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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 처녀의 비유 (마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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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처녀의 비유 (마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사뮤엘 베케트의 연극 희곡 중에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습니다. 극중 인물들은 ‘고도’란 인물을 기다리는데 이 인물은 연극이 끝나기까지 등장하지 않습니다. 고도가 사람인지 이상향인지 아니면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말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누군가나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중요할 뿐이고 그가 오느냐 오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두 주인공(에스트라공, 블라드미르)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 서로 통하지 않는 말들을 주고받습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과거를 잊고 똑 같은 일과 대사들을 반복합니다. 그러다 마지막 대사는 “가자.” “갈 수 없어.”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하는 식의 대화가 계속 반복됩니다.

이 󰡔고도를 기다리며󰡕는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부조리한 인간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정체도 모르는 막연한 희망을 품은 채 오지도 않을 미래를 기다립니다. 그 일상적인 삶은 기억상실증 걸린 듯 과거를 기억도 못합니다. 단지 무의미 하게 되풀이하며 시간만 죽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 연극은 인간의 부조리한 삶을 고발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것은 기다림입니다. 베케트는 고도가 올 것 인지 오지 않을 것인지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건 오지 않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희망과 기다림 때문에 살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베케트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 희곡에서 인간이 사는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기다립니다.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평생을 같이 할 배우자를 기다립니다. 일의 성공을 기다리고 정상의 자리에 앉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림 자체가 우리 인생이란 말이 맞습니다. 정작 기다리던 목표를 이루었을 때는 그 기쁨은 잠깐입니다. 또 다른 기다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그 기다림 자체가 좋습니다. 등산에서 정상을 정복하고 나면 오히려 기쁨은 시들해집니다.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더 즐겁습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고 맙니다. 늙었다는 것은 나이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더 이상 기다릴 희망이 사라질 때가 늙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이루지 못하여 애달아 할 때가 더 행복합니다. 이 오늘의 행복을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무언가 바라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더 이상 바랄 것도 기다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다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최종적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우리가 만나야 할 분입니다. 이 분은 고도 씨처럼 막연한 존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지만 우리의 삶에 대해서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단지 그 때가 언제인지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지 그분 앞에 우리는 반드시 서게 되어 있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한 열 처녀가 그렇습니다. 열 명의 처녀가 신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팔레스틴 결혼 풍속에서는 신랑이 신부 집을 방문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자기집으로 데려갑니다. 이 잔치는 주로 밤중에 이루어지는데 신부가 그 친구들과 함께 신랑을 맞습니다. 여기 열 명의 처녀들이 그 들러리들입니다. 신랑 측과 신부 측 사이의 선물에 대한 흥정 때문에 이 잔치가 늦어지기도 하는데 잔치는 자정을 넘겨서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 격렬한 흥정은 필요합니다. 그것은 신부측의 친척들이 그만큼 신부를 귀하게 생각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은 이런 결혼 풍속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랑이 예상한 시각을 넘겨 오지 않습니다. 5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이 비유 말씀은 사실 초대교회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의 도착은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합니다. 물론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열 처녀는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문제는 신랑이 더디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의 지연을 의미합니다. 성경 안에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께서 오신다는 급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가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예배의 마지막 기도를 ‘마라나타’ 곧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계22:20)하고 기도할 정도로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읽은 13절 말씀에서처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심으로 지연될 가능성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고 하면서 이미 2천 년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약속은 거짓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지체되는가?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초대교회의 기대와 또 인간들이 쌓아놓은 죄악의 양으로 따진다면 주님은 벌써 재림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참고 계십니다. 손을 높이 드셨다가고 참으십니다.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주님은 재림을 늦추실 뿐입니다.

주님께서 우주적 종말과 함께 임하시는 재림의 날은 지연되고 언제일지 알지 못하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 인생의 종말의 날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 날은 100년을 넘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주의 종말은 더디올지 모르지만 우리가 신랑 되신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날은 곧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6절에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하는 음성이 울리듯 갑자기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 날은 마치 피곤해 잠들었다 깬 열 처녀들처럼 경황 중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미리 그 때를 준비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을 준비했던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날이 갑작스런 사건일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이 자기라는 존재를 송두리째 흔들거나 당황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우리 인생에 바로 이 심판의 때가 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인가? 우리가 죽을 날이 있고 그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시편 90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6,9-10,12) 자기 인생이 길지 않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은 암 선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시시각각 죽음이 느껴지고 죽음이 손에 잡힙니다. 죽음을 아는 자는 자기 인생을 함부로 허비할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에 자기를 투자합니다. 쓸데없는 욕심과 분노를 품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지혜이고 이것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사람입니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에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동양의 한 우화를 통해 잘 보여줍니다. 초원에서 맹수의 습격을 받은 한 나그네가 맹수를 피해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물 속에는 커다란 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나그네는 땅과 물의 틈바귀에 나 있다는 야생관목 가지에 매달려 간신히 몸을 지탱합니다.

