서는 채소를 재배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채소가 부족하고 육류만 먹는 생활 패턴이 그들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는 그곳에서 채소를 심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비닐하우스를 통하여 채소를 심고 자라게 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했습니다.
대부분이 회의적이었지만 이들은 시도했습니다.
결국 아들의 비닐하우스에서 채소와 과일이 자라나고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은 몽골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온 나라가 떠들썩해지고, 국영 TV가 이를 방영하고, 각 부처의 장관들이 방문하였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황량한 고원지대에서는 채소가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기에
더 이상의 새로운 비전을 갖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선교사는 비전을 갖고 이루었으며,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결코 환경에 이끌려 살거나, 주어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변화를 주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경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우리 주변의 형편과 사정이 어렵다고
한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불평과 원망만 하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주변 환경은 척박한 황무지와 같을지라도
우리는 그 땅을 개간하고 그곳에 거름을 주고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땅을 옥토로 바꾸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창2:15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그 땅을 경작하기를 원하십니다.

‘경작하라’는 것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변화를 주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는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며 새롭게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삶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인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 속에서 경작해 가야 할 영역은 너무나 많습니다.
잘 경작된 기름진 땅보다는 황무지가 더 많습니다.
열매를 내기에는 황무하고 황폐해진 땅들이 많습니다.
단지 자연을 변화시키는 농부의 입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 경제, 교육, 매스 미디어, 예술, 가정, 과학기술 등등 모든 분야를 포함합니다.
불의와 불공평으로 이루어진 어떤 조직 구조와 시스템도 말합니다.
그것은 개인과 가정은 물론, 공동체, 도시, 지역, 족속, 나라를 포함합니다.
우리 가족들은 이런 모든 분야에서 경작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믿습니까?

이렇게 경작하는 사람은 그 땅이 황무지라도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옥토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연구하고 일하고 수고할 것입니다.
문제로 인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해결책을 모색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세워, 나라와 도시와 다른 모든 영역들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영어로 경작하다는 다른 동사 중에 ‘cultivate’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명사는 바로 ‘culture’ 즉 문화입니다.
‘문화’란 국가와 사회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통틀어 사용되는 말입니다.
‘경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나타난 사람들의 행동의 결과를 문화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속에서, 단순히 세상 문화를 따르는 자가 아니라,
거룩한 문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문화를 따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이 세상의 문화에서 자기만을 잘 지키도록 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잘못된 기반 위에 세워진 영역들을 변화시키고,
성경 중심의 새로운 문화를 이루도록 하십니다.

정치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이 그곳에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경제계에서는 하나님의 정직하심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교육계에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매스 미디어계에는 하나님의 진실이,
예술계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종교계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과학기술계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가정 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이 모든 영역들 가운데는 황무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작해야 할 분야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성도들을 통해 세상은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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