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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에 이르는 길(5) : 장애물(4) - 이기심 이타심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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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이르는 길(5) : 장애물(4) - 이기심 이타심 (눅 12:13-21)

<'나쁜 놈' = '나 뿐인 놈">
행복을 방해하는 네 번째 장애물은 '이기심'(egoism)입니다. 국어사전은 이기심을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마음"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말로 '나쁜 놈'은 '나 뿐인 놈'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만 생각하면서 모든 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때 이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어느 정도는 이기적입니다. 사람이 100% 이타적이기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 39)고 가르치십니다. 자기 몸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이기적인만큼 이타적이 되라는 말씀이지요. 사람이 자기 이익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이익도 중요하게 생각하면 이기적이라는 말은 듣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내 이익만 먼저 따지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들이 있습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낭만." "남이 신호 위반을 하면 파렴치, 내가 신호 위반을 하면 피치 못할 급한 사정 때문." "남이 새치기를 하면 얌체행위, 내가 새치기를 하면 급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남이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얘기하면 소음, 내가 큰소리로 얘기하면 유쾌한 대화." "남이 학교를 자주 찾으면 치맛바람, 내가 학교를 자주 찾으면 높은 교육열." "며느리가 친정 부보에게 용돈 드리는 것은 남편 몰래 돈을 빼돌리는 것, 딸이 친정부모에게 용돈을 드리는 것은 효행." "며느리가 부부싸움을 하면 여자가 참아야 한다. 딸이 부부싸움을 하면 아무리 남편이라도 따질 것은 따져라." "남이 자기 의견만을 주장하면 고집불통, 내가 내 의견을 주장하면 뚜렷한 신념."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나'만 생각하는 것이 개인적인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집단 이기주의'라는 말도 있듯이 자기가 속한 단체의 이익만 주장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날 노사분규나 정당간의 해묵은 정쟁 등도 그 뿌리는 모두 이기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나라 간에도 국가적인 이기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축구 시합을 할 때 심판이 우리 선수들에게 유리하게 판정을 내리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선수들에게 불리하게 하면서 상대편 선수들에게는 유리한 판정을 내리면 난리가 납니다.

