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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는 우리의 습관이어야 합니다! (막 1: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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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는 우리의 습관이어야 합니다! (막 1:36-39)

위대한 교육자로 알려진 호레이스 만이라는 사람이 습관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습관은 마치 밧줄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습관이라는 밧줄을 짜고 있다.
그런데 일단 짜여지면 그 습관은 결코 파손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습관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바꾸기 어려운 습관을 바꾸는 일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브라운 랜던이라는 사람이 쓴 책 중에 고정관념을 깨는 '습관의 법칙'이라는 책에서 우리에게 "제발 습관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라는 충고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말을 타는 습관을 가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결심을 합니다.  '나는 이제 말을 타고 다니는 습관을 버리겠다.'  그래서 그는 늘 말을 타고 가던 뉴욕 도시를 이제는 걸어다니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걸어가면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말을 타고 다니는 습관은 나쁜 습관이야.  나는 앞으로 절대로 말을 타고 다니지 않을 거야.'"

여러분, 이 사람이 성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아마도 계속 걸어가면서 발이 부르트고 힘이 빠질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말 생각만 했을 겁니다.  말을 탔으면 내가 쉽게 갈 수 있었을 텐데.  아마도 계속해서 말의 환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전략이 실패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말보다도 훨씬 속도가 느리고 덜 효과적인 걸어가는 방법을 선택한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사람이 차를 타고 다니는 습관을 익혔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이제 차를 몰고 뉴욕으로 갑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말 생각을 했을까요, 하지 않았을까요?  간단한 겁니다.  우리가 걷는 것이 좋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그것이 건강에도 좋다고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를 하면서도 악착같이 차를 몰고 다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에 익숙해져 있고, 또 그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행동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나쁜 습관을 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버릴 수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버리려고 하는 것보다 새로운 습관을 익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다 나은 습관 말입니다.  보다 효율적인 습관, 보다 거룩한 습관을 익히도록 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모름지기 우리는 주님의 습관을 닮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제자의 삶일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새로운 습관만이 우리가 그렇게도 사모하는 진정한 부흥,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셨던 전도 습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그의 생애에서 전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셨는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전도를 사명으로 자각하셨습니다.

최근에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기독교적 가치관, 혹은 성경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은 스티븐 코비라든지, 혹은 피터 드러커 같은 경영 컨설턴트들의 영향으로 '사명 선언문' 작성이라는 것이 보편화되었습니다.  이제는 비즈니스 세계를 뛰어넘어서 모든 일터마다, 모든 직장마다 사명 선언문 작성이라는 것이 보편적 실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아주 오래 전에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 그분은 이미 사명 선언문을 발표하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복음서를 잃어보면 가끔씩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온 것은"  이 대목은 소위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을 발표하는 순간이십니다.
"내가 온 것은 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19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 선언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인자가 온 것은"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아들이 되신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명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땀을 흘리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고, 그것을 위해서 그는 죽으셨습니다.

그 길만이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라는 사실을 믿으셨습니다.  그 길만이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그분은 믿으셨습니다.  그 길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임을 그분은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소위 마지막 부탁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

그들이 나를 믿고 나를 따르는 내 제자가 되게 하라.  그것만이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길임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정을 변화시키고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길은 어떤 구조를 개혁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또 다른 주님의 제자, 그들이 이 땅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애플 컴퓨터의 공동 창시자였던 스티븐 잡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회사 초기에 한참 잘 나가다가 머뭇거리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때, 그는 효율적인 마케팅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찾다가 당시에 펩시콜라의 유명한 CEO였던 존 스컬리라는 사람을 자기 회사에 영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존 스컬리라는 사람은 나이 38세에 펩시콜라의 사장이 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소위 우리가 지나왔던 세대, 콜라 세대를 공략하는 탁월한 마케팅을 통해서 콜라 사업의 부동의 1위였던 코라콜라를 1위 자리에서 추락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존 스칼리는 이미 충분한 명예를 누릴 수 있었고, 그리고 충분한 재원을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옮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스티븐 잡스가 이 스칼리에게 아무리 집요하게 설득하고, 자기도 책임을 질 수 없는 거액을 불러가며 회유를 해도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이제 44살이 되었던 스컬리에게 스티븐 잡스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웁니다.  그는 이런 도전적인 한 마디 말을 그에게 뱉어냈습니다.
"당신은 설탕물이나 팔면서 나머지 인생을 허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 일에 한 번 자신을 던지시겠습니까?"
이 말이 그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자리를 옮겨 스티븐 잡스와 함께 동역자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아주 동일한 도전장을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남아 있는 인생을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방식대로 그저 그렇게 적당히 살다가 끝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명령하시고 그분이 모범을 보여주신 그 모범을 쫓아 이제부터는 세상을 바꾸는 일, 전도 사역에 한 번 헌신해 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이 그분을 따라가기를 원하는 그분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사명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사명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전도의 사명,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었다면 이제 전도하는 일이 우리의 거룩한 습관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전도의 거룩한 습관을 만들어 가는 첫 걸음을 내딛는 사명 선언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전도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두 번째, 예수님은 전도를 계획하며 사셨습니다.

