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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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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25-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10:36-37)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그가 알고 있는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 교사에게 ‘네 대답이 옳도다’ 고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영생의 기쁨을 가지고 사는 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렬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을 이웃사랑으로 드러냅니다. 마치 부모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녀가 부모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혈육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넘치게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율법 교사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삶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인간의 즐거움과 행복과 보람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합니다.

  율법 교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문제 중, 특별히 인간 사랑인 이웃의 문제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인지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이웃관은 대단히 편협했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만 이웃이지 그 외의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세리나 서민을 제외하고 자신들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만을 이웃의 범위로 국한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와의 대화중에서 우리에게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참된 이웃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사랑을 바로 찾는데서 영생의 행복과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 이웃사랑은 부담스러운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서 먼저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봅니다.
  이 사람은 여러 사람에게 부담이 되고 부담감을 안겨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이웃사랑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 험하고 숲과 동굴이 많은 길이라 강도의 출현이 잦은데도 지혜롭지 못하여 무리하게 홀로 여행한 사람입니다. 자기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여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운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웃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짐이 되어 지장을 주며 번거롭게 하고 부담감을 주는 것이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남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되지 않도록 지혜롭고 성실하며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 받는 자가 되기보다는 주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혹 내가 물질로 도움을 받는 자리에 있다면 기도로 그 빚을 갚도록 해야 합니다. 짐이 되고 부담이 되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데서 사랑하는 참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 이웃사랑은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사람은 ‘강도들’입니다. 이들이 강도가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피해를 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행자의 옷을 벗기고, 거의 죽도록 때렸고, 죽게 된 사람을 버리고 갔습니다. 이들은 결코 이웃사랑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웃사랑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피해를 주는 것은 결코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해를 끼치고 빼앗으며 가로채며 손실을 입히는 것은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함으로 510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를 보면서 우리사회의 현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건물에 균열이 가는 것을 알면서도 수익을 올리는 일에만 붙들려, 문제의 심각성을 외면한데서 일어난 끔찍한 참사입니다. 우리가 더욱 놀랄 일은 그 기업주가 바로 기독교인이며 교회 중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만든 피해는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피해를 주는 것은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남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주는 것은 결코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 이웃사랑은 무관심이 아닙니다.

  세 번째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 입니다.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해 갔습니다. 그들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거나 피해를 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전 일을 감당하기에 부정한 피를 만지거나 시체를 만지면 안 되는 규례와 규정 때문에 피해갔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그 자리가 위험한 자리이기에 더 이상 피해를 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죽을 사람은 죽을 사람이고 산사람이나 살아야 한다는 합리적 판단에서 그 자리를 지나쳤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내게 도움을 준 일도 없고 나와는 무관하기에 책임질 하등의 이유가 없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신문에 나고 선행이 세상에 알려질 가능성이 있으면 고려해 보겠지만 깊은 산골에서 보는 사람도 없기에 피해갔는지도 모릅니다. 이유야 어떻든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에 관심을 보이지 못한 무관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관심이 이웃사랑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부담이 되거나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그것만으로 이웃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무관심은 결코 사랑일 수 없습니다.

  󰓐 이웃사랑은 이해관계가 아닙니다.

  여관주인은 물질적인 이해관계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사랑보다는 수익성이 생기기에 돌본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철저히 계산해 보고 이해득실의 실리에서 베푸는 선행은 참된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국회위원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서, 명성을 얻기 위해서, 사업상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행하는 선행은 비록 그것이 훌륭한 선행일지라도 참된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이고 책임입니다.

  마지막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 불쌍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바로 그의 깊은 양심에 비쳐진 하나님의 사랑이 생명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사람은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후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주막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의 비용을 주며 돌보아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 당시 두 데나리온은 거의 한 달의 숙박비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혹이나 비용이 더 들면 돌아와서 갚아주겠다며 끝까지 책임을 져 주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한계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며 무조건적이며 계속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이 이웃사랑의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철저히 사랑하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신 예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34)고 까지 하셨습니다. 

  미 8군에서 근무했던 ‘토마스’ 소령은 세 살 난 한국 장애자 어린아이를 입양했습니다. 그에게는 부인 ‘로리’씨와, 자녀로는 ‘매튜’(13세)군 ‘사라’(10세)양 ‘데이비드’(8세)군 등 삼 남매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 장애아기 ‘태식’이를 입양하여 돌보기로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이 장애아기를 미국으로 데려가 치료해주기 위해 중령진급과 16년간의 군 생활을 포기한 데다 태식이의 이국생활이 외롭지 않도록 ‘선옥’(5세)양도 입양했다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함께 아파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말이 아닌 행동입니다. 희생하는 것이고 끝까지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대가를 바라는 어떤 조건이나 기대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면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에 대한 이론과 말보다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명한 화가 ‘티멘테스’가 화가 지망생으로 공부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티만테스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결과 그의 스승조차 흠잡을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하고 훌륭한 그림을 완성시켰습니다. 티멘테스는 자신의 그림을 보며 스스로도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정성껏 그렸던 훌륭한 그림이 새하얀 화폭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의 스승이 흰 물감으로 지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스승의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분격하여 그 이유를 따졌습니다. “선생님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림이 훌륭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단호한 얼굴로 꾸짖듯이 말했습니다. “그 작품은 완성된 듯 보이나, 완성된 것이 아니네, 자네는 지금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네의 재능을 사랑하고 있네. 그것은 단지 습작일 뿐이야. 자! 다시 시작하게” 이 말을 들은 티만테스는 깊이 뉘우치고 그림공부에 더욱 열심을 내어 드디어는 ‘이피게니아의 화상’이라는 걸작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많이 말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한 이론과 방법을 알고 말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 이론과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인과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의 시간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하심 안에 살아가는 자입니다.   
 
  일본의 저명한 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작가가 되기 전 구멍가게를 운영했는데, 장사가 너무 잘되어 이웃가게들이 문을 닫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가게가 너무 잘되어 이웃 가게들이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하겠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생활이 아니오?” 이 말에 자극을 받고 그녀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 문을 닫거나 일부로 상품을 다 갖추지 않고 손님이 오면 이웃가게로 보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는 시간에 틈틈이 소설을 썼습니다. 이 소설이 ‘빙점’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곧 현상모집에 당선이 되어 가게에서 일생 버는 수입보다 더 많은 것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웃사랑의 삶은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의 삶을 만듭니다.

  영생을 가진 자의 삶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인간영혼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복음전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복음전파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나누어 주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이웃사랑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는 예수님의 물음에 ‘제가 이와 같이 하겠습니다.’ 고 순종함으로 영생과 함께 주님의 기쁨을 가지고 사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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