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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귀는 참된 예배를 방해한다 (출 8: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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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는 참된 예배를 방해한다 (출 8:25-28)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이 감동하실 만한 일천 번제를 드렸다.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솔로몬이 감당할 수 없는 지혜와 축복을 쏟아 부어주셨다(왕상3:1-11). 하나님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아와 만나주신다. 하나님의 기쁨은 예배에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영혼의 종합비타민과 같다. 예배에는 영혼을 위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 예배에는 영혼을 울리는 찬양이 있고, 지옥의 대문을 흔드는 기도가 있고,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이 있고, 아픔을 치료하는 따뜻한 교제가 있다.

  그래서 예배 한 번 잘 드리고 나면, 영혼의 포만감이 오고, 어떤 대적과도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영적인 에너지로 충만하게 된다. 온전한 예배로 우리 인생은 완전히 바뀔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 예배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신앙생활의 80-90%가 예배하는 일이다.

  예배를 소홀히 하는 사람 치고, 신앙이 올바로 성장하는 사람이 없고,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 치고 복을 받는 사람이 없다. 예배를 철저하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때, 온갖 영적인 복과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배를 너무 가볍게 취급한다.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예배답지 못한 예배가, 성행하고 있다. 이는 사단의 계획이다.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을 올바른 예배에서 떠나게 하는, 사단의 계획과 작전을 깨달아야 한다. 마귀는 우리가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유혹한다.

  사탄마귀가 어떻게 예배를 방해하는지, 본문에 잘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귀의 작전을 깨닫기 원한다. (출8:27) 모세는 바로에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재앙이 임한다. 파리 떼의 공격으로, 결국 바로는 굴복한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겠으니,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다. 그러나 교활한 타협을 요구했다. 여깅[ 바로의 교묘한 속임수 4가지가 있었다.

  바로는 마귀의 상징이다. 마귀는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하려는, 성도들의 신앙을 방해한다. 바로의 말을 들어보면, 올바른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성도들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간교한 꾀가 숨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타협안

(1) 이 땅에서 예배를 드려라(출8: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이 땅은 장소가 아니다. 제사의 주체가 누구냐는 말이다.

  바로는 제사의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광야에서 제사만 드리면 되지 않느냐?, 하나님의 명령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제사가 아니까, 장소가 어딘들,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말이다. “교회에 꼭 나가야하냐? 집에서 예배드리면 되지, 늦으면 어떠냐? 설교만 들으면 되지”하는 말이다.

  요즘 기독교TV나 라디오, 인터넷으로 예배드리고, 헌금은 온라인으로 보내는 사이버 교회가 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으면, 광야까지 갈 것 없이, 이 땅에서 예배하라는 말이다.

  겉으로 보면, 인심 쓰는 것 같다. 그렇지만 제사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애굽은 이 세상의 상징이고, 육신의 상징이다. 마귀는 이 땅의 예배를 좋아한다. 이 땅의 예배는 구별되지 않은 예배, 내 방법대로 드리는 예배다. 그래서 마귀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그렇게 원하면 예배를 드려라, 그러나 일요일만 예배드리고, 말씀대로 살지는 말라.”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는, 애굽을 떠나기를 원하신다. 세상과 온전히 구별되기 원하신다. 그런데 거듭났다고 하는 신자들 중에, 아직도 애굽을 벗어나지 못하고, 애굽의 예배를 드린다. 내 멋대로 산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너무 힘드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예배만 드리라고 한다. 이런 식의 타협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애굽을 떠나지 않는다. 잘못된 생각을 따라 살면서, 일주일에 1번만 예배드리면, 천국에 간다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말한다.

  그러나 결국 그의 윤리가 바꾸지 않으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되다. 하나님은, 사흘 길을 가라고 하셨다. 이는 모세의 생각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27)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애굽을 떠나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를 애굽에 머물게 하려함이 아니다. 그래서 모세는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예배드림이 하나님의 명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우리는 이 땅 예배를 폐지하고, 사흘 길 예배를 드려야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3일 길을 걸어가서 모리아 산에 제단을 쌓았다(창22:4).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행군할 때, 법괘와 이스라엘 백성의 거리가 3일 길이었다. (민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3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또한 (눅2:42) 요셉과 마리아가 어린 예수님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시간도 3일 만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됨도, 주님과 헤어진 지 3일 만이었다(눅24:21). 이 땅의 예배는 자기 편리주의 예배다.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자기 위주의 예배를 삼가야한다.

  이처럼 마귀는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게 하되, 하나님의 중심의 예배가 아닌, 자기중심의 예배를 드리게 한다.

(2) 너무 멀리 가지 말라(28).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가기는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나님께 예배는 드리되, 빨리 이 벽돌 찍는 노예 생활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멀리는 나가지 말라는 말이다. 마귀가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지는 말라는 말이다.

  마귀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기에, 성도들은 마귀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한다. 신앙생활을 하되, 적당히 하라는 말이다. 주일 낮 예배는 드려도 좋지만, 밤 예배는 나가지 말라. 주일헌금은 드려도 좋지만, 십일조는 하지 말라고 타협한다.

  수요예배, 구역예배는 참석하지 말고, 새벽기도는 참석하지 말고, 주일날만 나가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 온전히 나가야 한다.