실로 우리의 이기심은 개인에서부터 가족, 직장, 지역, 나라 전체에 이르기까지 그 끝을 모릅니다. 그리하여 나 하나만 행복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노조가 결성되어서 우리 집단의 이기심만 채울 수 있다면 회사가 망한다 해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거꾸로 극단적인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주의 경우 노동자들의 이익과 안전은 언제나 뒷전인 경우도 있습니다. 정치적 이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대권만 잡을 수 있다면 실현성이 없는 공약도 남발할 수 있고 나라가 망해도 상관없다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가 가진 이기심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경우가 공중 화장실을 사용할 때일 것입니다. 공중 화장실에 휴지가 금방 동이 나고 변기와 바닥을 마구 더럽혀도 전혀 양심의 가책이 오지 않는 것은 이기심 때문입니다. 아마 자기 집이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집이 아니고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막 더럽히는 것이지요. 나 다음에 이 화장실을 쓰게 될 사람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을 다 주님께 고백하고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기적이 되면 될수록 공동체로부터 소외됩니다. 더욱이 내 이기심을 충족했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내가 행복한 만큼 내 이웃도 행복해질 때 진짜 행복이 있습니다.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는?>
성경에 나오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누굴까 생각하다가 본문 말씀의 부자가 떠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이 유산 문제로 형제간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 나아와 시시비비를 가리는 재판장의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십니다. 예수님은 남의 집안싸움에 끼어들어서 재산이나 나누는 그런 중재인의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하신 것이지요. 아마 예수님께서 일언지하에 이 부탁을 거절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재산 상속 때문에 싸우는 형제들이라고 할 때, 둘 다 문제가 있다고 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누가 옳은지 중재를 하신다고 해봤자 두 형제들 가운데 누구의 탐욕이 더 옳은가 판정하는 일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에 끼어들지 않으시려고 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두 형제 사이의 재산을 나누는 재판장이 되시기보다 두 가지 진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먼저 15절을 보세요.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두 형제가 재산 상속 문제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것은 틀림없이 탐욕, 즉 이기심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형제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내가 더 많이 가져야 하겠다는 이기심이 문제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이기적인 탐욕을 물리칠 것을 권유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가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탐욕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요주의 대상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제 우리의 관심은 16절부터 시작되는 비유에 있습니다. 이 비유는 15절에서 하신 말씀을 더 분명히 밀고 나가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이 비유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부자가 어리석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부자는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는 그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얼마나 추수를 많이 거두어 들였던지 곡식 쌓아 둘 곡간이 부족했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부자가 된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물론 자기가 부지런히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 어느 곳을 보아도 이 부자가 사악한 방법을 써서 부자가 되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공동체 안에서도 매우 존경받는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부자가 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타고났고, 또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부자가 될 만했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지요. 또 남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말씀도 없기 때문에 그의 탐심 역시 무해한 탐심(harmless greed)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 때문에 자신이 부자가 되었는지 몰랐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누가 비옥한 땅을 주셨는지, 누가 하늘에 햇빛을 주셨는지, 누가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셨는지, 이런 것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설사 자신의 부귀와 축복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혹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감사한 마음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께 십일조나 감사 예물을 드렸다는 표현이 전혀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신이 부자가 되는 데에는 이웃도 많은 도움을 주었을 텐데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부자가 어리석은 것은 자기의 부귀영화가 전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자가 되도록 도와주셨지만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도움과 희생으로 자신이 윤택해졌음에도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에 어떤 노부부가 이웃에 사는 친구 아들의 추도 예배에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친구 부부는 전쟁으로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비통한 가운데에서도 친구 부부는 아들의 전사를 기념하는 의미로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하나를 봉헌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들의 이름으로 5만 불짜리 스테인드글라스를 봉헌했던 것이지요. 예배에 참석한 사람의 부인이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 사람들이 참 귀한 일을 했지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하지요?" 남편이 놀란 표정으로 반문합니다. "아니, 당신 무슨 이야기하고 있소. 우리 아들은 살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무엇을 드린단 말이요!" 부인이 즉시 대답했습니다. "여보, 바로 그 때문이에요. 저 부부는 외아들이 죽었음에도 5만 불짜리 색유리 창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어요? 하물며 우리 아들은 살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는데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볼 때 감사할 조건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부자는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었지만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자기 자신이 능력이 뛰어나고 재수가 좋아서 부유해졌다고 믿었을 뿐입니다. 자기의 부와 소유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던 것이지요!         

둘째로, 부자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은 것도 다 이기심 때문인데, 그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은 17-19절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1인칭 대명사가 유난히 많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은 번역이 정확치 않은데, 영어 성경을 보면 '내가'(I)라는 1인칭 단수 주격이 모두 6 차례나 되풀이됩니다. 거기다가 '내,' 즉 '나의'(My)라는 1인칭 단수 소유격은 모두 5 차례 나옵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무엇을 말해줍니까? 부자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 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부자는 이웃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부귀와 자신의 필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만 걱정합니다. 본문의 비유를 자세히 읽어보면 부자는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에게 말하고, 자기 혼자 계획을 세우고, 자기에게 스스로 축하를 하고 있습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사람인 것이지요!

