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교개혁]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 다른 영 (고후 11:1-..

  • 잡초 잡초
  • 268
  • 0

첨부 1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 다른 영 (고후 11:1-4)

  18세기에 나온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당대 최고로 유명한 의사와 또한 최고로 유명한 돌팔이 약장수가 서로 만났는데, 의사는 가난했고 반면에 약장수는 엄청난 부자였기 때문에 의사가 약장수에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약장수는 의사에게 지금 길 가고 있는 행인 100명 가운데 과연 몇 명이 상식을 가지고 있겠느냐고 되물어왔습니다.
  의사가 아마 한 사람 정도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자, 그 돌팔이 약장수는 "그렇다면 그 한 사람은 당신을 찾아갈 것이고 나머지 99명은 나한테 오게 되어 있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즉 가짜가 판을 치게 되는 이유는 바로 대중의 '무지'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회 안에도 그런 '가짜 약' 즉 '가짜 복음'을 파는 '엉터리 약장수' 즉 '가짜 사도'들에게 어처구니없이 쉽게 속아 넘어가는 '무지'한 교인들이 많이 있음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장탄식을 하는 장면입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이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 하는 말은 '내가 원래 무식한 사람이니 좀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실제로 용서를 구하는 말이 아니라 반어법으로 하는 말입니다.
  지금 영적으로 극히 무지한 꼴을 보이고 있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스스로 꽤 똑똑한 줄 알고 있나본데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한 마디 해야 하겠다.'라고 비꼬는 뜻인 것입니다.

  이어서 2상반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고 했습니다.
  여기서 '열심'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사실상 '질투'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두고 마치 아내를 빼앗긴 남편처럼 질투하신다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너희를 위하여 질투를 낸다.'고 말하는 뜻도 그와 꼭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2하반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말하고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가르치는 교인이 만약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지 아니하고 이단에 넘어가서 다른 신을 좇는 모습을 보이면, 그 남편 되신 예수님께서 질투하실 것과 꼭 같은 마음으로 질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투는 세상 사람들의 질투와 같이 남을 미워하는 악감정의 질투가 아니라, 그 영혼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런 영적 질투가 일어나도록 만든 사건이 무엇이었습니까?
  우선 3절에 보면 그것은 곧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이와" 즉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드는 간계를 썼고 하와는 거기에 넘어가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꼭 같은 일들이 자기가 사역하는 시대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이어지는 4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제490주년이 되는 기념주일입니다.
  이 날은 우리의 개혁자 선배들이 로마천주교를 틀림없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오직 성경에 따른 진리를 되찾고 오직 선지자와 사도의 가르침에 근거한 교회를 세웠던 날입니다.
  성경을 떠난 미신과 교황의 독재교권이 판을 치던 중세의 암흑을 깨고 교회사적으로나 일반 세계사적으로나 진정 새로운 광명시대를 열게 되었던 이 종교개혁을 두고 스코틀랜드의 역사가 윌리엄 커닝햄은 "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끝난 이후 일어난 수많은 사건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다고 단정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종교통합운동의 주동이 되어 기독교를 가리켜 소위 '나누어진 형제'라 부르면서 미소작전으로 나오는 천주교의 간계에 적지 않는 기독신자들이 정말 '어리석게도' 미혹당하면서 '그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되는 일'들이 실제로 만연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가짜 기독교의 괴수이며 이단 중의 이단인 천주교의 '약장사'에 이처럼 쉽게 넘어가는 무지한 교인들을 볼 때 실로 사도 바울처럼 장탄식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천주교는 왜 가짜 기독교이며 틀림없는 이단 종교입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인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명백한 대답을 오늘 주일과 다음 주일에 계속 이어서 듣고 깨닫고자 합니다.

  1. 천주교는 '다른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다른 종교입니다.