  우리를 얽어맬 수 있는, 모든 옛 질서와 단절을 선언해야 한다. 즉 이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완전히 포기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들의 백성은 이런 마귀의 소리를 듣고, 분별력이 어두워지면 안 된다. 하나님은 힘들어도 정식으로 3일길 가서 예배하기를 원하신다.

(3) 남정만 가서 예배드려라(출10:9-11).

“모세가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 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부모들의 관심은 아이들에게 있다. 마귀는 너무도 잘 알기에, 아이들만 데리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3일길 예배를 드리고, 자기 아이들 때문에 다시 애굽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마귀가 붙들어,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지금 중국교회가 그렇다. 만18세 이상이 되어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그 이하는 부모라도 교회오라고 말을 할 수 없다. 유일하게 교회학교가 없는 곳이, 중국교회다. 이는 신앙의 유산이 계승됨을 막겠다는 마귀의 계략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드리도록 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부모들이 아이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 아이 때문에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물질 때문에 참된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으면,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롯과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불타는 소돔 성을 빠져 나왔다. 그렇지만 롯의 아내는 계속 소돔에 미련이 남아, 뒤돌아봄으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창19:26).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 미련을 남겨 두고 살아서는 안 된다. 바이킹족들은 영원히 그 땅에서 살기 위하여, 배에다 불을 질렀다. 사태가 악화되더라도, 돌아갈 생각은 안중에도 없다. 배수진을 친 사람과,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도망갈 방법을 마련해 놓은 사람의 모습은 다르다.

  눈빛도 다르고, 태도도 다르다. 뒤로 물러서 안주할 곳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최선을 다하는 신앙생활은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영적 싸움에서 항상 패배하게 되므로, 우리는 이 세상 속으로 들어갈 여지를 만들어 놓아서는 안 된다(히10:38-39).

  어른만 가서 예배드리라는, 마귀의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자. 아이도 예배드려야 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자식을 귀히 여겨주신다. 물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신다.

(4)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가라(출10:24)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모세는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이 목적이었다(출5:3, 8:27). 모세는 단지 애굽의 학대에서 벗어나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며 예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양과 소를 놔두고 가면, 무엇으로 제물을 삼아 예배를 드리겠는가?

  이는 제물 없는 예배, 제물 없는 헌신을 의미한다. 예배는 자신의 헌신을 표현하는 헌물이 있어야 한다. 예배에 헌신이 없으면 이는 헛된 예배다. 참된 예배는 철저한 생활의 헌신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철저하게 헌신되어지는 예배가 되어야한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단을 쌓고, 짐승을 잡아 희생을 드렸다.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바쳤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우리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믿음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롬12:1)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고, (요4:24)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한다. 구약 시대의 예배는, 제물의 피가 있는 예배였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어떤가? 지금 막 잡아서, 뜨거운 피가 뚝뚝 떨어지는 희생이 있나요?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빈손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우리도 단지 축복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만 한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이다(요4:23-24). 그러므로 우리는 최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먼저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도 마귀는 이 속삭임으로 성도들을 유혹한다.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여기에 걸려 넘어갔고, 데마도 여기에 걸려서 세상으로 나갔다.

2. 우리는 마귀가 굴복하는 믿음이 되자(26).

“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모세는 자신의 뜻이 이렇기에, 떠나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애굽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애굽인들은 가축을 신으로 생각했기에, 이것을 죽여서 제사 드리는 것을 싫어했다.

  모세는 애굽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서, 바로의 교활한 제안을,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우리의 전도도, 정중하지만 단호해야 한다. 사람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 어떤 것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정중하게 예의를 지켜서 말해야 한다.

  모세는 바로의 유혹에,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단호하게 바로의 유혹들을 물리쳤다. 그러자 바로는 결국, 하나님과 모세에게 굴복하고 만다. 바로가 한 밤중에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서 말한다.

  (출12:32)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주목해야할 단어가 있다. “너희의 말대로…”라는 단어다. 두 번이나 강조되고 있다.

  모세는 바로가 어떤 유혹과 협박에도,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주장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마귀의 세력과 협상하지 않았다.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그러므로 마귀가 굴복하여 “네 믿음대로, 네 말대로 되라”라고 선언하게 만들자.

  모세는 올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바로의 타협안을 모두 거절하였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 드리는 신앙생활을 살기 위하여 과감하게 마귀가 주는 여러 가지 시험들을 믿음으로 거절하면서 살자.

(1)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쪽으로 갈라져 있는 자”라는 성도의 의식을 가지고, 빛의 자녀들답게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2)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머뭇거리며 넘나드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 쪽으로 깊이 들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 누가 우리를 보더라도 “저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3) 우리는 이 세상에 미련을 갖고, 무언가를 남겨 놓은 채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멀리 하면서, 다시 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는 불행한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우리는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사는 것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살아야 한다. 모세는 온 가족이 모두, 출애굽 하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 양과 소를 가지고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면서, 하나님께서 찾고 계신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을 가지고 살자. 모세와 같이 믿음을 가지고, 마귀의 타협안들을 단호히 물리침으로, 영적인 승리를 경험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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