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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의 멋 용서의 삶 (창 4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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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멋 용서의 삶 (창 45:5-8)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
              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후 사람이 얼마만큼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음”입니다. 내가 모르던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고 나의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는 삶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신앙은 소극적인 신앙의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앎 수준에 머무는 소극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믿음 후의 변화된 삶”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곧 바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변화된 삶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가를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 중에서 창세기는 이 세상의 창조의 기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모두 50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5 단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1-11장까지 11장은 천지창조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 안에 이미 한번 심판이 거쳐 갔습니다. 그것이 노아의 심판입니다. 12-23장까지 12장은 아브라함 이야기로 꾸며져 있고 24-27장까지 4장은 이삭의 이야기로 28-36장까지 9장은 야곱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7-50장까지 14장은 요셉의 이야기로 꾸며집니다. 그 중에서 가장 성숙하고 신앙적 중심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여기서 요셉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1. 큰 시련을 경험

요셉은 참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련들을 모두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애급의 장사꾼들에게 팔림을 받았습니다. 애급에 가서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뜨거운 분노와 억울함을 느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런 분노를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불평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누구 탓도 하지 않습니다. 참 멋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참 멋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2. 용서의 사람

요셉이 어려움과 시련을 잘 이겨내는 과정에서 멋진 모습이 나타나지만 더 멋있는 모습은 요셉이 그 과정에서 용서의 사람이 되는 점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번 용서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에서가 야곱을 용서합니다. 다윗이 시므이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굴에서 잠자던 사울을 보기 좋게 죽일 수 있었는데도 용서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요셉이 자기를 팔아먹은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입니다.

요셉이 애급에 가서 각고 끝에 마침내 총리가 됩니다. 어느 날 그 앞에 형제들이 나타났습니다. 자기를 애급에 팔고 아버지에게 가서 맹수에게 잡혀 죽었다고 거짓말한 그 형들이 지금 자기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형들은 지금 자기 앞에 있는 당시 최강국의 총리가 자신들이 팔아먹은 동생 요셉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 형들이 얼마나 두려워 떨었겠습니까. 그때 요셉이 “두려워 마세요, 나를 팔아먹은 것은 당신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살리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인간이 때로 이렇게 위대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용서의 사람입니다. 참으로 멋진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은 사람

요셉은 하나님에게 크게 쓰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그런 용서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그 이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요셉에게 큰 권세를 주셨습니다. 또 요셉은 그 권세를 받았지만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복수로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보복의 도구로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권세를 오직 백성을 살리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만 사용하였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사나이 입니까.