  4상반절에서 사도 바울은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이단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가짜 사도들 역시 예수님의 이름 자체는 부인하지 않고 꼭 같이 "전파"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만 같지 그 내용은 '다른 예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파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자기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성도와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던' 극악무도한 죄인, 그야말로 '죄인 중에도 괴수'였던 자기마저 당신의 십자가 공로로 깨끗이 용서해 주셨던 대속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는 바로 그런 예수님을 만났던 까닭에 공생애 도중에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다른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다"(고후 12:11)고 자부했으며,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은 조금도 자랑하지 아니하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고전 1:23)만을 전파했던 사도였습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하면 곧 '십자가의 예수' 즉 '죄인 위해 대신 죽으신 대속의 구세주'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가짜 사도들은 '육체를 따라 아는 것'(고후 5:16)만을 자랑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마 그들 중에는 예수님 생전에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내세우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그들이 십자가 대속의 예수님은 전파하지 않고 무슨 '신유의 예수' '기적의 예수' '축복의 예수' 등 사람들의 귀에 솔깃한 예수상(像)을 제멋대로 만들어내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예수 이름을 전하는 것 같아도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다른 예수'요 자신이 전파하지 아니한 이단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뭐니 뭐니 해도 일단 예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신앙은 오직 성경에서 가르치는 그대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믿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보내어 주신 독생성자'(요 3:16)이시며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시요 또한 유일한 중보자'(딤전 2:5)이심을 믿는 것만이 참된 예수신앙인 것입니다.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가르치지 아니합니다.
  천주교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란 그저 동상으로 만들어진 장식에서나 발견될 뿐,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속죄사역을 완성하신 구세주'로 믿고 의지하고 감사하는 대상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천주교는 예수님의 모습을 온갖 '다른 예수'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위 '거룩한 성체(聖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찬식의 떡이 예수님 몸의 '상징'이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 떡을 먹는 순간 그것이 예수님의 '진짜 육체'로 바꾸어진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며, 이것이 곧 소위 '화체설'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천주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떡이라는 음식물로 전락시켜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천주교에서는 지금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성난 예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큰 고통을 받으셨기 때문에 몹시 진노하고 계시고 그래서 직접 죄인들이 찾아가기 아주 어려운 분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님을 진정시키고 죄인들을 대신해서 자비 베풀어 주실 것을 예수님께서 요청해 주는 또 하나의 '중보자'가 필요하게 되는데 바로 소위 '성모 마리아'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성난 예수'라 할지라도 당신의 모친인 마리아의 요구는 거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성모 마리아를 그들의 중보자로 여겨 숭배하고 그녀에게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정도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천주교의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시니 무엇을 하시고 싶어도 실제로 그것을 행사할 수 없고 오직 교황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승천 이후에는 인간 구원을 위한 모든 전권과 실권이 바로 교황에게 있는 것이고, 이러니 천주교인들은 예수님보다 오히려 교황을 실제로 더 사모하고 받들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한 천주교는 실제로 '다른 예수'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제가 성직수임을 받을 때 'alter christus'(another christ) 즉 '또 다른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사제를 거쳐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하지만 실제로는 사제를 거쳐서 '예수님 앞까지 나아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주교 신자들은 사제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죄 사함 선언까지도 바로 그 사제로부터 듣기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 앞까지 가서 회개하고 용서 받을 필요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다 끝나기 때문입니다.
  즉 천주교에서는 사제가 문자 그대로 곧 '다른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혁명가 예수' 또한 로마천주교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예수는 부자들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설교하는 예수로서 바로 천주교의 '해방신학'이 만들어 내어서 지금 공산주의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예수'입니다.
  이렇게 '다른 예수'들이 많으니 천주교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눈에 보일 여가가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 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의 유일한 구세주로, 유일한 중보자로 믿지 않으면 이미 '다른 예수'를 믿는 것이며, '다른 예수'는 이미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천주교와 기독교가 같다고, 아니 천주교가 기독교의 '어머니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소리입니까?
  이처럼 사도들이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하고 있는 천주교는 결코 기독교가 아니며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라는 사실을 꼭 제대로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천주교는 '다른 영'을 가르치기 때문에 명백한 이단입니다.

