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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꿈꾸는 자의 성품 (창 3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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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의 성품 (창 37:12-20)

좋은 꿈을 꾸는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평범과 비범의 차이는 꿈의 차이에서 옵니다. 꿈의 크기가 한 인생의 크기를 좌우하고 꿈의 방향이 그 인생의 방향을 좌우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절 받는 꿈을 꾸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을 울리고 세상을 감동시키는 꿈, 하늘과 땅으로부터 존경받는 꿈을 꾸고 살자고 말씀드렸고 바로 그것이 요셉의 꿈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7장은 이스라엘 판 왕건 주몽 같은 건국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뭔가 탁월한 사건이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고 탁월한 인물들이 탁월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야 옳은 것 아닙니까? 여기 보면 아버지 야곱, 네 명의 부인, 열 두 아들 콩가루 집안 이야기뿐입니다. 왜 성경에 이런 이야기들이 기록되어졌는지 우리 믿음에 조상의 수준이 이 수준이라면 우리의 가진 믿음에 긍지를 가져도 좋은 것인지 때로는 의구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만든 책이라면 여기에 뭔가 더하고 빼고 싶은 부분은 자기 멋대로 빼고 미사어귀를 써서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남겨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낯뜨거운 이야기조차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나의 모습이고 너의 모습이고 낯뜨거운 이야기들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 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성경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영웅이냐 인간 영웅전이 아닙니다. 모순이 많고 약점이 많고 허물이 많은 인간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용하셔서 그 위대한 일들을 만들어 가는가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분인가를 드러내는 것이 성경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아니 그 중에 한 가지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의 조상들 집안에 믿음이 없습니다. 양파링에 양파가 없고 사또밥에 사또가 없고 고래밥에 고래가 없고 칼국수에 칼이 없고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믿음의 집안에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어야 될 그런 집안에 소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랑의 이야기인데 사랑의 싹수가 없는 집안의 이야기들 뿐입니다. 이런 삼류 싸구려 집안에 군계일학 같은 인물이 요셉입니다. 삼류인생 인류 꿈을 꿀 수 없는 게며 변두리 인생이 역사의 무대에 중심에 서는 꿈을 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싸구려 성품이 고상한 꿈을 꿀 수가 없는 것이지요.

창세기 37장 12절 오늘 본문은 아름다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자의 성품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말에 원단이 좋아야 좋은 제품이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성품이 좋은 꿈을 꿀 수 있는 게고 그 좋은 성품이 그 꿈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무대는 세겜입니다. 그래서 본문 시작하는 12절 13절 14절 세겜이란 땅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겜이 어떤 곳입니까?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한 곳입니다. 이 일로 디나의 오라버니들이 세겜 땅 왕자들과 남자들 모조리 계략을 꾸며서 죽입니다. 아이와 여자를 노예로 빼앗고 재산을 약탈합니다. 이 사건 후 피의 복수가 두려워서 야곱의 가족은 세겜 땅을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야곱의 열 아들이 세겜 땅 깊숙이 들어가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양을 치고 있습니다. 이곳에 물이 많고 목초지가 많아서 양을 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걱정되는 겁니다. 요셉에게 말합니다.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않느냐 형들과 양떼가 잘 있는지 가 보았으면 좋겠다. 이때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어린 요셉이 거절할 수 있는, 얼마든지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아버지 생각해 보세요. 세겜 땅이 어떤 땅입니까? 거기 제가 어떻게 갑니까? 아니 어린 내가 이 나이에 어떻게 그 위험 지대를 찾아갑니까? 아버지 형님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곳에 제가 형님을 찾아 간다는게 얼마나 큰 모험인지 아버지가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핑계하지 않았습니다. 거절할 이유를 찾지 않았습니다.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본문 13절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꿈꾸는 자의 첫 번째 성품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진흙도 말랑말랑해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굳어진 진흙으로는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쓸 수 있는 사람은 순종입니다. 항상 말이 많고 변명이 많고 불평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이 쓸 수 없습니다.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자그만치 80km에 달하는 거리입니다. 산길 위험한 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권위자에게 순종하는 성품이 훈련되어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어릴 때에 부모님에게 순종하고 선생님에게 순종한 훈련이 된 사람이 영적인 지도자에게도 훈련받아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무대는 세겜에서 도단 땅으로 옮겨집니다. 요셉이 험산 위험의 땅을 지나서 세겜 땅에 갔습니다. 형님들이 이미 세겜 땅을 떠나고 없는 다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때 요셉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돌아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겜에 갔다오라고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염려하는 일들이 세겜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형님들이 무사히 세겜 땅을 지나서 도단 땅에 멀리 갔습니다. 양들에게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끝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여기에 머물지 아니하고 형님들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킨 본래의 뜻이 형님들 안부를 묻는 것임을 알고 형님들을 찾아간 것이지요.