그런데 그 때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나타나서 자신이 매달려 있는 관목 줄기를 갉아 먹기 시작합니다. 이제 나그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나그네는 그런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목 잎에 꿀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혓바닥을 대고 핥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닥친 가장 위급하고 중요한 것을 망각한 채 순간의 쾌락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 상황을 정확히 아는 것 이것이 지혜입니다.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

주님은 오늘 비유에서 분명히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준비한 처녀가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필수품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등을 들고나갔다고 하여 마치 등잔불이나 호롱불을 연상시킵니다. 이것들은 제법 오래 탑니다. 그러나 이런 등잔불로는 잔치행렬을 밝히기에는 부족합니다. 처녀들이 들고 나갔던 것은 정확히는 등불이 아니라 횃불입니다. 솜에 기름을 묻혀 태우는 것으로 약 15분 정도 연소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신랑을 맞으러 간 처녀들은 통상의 잔치 진행 시간을 고려하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 갔어야 합니다. 불이 꺼지려고 하는 순간 다시 기름을 붓기 위해서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반드시 필요한 이 기름을 준비하여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갑자기 신랑은 도착하고 불은 붙여야겠는데 기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 기름도 잘못하면 모자랄 것 같다고 하며 동네에서 기름을 사오라고 충고합니다. 그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은 이미 도착하고 혼인 잔치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 들어가고 문은 닫히고 맙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결국 그 잔치 석상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다 같이 신랑을 기다리지만 그 안에는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로 나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에 대해서 이미 여러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처럼 마지막 때까지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알곡을 보호하기 위해 가라지에 대한 심판을 연기시킨 것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묵상했던 왕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는 사거리에서 불러온 사람 중에 선인과 악인이 있다고 합니다. 악인은 예복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잔치 석상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가르는 주님의 최후 심판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심판하는 모습을 보면 이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중에 옥석을 가리는 심판입니다.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떻게 대우했느냐에 따라 심판이 행해집니다.

이처럼 주님은 결코 교회가 100% 순결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한편 위로가 되면서 또 한편 교회에 대한 경고입니다. 위로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사람 때문에 실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가라지와 같은 존재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며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교회에 나옵니다.

또한 이는 경고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여, 직분을 맡았다고 하여 우리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입술로 예수를 고백했다고 해서 그 한 마디 말로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대사도인 바울 사도조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시작입니다. 내 안에 어떤 열매를 맺혀가는 지가 중요합니다. 결혼식만 올렸다고 해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의 노력과 사랑에 의해 가정은 유지되고 완성됩니다. 생명이 태어났다고 해서 다는 아닙니다. 그 생명이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것은 출발에 불과합니다.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가는 우리는 어느새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운명에 처할 지도 모릅니다.

둘째, 그때에는 늦습니다.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신랑이 도착하고 나서 준비하려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동네에 가서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문은 닫히고 맙니다. 이는 평소에 미리 준비해 놓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들이나 신랑이 더디 오므로 모두 다 같이 잠을 잤습니다. 인간은 24시간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정신 바짝 차리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주님도 이런 우리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러나 최소한 깨어 있는 동안에는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잔치에 참여했고 미련한 처녀들은 문을 열어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합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까? 미리 준비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입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의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던 어떤 배가 파선이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선원 중 한 사람은 파도에 밀려 어느 섬에 도달했습니다. 그 섬의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여 그 섬의 추장 앞으로 데려 갔습니다. 이 선원은 “이제 저들의 손에 죽게 되는구나” 하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들은 그를 그 섬의 임금으로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갑자기 그 섬의 왕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얼마의 기간이 흐른 후 그는 한 신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나를 이렇게 대우하는가?” 그러자 그 신하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섬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왕을 세웠다가는 1년이 지나면 그 왕을 무인도로 보내어 나오지 못하게 하여 그곳에서 죽게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어떻게 하면 무인도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날 수 있는가를 궁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한 척의 배를 짓고 거기에다 곡식과 과일나무를 가득 싣고 무인도로 가서 심어라” 임금의 명령이라 모두 순종하며 따랐습니다. 과연 1년이 지나자 그들은 임금을 그 무인도로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섬은 먹을 것이 풍부한 신천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는 안전하게 또 배부르게 먹으면서 그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권세는 있을 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생명이 주어져 있을 때가 기회입니다. 이때 준비하십시오. 막상 그 날을 당하여 후회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은 게임이나 도박처럼 단판 승부가 아닙니다. 오랜 동안 쌓여져 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작아 보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쌓이다보면 돌이킬 수 없는 자기라는 인생을 만듭니다.