  본문 4절 중간에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라고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행하던 또 한 가지 미혹을 지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the Holy Spirit)을 보내심으로써 택자들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하시고 성경 말씀을 깨닫도록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른 영(spirit)을 받게 한다"는 것은 그런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가르쳐 주는 진리 외에 다른 말로써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의 꾀는 말이나 인본주의적 사상 등에서 나온 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파하는 말씀은 자기 양심이 오직 "성령 안에서"(롬 9:1)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거짓 사도들은 세상의 여러 가지 미신들을 기독교와 접목시켜서 '니골라 당의 행위'(계 2:6)를 퍼뜨리기도 했고, 또는 헬라의 철학과 사상을 기독교 진리와 짬뽕시켜서 소위 '영지주의'라는 이단 신학을 만들어내기도 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경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면 아무리 겉모양은 기독교라 할지라도 그 내용은 미신과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이 점에 있어서도 정말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우선 천주교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 대신에 '신앙과 행위의 제일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유일'이란 말은 '다른 비교의 대상조차 허용하지 않는 독보적인 존재'를 가리키지만 '제일'이란 말은 '비교할만한 제2, 제3의 존재가 있음을 전제하는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을 뜻하므로 여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게 됩니다.

  우리 개혁주의 기독교에서는 성경만이 신행의 유일법칙이기 때문에 설혹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도 어디까지나 '성경만'을 가지고서 반드시 그 안에서 해결합니다.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그런 경우에 '제2, 제3'에 해당되는 규범이 따로 있는데 바로 '교황령'이나 '공의회의 법령' 등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천주교에서 교황령이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며, 아니 실제로는 오히려 '성경보다 더 우위에 있는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 개혁주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생활강령의 순서에 나오는 대로, 어디까지나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보다 앞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천지가 창조되었고(창 1:1) 예수님의 선언이 있었기에 교회가 세워졌으니(마 16:18) 지극히 당연한 말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엉뚱하게도 교회의 권위를 성경 위에다 두고 자연히 그 교회의 수장이라는 교황이 성경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 결과 교황의 권위라는 것은 성경까지도 제 마음대로 바꾸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십계명이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과 다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우선 천주교는 다른 종교의 신들도 다 인정해 주니까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계명을 그대로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십계명의 제1계명은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 위에 공경하여 높이고"라고 아무 근거도 없이 제 마음대로 바뀌어 있습니다.
  제2계명은 '우상을 만들거나 숭배하지 말라'는 명령인데, 천주교처럼 우상 많은 종교로서는 이 계명만큼은 제1계명에서 했던 것처럼 '적당히 수정해서 얼렁뚱땅' 넘길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제2계명을 아예 완전히 삭제시켜 버리고 그 대신에 제3계명을 그들의 십계명 제2계명으로 앞당겨 와서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헛맹세를 하지 말고"라고 편집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나씩 앞당겨 오면 자연히 마지막에 가서는 아홉 개의 계명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원래 열 번째 계명 하나에 들어 있는 명령을 둘로 나누어서 제9계명을 "남의 아내를 원치 말고"라고 해 놓고 제10계명을 "남의 재물을 탐치 말라"고 해서 억지로 10개의 계명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정도는 약과입니다.
  원래 신구약 성경은 총 66권이지만 천주교에서는 거기에다 위경 7권을 포함시켜 총 73권의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공동번역' 성서가 바로 그런 책입니다.
  사실 천주교도 외경을 처음부터 정경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가 1546년에 이르러서야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하여 '제2의 정경'으로 공식인정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천주교의 천사 중보설, 연옥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 66권의 성경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이단 교리들을 뒷받침해 줄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책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도 그저 교황의 권위 하나에 다 달려 있는 것이라면 결국 교황이 하나님보다 높다는 소리나 다름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 말씀에 대한 무지는 또한 천주교 내에 온갖 미신을 야기했습니다.
  중세 로마천주교는 오히려 "무지는 헌신의 어머니"라는 격언까지 만들어 내면서 온갖 비성경적인 미신종교를 만들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성물숭배'입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 말구유에서 뽑아 왔다는 볏짚, 십자가 나무의 한 조각, 예수님 유아시절에 사용했다는 기저귀,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의 엄지손가락 등이 있었는데, 물론 그 출처조차도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칼빈이 태어난 도시에도 그 당시까지 예수님의 가시관의 일부와 세례요한의 머리카락이라는 것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비텐베르그 성안에도 5,005개의 천주교 유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런 유물 하나하나마다 일정한 면죄효력이라는 것이 주어져 있었는데, 어떤 유물에는 100일의 면죄 효과가 있고 성자의 유골 따위에는 4,000년의 연옥 형기를 감해 주는 효과가 있으며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 때 받은 동전 하나에는 1,400년의 면죄 효과가 있다는 따위였습니다.
  그런 소위 면죄 효과의 범위와 기간을 결정하는 것은 물론 교황이었습니다.

