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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쉼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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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쉼
본문 /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어떤 부인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기차를 타보는 이 부인은 지정된 좌석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겨우 지정된 좌석을 찾아 앉았는데, 기차 안이 너무 더웠습니다. 그래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더니 이번에는 바람이 너무 세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알맞은 양의 바람이 들어오도록 창문을 조절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행 가방을 선반에 올려놓아야 하는데 마땅한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다 놓았다 저기다 놓았다 하면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겨우 자리를 찾아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처럼 여행을 하기 위해 비싼 값을 주고 산 모자가 말썽이었습니다.
모자를 쓰고 있자니 바람에 날리고, 그렇다고 창문을 닫자니 너무 덥고, 그래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기차가 흔들거리면서 자꾸만 떨어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무릎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난리법석을 떨다보니 머리 모양새가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빗을 꺼내서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야말로 편안한 마음으로 차창 밖의 경치를 내다보면서 여행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기차 안내원이 그녀에게 다가왔습니다.
"부인, 다음 정거장이 내리실 곳입니다"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분주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잘 말해 줍니다. 분주하게 살면서 끊임없이 쉴 곳을 찾지만 결국 쉴 곳을 찾지 못하는 우리들의 삶과 겨우 겨우 쉴 곳을 찾았는데 이미 늦어버린 이미 내릴 때가 된 우리네의 삶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바쁘게 사는 현대의 삶 속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는 과연 어디에 있을 까요?

옛날 스페인의 투우장 한편에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한 공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참 싸우던 싸움소가 지쳤을 때 공격하던 상대방 소로부터 잠시 피해 숨을 고르며 힘을 모아 기운을 차린다음 계속 싸울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황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어로 “퀘렌시아”(querencia) 라고 부름니다. 그래서 퀘렌시아라는 말은 휴식처 또는 안식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숨이 막히도록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자기만의 퀘렌시아가 필요합니다. 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쉼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누군가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악보에는 쉼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연주자인 자신이 직접 필요한 쉼표를 찍어가며 연주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쉼표 없는 악보는 좋은 음악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쉼표 없는 인생 또한 참 인생일 수 없습니다.
오늘 분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본문 속에서 쉼을 추구하는 인생들에게 참된 쉼이 어디에서 오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이해 받음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첫째로 진정한 쉼은 이해 받음에 있습니다. 이해 받음이란 수용, 또는 받아들여짐을 의미합니다.
쉼이 누구에게 필요합니까?
그것은 힘들고 지친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고단한 삶에서 지치고 힘들고 피곤할 때 누군가가 내 힘든 상황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받아 줄 때 진정한 쉼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신 그 분은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일단 우리 인생들이 무겁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아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린 예수님으로부터 이해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셔서 우리의 어떤 상황도 충분히 이해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충분히 이해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믿을 때, 그럴 때 우리 마음은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이렇게 부르실 때 어떤 음성 어떤 모습일까요? 가장 온화하고 부드럽고 편안한 음성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는 우리의 어떤 것도 다 받아들이시고.. 혹시 실수를 했을 지라도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분이니까요
주님은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다 아시고 그 짐으로 인한 마음의 수고를 다 이해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짐지고 비틀거리는 우리 인생들을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해 받음이 쉼입니다.

2. 내려 놓음 / 내 멍에를 메고 ..