4. 성공 중에도 용서의 정신을 발휘한 사람

요셉이 각고 끝에 애급의 총리가 됩니다. 바로는 독신이었던 요셉을 결혼 시킵니다. 첫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과거를 잊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벌써 과거를 잊었습니다. 마음에서 털어버렸습니다. 누구든 다 용서했습니다. 형들 뿐 아니고 문제의 그 여인도 용서했습니다. 둘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었습니다. “두 배의 결실“이라는 뜻입니다. 과거에 내게 주어졌던 아픔과 원한들을 하나님이 대신 갚으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나의 과거의 아픔과 어두움과 원수에 대한 보복들을 말끔히 씻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 낳고 “므낫세”라고 “나는 이제 과거를 잊었다”라고 짓고 둘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었습니다. “내가 이제 다 잊었으니 두 배의 결실을 얻었다”하고 만족해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날의 아픔과 어두운 그림자들을 다 지워버리고 용서했다 그 말입니다. 하지만 형들은 지금 과거 때문에 두려워했고 요셉이 복수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자 동생 요셉에게 “아버지가 형제들을 잘 돌보라고 유언하셨다”고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옛말에 얻어맞은 사람은 다리 뻗고 자고 때린 사람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잔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성공자들이 참 많습니다. 온갖 시련을 다 겪으면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공하기 까지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배신과 누명과 속임과 불이익을 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는 인격이 파괴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성이 메말라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내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원수 갚겠다고 이를 갈고 한을 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복수극이 나오고 파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어떻게 그런 용서를 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마음에서 원한과 복수심을 버릴 수 있었을까요. 거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용서할 만큼 마음의 크기가 없습니다. 속마음이 작아서 조그만 것도 용서하고 양해하고 그냥 넘어갈 만한 마음의 아량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늘 작은 문제 가지고도 싸우고 원망하고 보복하고 복수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또 하나는 “용서받은 기쁨”이 있어야 누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 누굴 용서하고 용납하고 살아가겠습니까. 그럼에도 인간이 누굴 용서하고 용납하며 살아가는 것은 내가 진정으로 용서받은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위대한 용서를 흉내 내게 되는데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용서의 길을 가르쳐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신 그 용서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이 하루아침에 공비에게 희생 되었습니다. 한 아들도 아니고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두 아들을 죽인 공비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정상적인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할 수 없지, 이미 죽었으니까“ 그런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손 목사도 처음에는 그를 미워하고 증오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고민합니다. “내가 언제까지 저를 미워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저를 미워한다고 한들 죽은 내 두 아들이 살아난단 말인가“. 그러다가 그 공비를 살리기 위해서 탄원서를 씁니다. 그리고 자기의 죽은 두 아들 대신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이겠다고 법원에 탄원합니다. 용서하되 한발 더 나아가 그를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일인데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가 우리들이 예수께로부터 용서받은 경험 때문입니다. 받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고생해본 사람이 고생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 속에 들어 있는 사건의 해석”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가운데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그 사건 속에 들어있는 어느 절대의 뜻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갔습니다. 도적도 아니고 이웃사람도 아닌 내 형들이 나를 애급 장사꾼에게 팔아먹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애급으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거기다 노예로 살던 집 여주인에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여인은 생각만 해도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좋다고 해 놓고 뒤집어서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갇히게 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10년을 갇혀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이것이 모두 형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당시 최강국의 총리입니다. 누가 감히 내 앞에 오금이라고 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앞에 형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눈물로 호소하는 자기를 애급의 장사꾼에게 무자비하게 노예로 팔아먹은 그 형제들이 지금 눈앞에 와 있습니다. 생각하고 보니까 그동안 잊고 있던 그 여인도 지금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지금 얼마든지 통쾌하게 원수를 갚고 복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에게는 그 복수하고 원수 갚는 일은 이미 몇 년 전에 포기했습니다. 그 여인의 일도, 형제들의 일도 몇 년 전에 이미 다 포기하였습니다. 포기한 것이 아니고 용서한 것입니다. 없던 일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첫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나는 이제 과거를 잊었다”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었습니다. “내가 이제 다 잊었으니 두 배의 결실을 얻었다”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이미 몇 년 전에 형들을 만나기 훨씬 전에 이미 다 잊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복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불안해 할 때 요셉이 말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러면 요셉이 그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마음속에서 비탄스럽게 떠오르던 복수심, 증오심을 이길 수 있었던 근원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의식입니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생명을 살리시려고, 당신의 깊으신 뜻을 이 땅에 펼치시기 위해서 형들을 통해서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다"라는 섭리의식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어도 실패하고 낙오하고 속고 탄식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성공하고 승리하고 형통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도 그래서 고난도 받았고 피눈물도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길을 가게 된 것은 형들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라는 것을 요셉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셉이 모든 인간적인 복수심, 원망, 증오심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주권, 섭리, 계획이 있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삶이 얼마나 심오한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이 얼마나 어설프게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울었다 웃었다 오해했다 풀렸다 하기를 수도 없이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 어떤 때는 너무 피상적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에서 열매가 맺히지 않고 꽃이 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참으로 신비하고 깊은 세계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그냥 수양하고 일이 잘되게 해 달라고 불공이나 드리는 식의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되 참으로 신비하게 인도하십니다.

연세대학교를 창시한 언더우드가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갑니다. 그는 선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에 가서 선교하기로 마음에 작정하고 기도했습니다. 1883년 겨울 방학 때 알버트 올스말스 박사가 신학교에 와서 경연을 하였습니다. “지금 조선에 1300만 명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어 선교사를 보내야 하겠는데 지망생을 찾고 있다”고. 그때 언더우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이미 인도로 가기로 작정하고 기도 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대신 다른 선교사가 나타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인도에 갈 선교기금이 모금이 잘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습니다. 청빙서에 도장을 찍고 우체통에 넣으려고 가던 도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조선에 갈 사람이 없구나.” 그때 언더우드가 편지를 찢어버리고 뉴욕 선교본부로 찾아가 조선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지원했습니다. 그러니까 선교비 모금 하지 않아도 되니 당장 떠나라고 해서 1884년 7월 만 25세 된 언더우드가 조선으로 가는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1885년 4월 역사적인 발걸음을 이 땅에 내 딛게 된 것이 오늘 한국이 복음화 하게 된 동기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급으로 보내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요셉이 애급에 가서 크게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상식으로는 요셉이 순순히 애급으로 내려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를 사람들을 통해서 애급으로 가도록 유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형들로 하여금 애급에 팔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잘 있던 보디발의 집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하셨습니다. 감옥에서 바로왕의 왕궁에서 일하던 관원을 만나 사귀게 하셨고 그 동시에 바로가 꿈을 꾸게 되었을 때에 그 꿈을 해몽하는데 먼저 사귀어 놓은 관원을 통해서 인도받아 바로 왕 앞으로 나아갔고 그 꿈을 해몽한 요셉은 마침내 하나님이 원하시던 자리로 올려놓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걸어간 그 배후에 자상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요셉이 누구보다도 실감나게 보았고 이해하였고 간파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그 뜨거운 분노와 복수심과 원망과 증오심을 더 이상 품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마침내 형들을 만나기 훨씬 이전에 복수심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오히려 형들을 만났을 때에 두려워하는 형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하나님님의 섭리의식을 믿었던 요셉이 그 분노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의식을 믿고 따르는 삶이 성숙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는 축복을 입었습니다. 알고 믿는 것도 분명 은혜이고 복입니다. 그런데 더 큰 은혜요 복은 알고 믿는 것 뿐 아니고 더 소중한 일은 알고 믿음으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큰 은혜의 삶은 우리의 삶속에 스며드는 하나님의 자상하신 섭리의 손길을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보다 더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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