부자는 엄청난 추수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쌓아 둘 곡간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현재 있는 곡간도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 곡간을 헐어버리고 더 크게 짓고자 결심을 합니다. 이렇게 넓고 큰 곡간을 지어서 더 많은 곡식을 쌓아두면 여러 해 동안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평안히 살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절에 뭐라고 독백을 합니까?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정도로 많은 곡식을 넓은 곡간에 쌓아두기만 하면 오랫동안 '평안히 쉬고'(relax), '먹고'(eat), '마시고'(drink), '즐거워'(be merry)할 수 있다면서 흡족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가 어리석은 것은 가난한 이웃에 대해서 눈과 귀를 닫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의 행복과 자기의 기쁨, 자기의 미래에만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로마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이란 바닷물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되어 있다." 그렇습니다. 돈이 좋은 것이로되 자기의 안전과 유익과 행복만 구하는 이기적인 돈이 될 때, 그것은 바닷물처럼 짜게 됩니다. 그래서 마시면 마실수록 점점 더 큰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가 영국 아일랜드를 방문하고 있었을 때 생긴 일입니다. 세 명의 천주교 신부님들이 포드를 방문해서 자선 병원에 기부금을 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포드는 1만 5천 달러를 기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신문은 포드가 5만 불을 기증한다고 잘못 기사를 실었습니다. 즉시 신부님들이 포드에게 찾아와 사과를 했습니다. 신문사가 실수해서 잘못 나왔으니 기사를 정정해서 5만 불을 1만 5천 불로 고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때 포드는 "신부님들, 괜찮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나머지 3만 5천 불도 내겠습니다. 그 대신에 약속을 하나 해주셔야 됩니다. 병원 문에다가 다음과 같은 문구를 꼭 좀 새겨 주십시오." 포드가 요구한 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이방인이었지만 당신이 저를 이곳에 들어오게 했습니다."--"I was a stranger and you took me in." 이방인에 불과했던 자신이 가진 돈을 이웃과 나눔으로서 이들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웃의 슬픔과 아픔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자비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웃을 향하여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 밖에 몰랐기 때문에 어리석습니다. 자기 넘어 밖에 있는 이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결국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지게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부자는 내세에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역시 현세주의적인 이기심 때문입니다. 부자는 19절에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희랍의 에피쿠로스(Epicurus, 342-270 BCE) 학파가  연상됩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이 인생 최대의 선이라고 주장한 철학자입니다. 할 수 있으면 쾌락을 많이 늘리고 고통을 많이 줄이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보았던 쾌락주의 학파가 에피쿠로스 학파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오직 현세에서 누리게 될 쾌락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는 장차 그에게 찾아오게 될 죽음에 관심이 없습니다. 죽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재산을 창고에 가득가득 쌓아둔 채, 오직 자기 자신과 가족들만 위하여 지금 여기에서 누리게 될 쾌락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평안히 쉬고, 배불리 먹고, 마음껏 마시고, 원 없이 향락을 누리며 사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아무리 큰 부귀영화와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죽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 9: 2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가 어리석은 것은 내세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자기만 생각했으니 내세가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합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부귀와 향락이 천년만년 지속되리라고 착각합니다. 자신이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데 그의 불행은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부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20절을 보세요.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부자가 '오늘 밤 당장'(this very night) 죽을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데 만일 네가 오늘 밤 죽는다면 그 모든 재산이 뉘 것이 되겠느냐?" 정말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많던 재산, 그가 그토록 신바람 나게 누리던 행복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의 재산, 그의 행복은 하나도 건지지 못한 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 들고 왔으니 빈손 들고 돌아가게 될 운명'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진리를 던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신 결론은 21절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부자는 이 세상을 향해서는 남부러울 것이 없이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는 형편없이 빈곤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자의 삶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삶이라고 단언하십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였기 때문이지요!

<이기주의를 넘어서>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어리석습니까? 슬기롭습니까? 이기적입니까? 이타적입니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이기적입니다. 수십 년을 같은 아파트에 함께 살고 있어도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그저 남에게 피해 안 주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풍족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내 배 부르고 내 등 따뜻하면 만사 OK이었습니다. 내 이웃이야 굶주리던 헐벗던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라고 질타하십니다. 그런 이기적인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오늘 여러분이 행복해지길 원하십니까? 조금만 이웃을 생각해보십시오. 특히 이익이 걸린 문제가 있을 때 내가 이익을 취하면 손해 볼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좋은 결단과 선택은 언제나 "I am OK. And you are OK."입니다. "I am not OK. But you are OK."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I am OK. But you are not OK."입니다. 부부관계도 그렇고 부모 자식 관계도 그렇고 형제자매 관계도 그렇고 이웃관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행복한 만큼 다른 사람도 행복할 때 우리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내가 이익을 얻는 만큼 상대방도 이익을 얻을 때 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러분이 여러분의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이 이웃도 그렇게 사랑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이웃이 행복할 때 여러분도 행복해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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