모든 효율적인 사역은 효율적인 계획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가 전도의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날마다 살아가셨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나오는 사람들,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만지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시고 피곤하셨던 예수님은 잠시 안식을 취하시고 그 이튿날 새벽 다시 한적한 곳에 나가셔서 아버지와 더불어 기도하는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소위 예수님의 새벽기도가 끝날 무렵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 본문 37절에 보면 다시 이런 소식을 전합니다.  "선생님, 모든 사람이 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주님을 만나서 복음을 들으려고 모든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서 기도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의 요청 앞에 예수님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일종의 냉담한 거절을 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에게는 이미 다른 계획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3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그러니까 어제까지 이 가버나움 마을에서의 전도는 그것으로 족하다.  충분히 복음이 전해졌고, 충분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낼 수가 있었다.  오늘은 아직 예수님의 복음을 전혀 들을 수 없었던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나는 이렇게 복음이 마을들 속에, 그리고 온 나라 가운데 전파되기 위해서 오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날을 향한 분명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른 아침 기도를 통해서 아버지와의 교통 속에 오늘은 다른 마을에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결정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일상 생활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이 전도를 중심으로 해서 전도하는 계획으로 일관성 있게 움직이셨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여러분과 제가 우리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고백한다면 제자는 스승을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일생에 전도를 사명으로 알고, 가장 소중한 삶의 목적으로 알고, 그리고 전도의 계획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여 가셨다면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살아야 마땅할까요?

이제 여러분이 삶의 여러 계획들을 세우면서 내가 이러 이러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도하겠다는 구체적인 전도의 계획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물어보겠습니다.  옆 사람에게 "전도의 계획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겠습니다.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솔직히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가 그분의 제자라면 적어도 구체적인 전도 계획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전도 계획은 무엇입니까?  우리 셀의 전도 계획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의 전도 계획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왜 세워질까요?  여러분, 가서 모든 민족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  선교의 사명은 한 두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힘을 모아서 할 수 있도록 우리 주님은 공동체에 선교의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는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10살을 먹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아주 심각하게 우리들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지나간 10년 동안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이 얼마나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예수의 제자로서 오늘의 삶을 살고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건강한 교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전도해서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들만의 잔치가 아니라 가서 내 어깨 위에 또 다른 주님의 제자를 세워가야 합니다.  제자의 계보, 믿음의 계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베드로가 외쳤던 여기가 좋사오니의 변화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넘어서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동안 그저 밋밋하게 예수를 믿어 오셨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전도의 열정을 품고 사명 선언자로 일어나셔야 합니다.  전도가 우리의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 전도가 우리 교회의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그 동안 예수를 믿으면서 제자를 세우는 일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셨다면 이제부터라도 가서 제자를 삼는 일에 생명을 거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전도해서 생명을 구원하지 않으면 그들은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는 그 피 값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타성에 젖은 신앙을 가지고 계속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외면한 채 계속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제자를 삼기는커녕 제자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종교꾼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의 열정을 품고 거룩한 사명자로서의 삶의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구체적인 전도의 계획을 가지고 살아가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 구원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마음에 품으십시오.  이 부담감은 아름다운 부담감입니다.  이 부담감은 축복된 부담감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부담감, 전도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은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사명의 부담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본연의 모습은 재생산에 있습니다.  셀이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는 또 다른 셀을 만드는데 있습니다.  번식하지 않는 셀은 암세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재생산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번식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니캉 내캉 감자 캘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를 하셔야 합니다.  전도가 우리의 사명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 모두가 안 믿는 이웃들을 전도하는 이 계획을 세우는 일에 여러분의 기도, 여러분의 생각, 여러분의 열정을 모아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 첨가되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전도하며 사셨을까요?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전도의 계기를 만들며 사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전도를 미리 미리 계획하셨을 뿐 아니라, 계획되지 않았을지라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여행을 하시다가 너무 피곤하셔서 사마리아 우물가에 잠시 걸터앉아서 쉬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대낮에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옵니다.  사막에서 정오 시간에 물을 길러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시각에 물을 길러옵니다.  가만히 보니까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십니다.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하지 않았고, 전혀 대화를 나누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는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금기를 예수님은 깨뜨리시고 이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  그리고 대화가 이어지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렇게 전도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과 이 여인의 만남은 어느 날 우물가에서
우연한 만남일는지도 모르지만 주님은 그것을 전도의 기회로 정확하게 포착을 하고 사용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이 어떤 배경, 어떤 상황에서 주어졌을까요?  누가복음 19장 1절에서 9절까지를 읽어보면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어떤 이유로 예수님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젊은 선지자 예수, 어쩌면 그분이 내 인생의 대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개역판에서는 뽕나무라고 했지만 사실은 뽕나무가 아닙니다.  돌무화과나무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에서는 돌무화과나무라고 했습니다.  돌무화과나무 위에서 지나가는 예수님의 행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내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건은 이렇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너무너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쯤 읽다가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고 싶어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얼마나 기뻤을까요?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집에 영접하기 전에 이미 그는 전존재로 예수님을 그의 마음에 모시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집에 앉자마자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해 이런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삭개오야, 오늘 구원이 이 집에도 이르렀구나"
전도하신 겁니다.