  앞에서 나왔던 '화체설' 역시 애굽에 기원을 두고 있는 미신에서 따온 것이며 '성난 예수와 자비로운 성모 마리아' 역시 고대 바벨론 신화에서 도입한 교리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떠나서 온갖 '다른 영'을 가르치고 숭배하는 천주교는 여지없는 이단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똑바로 깨닫고 기억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천주교에서 소위 '복자(福者)'로 추대된 마리아 테레사 수녀는 일부 기독교인들에게까지도 무슨 '성녀'처럼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후에 나오게 된 '테레사 수녀: 나의 빛이 되어라'는 책을 인용하여, 지난 9월 3일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지는 "테레사 수녀가 캘커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1948년부터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내적 고통을 지옥에 비교했고 한때는 천국과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드러내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녀는 1953년 어떤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치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내 안에 너무나 끔찍한 어둠이 있다."고 했고, 1959년에 또 어느 신부에게는 "내 영혼에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어둠이 있는지 말해 달라."고 적어 보내었다고 합니다.
  또한 1979년에 자신의 고해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예수님은 당신(그녀의 고해신부)을 특별히 사랑하신다. 그러나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예수님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 기도하려 해도 혀가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 없다."고 썼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로부터 3개월 후 그녀가 노벨평화상을 받는 자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 속,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우리가 주고받는 웃음 속 모든 곳에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천주교로서는 자기네들의 영웅과도 같은 테레사 수녀의 이런 영적 방황을 두고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신앙 속의 어두움(darkness within faith)'을 평생 껴안고 살면서도 결국 믿음으로 충만한 견인(perseverance)을 이루어내었다."라는 따위로 어떻게든지 무마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현재의 교황 베네딕토 역시 이 테레사 수녀의 서한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알고 있다. 깊은 신앙으로 자선 활동을 폈던 테레사 수녀조차 '하나님의 침묵'으로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신자들은 때때로 이런 하나님의 침묵을 견뎌 내야하며, 그렇게 해야만 비신도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라고 일견 아주 멋있게(?) 해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천주교의 본색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천주교의 최고 성녀라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생전에 '성모 마리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아니 '성모 마리아를 제4위 하나님으로 천주교에서 공식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분명 성모 마리아는 잘 보였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예수' 정도도 아니고 그녀에게는 아예 예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테레사 수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자신이 용서 받은 것을 믿고 있었다면, 그 구원의 은총을 뜨겁게 체험하고 있었더라면 그 예수님이 자신의 심령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녀의 그 말은 무슨 '내적 고통'이니 '견인'이니 라는 따위의 미사여구로 포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히 자인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은 무슨 구차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또한 천주교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 불리는 교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분명해졌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도 있다고, 즉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즉시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때도 있다는 의미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이고,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늘 응답해 주시지만 우리 쪽에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어떻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처럼 '신앙 속의 어두움을 평생토록 껴안고 살고' 있던 사람에게 죽을 때까지도 침묵하실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인 성경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펼치고 읽어 보기만 해도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침묵하신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어냄으로써 비신도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은 도대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어불성설입니까?
  하기는 말은 맞습니다.
  신자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비신자와 아무 다를 바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천주교 신자가 비신도들을 이해해 주기 위해서 꼭 같이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 살다가 죽게 된다면 그 둘의 금세의 삶과 내세의 구원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믿는 신'이 다르면 이미 '다른 종교'이며 '믿는 진리'가 다르면 논쟁의 여지조차 없는 '이단'일 뿐입니다.
  이것은 천주교의 수많은 이단성들 중에 아직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지금으로부터 490년 전에 그 거대한 로마천주교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의 영적 전투를 일으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바로 그 종교개혁자들이 세웠던 개혁주의 신앙을 따라는 교회와 성도들 역시 꼭 깨닫고 기억해야 할 영적 지혜요 분별력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다른 예수'를 전하고 '다른 영'을 따르고 있는 천주교는 결코 기독교와 '같은 종교'도 아니며 '나누어진 형제'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확신함으로써, 가짜의 미혹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진실함과 행위의 깨끗함'을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