둘째로 진정한 쉼은 내려 놓음에서 옵니다. 내려놓음은 본문에서 “내 멍에를 메고...” 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내가 짊어지고 온 나의 멍에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쉼은 내려놓음에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려 놓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자신의 모든 상황들이 충분히 받아드려지고 이해 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려놓은 때 진정한 쉼이 찾아옵니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양복을 벗고 넥타이도 풀고 양말도 벗어 버리듯 우리가 살아가면서 몸에 걸치게 된 온갖 것들을 다 벗어 버릴 수 있을 때 쉼이 찾아옵니다. 내가 충분히 내가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이 있을 때 다 내려놓을 수가 있고 다 내려놓으면 편안해 지고 쉼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자존심도 내려놓고 열등감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아를 나를 내려놓으면 쉼이 주어집니다.
그 분 앞에서는 지위도 신분도 명예도 다 내려놓고 그저 그 분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편안해 지기에 그래서 쉼이란 곧 “내려놓음”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쉼을 얻기 위해서는 붙들고 있는 것들, 나를 쉬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 놓아야 쉼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최근에 많이 읽혀지고 있는 “내려놓음” 이라는 책에서 아주 짧막한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수퍼마켓에 가서 먹고 싶은 과자랑 초코렛을 마음껏 골라 손에 들었습니다. 엄마가 물건 값을 계산하기 위해 계산대에 섰지만 아이는 자기가 집어든 그것들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물건들을 계산대에 내려놓아야 값을 계산하고 돈을 지불하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어린 아이같이 내려놓을 줄을 모릅니다. 내려놓으면 죽을 줄 알고 꼭 붙들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이가 일단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을 내려놓을 때 계산이 끝나고 그것이 진정한 내것이 될수있는 것처럼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먼저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 욕심에 매여 있는 사람은 절대로 물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건강 욕심에 매여있는 사람은 절대로 건강하지 않습니다.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은 그것 때문에 죽고 망합니다.

3. 평안 /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셋째로 쉼은 마음의 평안에서 옵니다. 평안이 안식이요 쉼입니다. 필립 켈러라는 분은 양을 연구하는 농학박사이면서 나중에 목사가 되신 분입니다. 그가 양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양들이 쉬기 위해서는 평안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평안해야 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에게 평안이 언제 주어지는가 하면 첫째는 배부르고 둘째는 안전감이 있어야 평안해 지고 그 때야 쉴수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양은 절대로 안식할 수 없습니다. 배고픈 양은 푸른 초장에도 절대로 눕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전하지 않으면 절대로 쉼이 없습니다. 양들은 풀밭에 파리나 해충이 주변을 날기만 해도 초장에 눕지 않는다고 합니다. 안전하다고 느낄 때 비로서 초장에 누어 쉼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배고프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친히 생명의 떡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끝날 까지 함께하심으로 안전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평안을 주셨고 주님안에 있는 평안을 누릴때 진정한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4. 사명 / 나의 멍에를 메고 ..

네 번째 진정한 쉼이란 사명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일 즉 사명을 감당하는 삶에서 진정한 쉼이있습니다.
쉼이 쉼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쉼이 아닙니다.
안식이 안식이로만 끝난다면 그건 그저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참된 쉼이란 다른 차원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내려놓은 그곳에서 주님의 멍에를 메여야 합니다.
모든 것 다 내려놓았어도 주님의 멍에를 메지 못하면 쉼은 잠시 있어도 재충전이 되지 않습니다. 재충전 없이는 쉼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쉼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자신이 이해받고 수용되고 있음이 믿어지고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느낀다면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기게 되고 자신감이 생기면 다 내려놓을 수 있고 다 내려 놓으면 다시 새로운 것으로 채울 즉 충전할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충전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이해 할 힘이 생기고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나누어 줄 넉넉함도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와 같은 쉼이 어디에서 공급되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이루어 집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공급됩니다. 참된 쉼은 단지 육적으로 편안하게 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참된 쉼이 있을 때 영과 육이 아울러 쉼을 얻을 수 얻게 된다면 참된 영혼의 쉼이란 예배하는데 있지 않을까요?
주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나눌 때 영혼의 쉼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채봉 씨가 쓴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시에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나는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따듯한 젖 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정말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 바치고 엉엉 울겠다.

여러분 이런 거 아닐까요?
“세상 만사 억울했던 그 일을 일어바치고 엉엉울겠다.” 저는 이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여러분 주님과 이런 관계가 되었습니다. 답답하고 힘든 일들 다 주님께 일러바치고 엉엉 울어보십시오. 주님과 이런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의 삶은 결코 메마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서 내가 충분히 받아들여짐을 느끼고 그럴 때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이처럼 다일러 바치고 엉엉 울어 버리면 .. 그러면 다 해결 되는거 아닐까요? 그래서 참된 쉼이란 예배를 통한 그 분과의 친밀한 교제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참된 쉼이 여러분들의 삶에 언제나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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