그리고 다음 절이 누가복음 19장 10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어떤 뽕나무 위에 있던 사람,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고 한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전도의 기회를 삼으셨던 것입니다.

과연 그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그 예수님의 제자임을 여러분과 제가 자처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만남, 모든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사용하셨던 예수님의 제자인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살아야 마땅할까요?  우리는 그렇게 살수가 없을까요?

우리 시대에 안 믿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교회의 모든 사역의 시스템을 만들어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대표적인 교회가 하나 있다면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 크릭 처치라고 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이 교회의 개척자이시고 담임목사님이신 빌 하이블 목사님은 전도에 올인하고 인생을 사신 분이십니다.  대화 속에서 다른 이야기는 없고 오직 자기가 전도한 이야기 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관심이 전도 밖에는 없습니다.

그분은 일부러 그가 일상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방문할 필요가 있는 잡화점, 세탁소, 식당, 이발소 같은 곳을 늘 한 두 곳 정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불평하지 않는 좋은 고객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따뜻한 감사를 표현하고, 마땅히 내야 할 요금에 조금 씩 더 얹어서 요금을 지불하고, 대화를 나누기를 즐겨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기를 힘쓴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주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도를 가리켜서 그분은 '생활전도다' 라고 말합니다.  혹은 관계 전도라고도 말합니다.  그분이 강조하는 것은 이렇게 생활 속에서 관계를 맺고 하다 보면, 전도가 쉽다는 겁니다.  전도는 재미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도가 어렵다는 겁니다.  전도가 힘들다는 겁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관계가 맺어지면 전도는 쉽습니다.  전도는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쉽습니다.  전도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제자였던 디모데에게 자기의 생애가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보고 마지막 유훈처럼 남긴 최후의 말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이것을 많은 사람들을 앞에 놓고 그냥 선포하는 설교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개인적으로 말씀을 나누라는 겁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데모데후서 4장 5절에서도 분명해집니다.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여기서 전도자는 직업적인 전도자가 아닙니다.  전도인, 우리 모두가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정말 주님이 그렇게 사셨고, 주님이 그렇게 전도할 것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부탁하셨고, 그의 제자인 바울이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우리가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부탁하고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전도를 계획하십시오.

우리가 12월 23일,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귀빈초청축제'를 하는데 그때를 향한 전도계획이 지금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지금 베스트를 향한 관계 맺기가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전도할 대상이 없다구요?  전도할 기회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방법입니다.

내게 찾아오는 모든 만남들을 전도의 기회로 삼아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나누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전도할 수가 있다면 나 때문에, 혹은 우리 때문에 예수 믿고 구원받고 변화된 어떤 성도들을 저 영원한 천국에 가서 만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나는 당신의 전도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성경은 그들이 우리의 기쁨의 면류관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면류관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의 가치관이 변할 때, 사랑하는 여러분, 쉽지는 않지만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저는 스티브 잡스의 도전을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그저 그렇고 그런 방식으로 남은 이 한 해를 살다가 여러분의 인생을 끝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세상을 바꾸는 이 위대한 사역 앞에 한 번 헌신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렇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전도, 이 전도의 거룩한 사명을 저와 여러분의 사명으로 삼는 남은 이 한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의 실현을 위해서 금년 한 해가 전도를 우리의 삶에 일상적 습관으로 만들어 가는 그 첫 발걸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적지 않게 부끄러운 습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거룩한 습관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습관, 그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습관, 그들에게 복음의 영광을 전달하는 습관,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나누는 습관,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하는 이웃들의 손을 잡고 천국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습관, 이 위대한 습관에 도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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