이 기름은 자기가 채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빌릴 수 없습니다. 인생은 자기가 살아야 합니다. 대신 살아 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있을망정 결국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이나 능력에 기대어 갈 수 없습니다. 내 열매가 중요합니다. 내 인격이 중요합니다. 내 헌신이 중요합니다.

셋째,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인생은 기름을 준비하는 인생을 말합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될 기름은 무엇입니까? 그 기름은 곧 신랑되신 예수님 앞에 들고 갈 기름임에는 분명합니다. 그 등불을 보며 신랑은 기뻐할 것입니다. 신랑을 환영하고 신랑이 기뻐할 기름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묻더랍니다. “너는 지금까지 나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이냐?” 이 질문을 받는 순간 이 분이 꿈속이지만 눈앞이 캄캄하더랍니다. 사업도 하고 교회 봉사도 해왔지만 그것들은 모두 자기 즐거움을 위한 것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가 생각이 문득 나더랍니다. 아주 추운 겨울 날 밤에 야간 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손을 불어가며 학생들에게 성경책을 나누어주던 기억이었습니다. 그 일을 말하자 예수님께서 “안다. 나도 기억한다.” 그러시더랍니다. 그러면서 꿈이 깨었는데 한편으로는 긴장이 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더랍니다.

우리 인생을 한 번 되돌아보십시오. 우리에게 주님을 맞이할 기름이 과연 무엇인지? 그 기름에 대한 답은 성경 말씀이 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열 처녀 비유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열 처녀 비유 이후에 두 개의 비유가 이어집니다. 하나는 달란트 비유이고(14-30), 다른 하나는 양과 염소 심판비유입니다(31-46). 이 두 비유가 기름의 정체를 해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주인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그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재능대로 충성되게 일을 하여 그 배를 남깁니다. 그래서 주인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 재능을 사용하지 않고 썩히다 주님으로부터 꾸중을 받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재능의 달란트, 직분의 달란트, 시간의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자기 사명과 재능을 따라 열심히 인생을 사는 것이 기름을 준비한 인생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산 사람은 주님께서 마지막 부르실 때 후회 없는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처럼 후회하고 당황하고 미련만 남고 결국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합니다.

양과 염소 심판 비유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믿지 않는 자를 향한 경고가 아니라 믿는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 심판에서 양의 무리에 속하는 의인이 누구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우리가 마지막 들고 있어야 할 기름은 바로 이 사랑의 기름입니다. 열심히 사랑하며 사십시오. 우리 주변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극히 작은 소자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살피십시오.

사람은 죽기 전까지는 물질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삽니다. 그러나 막상 죽는 순간에도 물질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 이상 저 세상으로 그 물질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 가장 후회하는 것은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아무개를 용서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올 때 필요한 정작 중요한 것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이 미련한 처녀들은 자기 몸치장에만 관심을 기울이다 기름에 대한 생각을 미처 못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외에도 우리는 여러 가지 기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들고 갈 수있는 것들이 기름입니다. 이 기름은 사람들을 구원한 전도의 기름일 수 있습니다. 이 기름은 주님을 기쁘시게 한 헌신의 기름일 수도 있습니다. 이 기름은 또한 예복을 준비하듯 자신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내 안에 부지런히 주님의 형상을 새긴 성결의 기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기름을 얼마나 예비하고 있습니까?

저는 여기에 기도의 기름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기도는 정작 마지막 날에는 필요가 없지만 인생의 항해 과정에는 가장 필수적인 것입니다. 기도는 동력과 같습니다. 일에 대한 충성도, 사람에 대한 사랑도, 주님에 대한 헌신과 성결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기도의 기름입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이 마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우리 심령의 불이 꺼져 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름인데 기도가 바로 그 기름입니다. 어둠 속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불을 비추어 하나님이 우리를 볼 수 있게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험한 파도 가운데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끊어지지 않는 우리 기도의 불빛을 보시고 우리를 그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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