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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듣고 행하는 사람 (창 15:1-11, 롬 4:1-8, 마 7: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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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행하는 사람 (창 15:1-11, 롬 4:1-8, 마 7:22-27)

1. 한 골동품 장사가 어느 시골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당 문간에서 개가 밥을 먹고 있는데 그 개밥그릇이 아주 귀한 골동품이었습니다. 이 골동품 장사는 그 개 밥그릇에 온통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한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밥그릇부터 이야기 하면 주인이 눈치 챌 것이니까 개부터 사야겠다고 마음먹고는 실제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개를 사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주인도 흔쾌히 팔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흥정이 끝나고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골동품상은 생각난 듯이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기왕 개를 샀으니 저 개밥그릇도 끼워주세요.” 이 말을 듣고 주인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내가 왜 개밥그릇을 끼워줍니까? 그 그릇 때문에 번 돈이 얼만데요?” 잔꾀를 부리던 골동품상은 자기 꾀에 자기가 당하고 말았습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비꼬아서 한 이야기 같은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그 목적이 선하다고 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후2:17에 보면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쉬운 번역에는 이 말씀을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대구 서문시장 같은데 가보면 난전에서 손뼉을 치면서 “골라! 골라!”라고 외치며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순전히 생계를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들었던 중세기 가톨릭의 부패상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며 놀라운 이적을 행사할 때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가 베드로를 따라다니며 그 놀라운 역사를 보고서는 은근히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내가 돈을 줄 테니 나에게도 이런 능력을 행사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격분해서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일갈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시몬”이라는 사람이 이런 일을 했다고 해서 성직매매를 “simony"라 일컫게 되었습니다.

   당시 소위 암흑시대라고 일컫던 중세기 때 가톨릭교회는 성직을 돈을 주고 사고팔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회는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돈을 들여서라도 성직만 사게 되면 재산과 함께 권력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돈만 있으면 신부나 주교직도 사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당시 교회 형편이었습니다. 이 한 가지만 두고 봐도 교회가 얼마나 타락하였으며, 얼마나 본질에서 멀리 떠났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종교개혁은 역사적인 필연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겠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한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날을 그 기점으로 삼기 때문에 금년은 그 490주년이 됩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 흐른 세월만큼이나 우리들도 많이 변했고 또 변질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혁의 주체였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오늘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교회 현실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먼저 종교 개혁자들의 정신을 살펴보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정말 절실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2.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 때 무슨 종교를 개혁하겠다든지 세상을 변혁시키겠다든지 하는 굉장한 문제를 가지고 나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인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것이냐?”라고 하는 매우 실존적인 문제였습니다. 대체로 20대 젊은이들은 “주여, 세상을 뒤집어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30대가 되면 “주여, 내가 만나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이 더 들어 40대가 되면 “주여, 내 가족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천명(知天命)의 연륜을 쌓으면 “주여! 나를 변화시켜주옵소서.”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그때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바로 자신의 구원문제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에서는 선행이나 고행 또는 공로를 쌓으면 천국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하면 할수록 오히려 하나님이 더 두려워졌고,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점점 더 멀어만 갔습니다. 이러했던 루터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비로소 성경에서 구원의 빛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루터는 “이제 내 앞에 지옥문은 닫히고 천국 문이 환하게 열렸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누누이 선포하고 설명했듯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선포하신 복음이었습니다. 오늘 창15:6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미 율법이 생기기 4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도리를 율법이 결코 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하박국 선지자도 역시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 구원의 진리를 온 세상에 널리 선포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 구원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우리 인간이 구원을 위하여 더 보탤 것이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케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복음은 매우 단순합니다. 행16:31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가 믿고, 지키고 전할 복음입니다.

  (2) 오직 성경입니다.

     원래 종교 개혁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회복, 설교 회복 운동이었습니다. 중세기 가톨릭  교회에서는 강단에서 말씀이 살아졌습니다. 말씀이 살아지고 나니까 온갖 미신적인 의식이 판을 치게 되고, 인간의 말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절대권위와 기록된 말씀 즉 성경의 충족성을 외쳤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절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증거했습니다. 오늘 교회의 예배 가운데 말씀이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갖게 되는 소이가 여기 있습니다.

  (3) 오직 은혜입니다.

     중세 가톨릭에서는 고행과 선행을 많이 주장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고행이필요합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도 합니다. 절제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과 더 가까이 사귀고 주님을 더 깊이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선행을 많이 해야 하지만 그 선행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의 공덕을 많이 쌓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공덕이 인정받아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데 도움을 주는 방편이요 신앙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2:8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많이 사용하는 “은혜 받았다.”고 하는 말은 이런 원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4)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당시 가톨릭은 구원에 관해서까지 교황이 전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신부들이 죄를 사해주는 권한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아까 서문시장 상인 이야기를 했듯이 그들은 복음을 팔아먹기까지 했었습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인데 그 자리를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은 그 가로막고 있는 사람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모신 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 자신이나 아볼로나 그 누구도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고, 자신들은 단지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일군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 그리스도요, 거짓 선지자요, 적그리스도입니다. 이 기본적인 사실만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3. 그런데 오늘 이런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받은 우리들이 어떠합니까? 유감스럽게도 복음의 반쪽만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다는 진리만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에 투철합니다. “믿습니다!”를 열심히 외칩니다. 거리에서 심지어 “예수-천당”이라는 팻말이나 띠를 띠고 확성기를 들고 외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세상은 냉담을 넘어 반기독교 정서가 확산되고 있습니까?

   세월이 흘러서 우리 믿는 복음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까 성경의 충족성을 말했는데 성경이 문제됩니까? 기독교 역사나, 교회 자체가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향하여 “당신 때문!”이라고 말합니까?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랬듯이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회개할 때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은 제거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회개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서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어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은 있는데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는 잘 믿는데 주님으로 모시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있는데 삶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옛날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듯이 “오직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듣고 행하라”고 했습니다. 시편 1:에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편119:2에는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당하면서 우리가 다시금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가 그동안 무관심해서 내쳤던 복음의 다른 한 면 즉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여 그 하는 일이 다 형통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 같아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몰아쳐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땅의 교회가 이렇게 될 때 우리 한국의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게 될 것이요, 이 민족의 구원의 등대가 되고 세계를 향한 사명자가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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