세겜 땅에 형님들이 없는 것을 보고 요셉이 취한 행동이 두 가지 있습니다. 15절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 지라" 무슨 얘기일까요? 세겜 땅에 도착해서도 여기 끼웃 저기 끼웃하고 형님들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처삼촌 벌초하듯이 한 두 군데 끌쩍끌쩍하다가 없네~ 그런게 아닙니다. 샅샅이 뒤진 것입니다. 그리고 도단으로 형님들이 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하여 도단까지 간 것입니다. 꿈꾸는 자의 두 번째 성품은 의무 이상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명이상 순종이상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지요.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는 이 자세, 이것이 바로 꿈을 이루는 자의 성품입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 80km 도단까지 24km입니다. 이 장면을 보고 성경학자들은 자원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저자들은 도단까지 갔다는 여기에 언어 유희가 숨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단이라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두 개의 구덩이라는 뜻입니다. 이 도단 땅에서 구덩이와 관련된 어떤 깊은 이야기가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연속극 같은 것을 보면 주인공이 위험에 빠지면 시청률이 올라갑니다. 지금 요셉이 위험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인생 살다가 위험에 빠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위기에 부딪히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난제에 부딪힐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망해야 될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해야 될 순간인 것입니다. 시청률 올라간다. 왜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봐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주 여러분을 바라봐 주실 것입니다. 눈을 떼지 아니할 것입니다. 천군천사들이 여러분을 바라보며 응원해 주실 것입니다. 기뻐할 때라는 것이지요.

요셉이 100km 힘든 길을 걸어서 도단까지 왔습니다. 멀리서 걸어오는 요셉을 발견했습니다. 색다른 옷을 입고 옵니다.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멀리서도 금방 요셉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부르는 호칭이 재미있습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여러분의 호칭은 무엇입니까?

19절 "서로 이르되" 여기 집단상처가 발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로 꾀합니다. 자 그를 죽여서 한 구덩이에 던지자. 여기 한 구덩이이죠. 구덩이가 두 개 있다는 뜻으로 도단을 말씀드렸습니다. 한 구덩이에 던지자. 집단 상처가 발동합니다. 요셉을 보기만 해도 뚜껑이 열렸던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이 경직되어져서 요셉을 죽이기로 한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짖굳은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사람을 진흙으로 만든게 사실인 모양이다. 왜냐하면 열 받으면 굳어지더라구요. 얼굴도 굳어지고 근육도 굳어지고 동맥도 경화되어 굳어져요. 생각도 굳어지고 판단도 굳어지고 아 하나님께서 인간을 진흙으로 만들어서 열 받으면 굳어지는 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꿈꾸는 자 요셉을 죽이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여기에 착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방해하면 요셉의 꾼 꿈은 절대로 이루어 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 좋아하네. 우리가 너를 죽여도 그 꿈이 이루어 지는가 보자. 여기서 형들이 알지 못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인간 그 누가 찢고 방해하고 짓밟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루신다. 할렐루야.

시련이 오면 아픔이 있겠지만 더 단단해 집니다. 더 굳건해 집니다.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형님들이 또 잘못 알고 있던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요셉의 꾼 꿈은 요셉 혼자 잘 먹고 잘살고 잘되고 형님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하는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요셉의 꿈은 가정을 살리고 형들을 살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서 구원 공동체, 민족 공동체 이스라엘을 만들어 가는 건국 이야기입니다. 요셉을 죽이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 가문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꿈꾸는 자의 성품 그것은 꿈꾸는 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자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을 축복하면 내가 복의 근원이 됩니다. 꿈꾸는 자를 축복하면 꿈꾸는 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꿈꾸는 자는 꿈꾸는 사람을 보면 좋아집니다. 가슴이 설레여 집니다. 꿈꾸는 자를 축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꿈이 없는 사람은 꿈꾸는 자를 시기합니다. 남의 꿈을 찢으려고 합니다. 비웃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의 장점이 잘 보입니까? 세상 사람들 가운데 잘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설레이고 좋습니까? 비전을 이루는 사람을 보면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십니까? 여러분은 꿈꾸는 자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비전을 찢으려 했던 사울, 요셉의 꿈을 찢으려 했던 형들, 모세를 시기했던 미리암 삼류 변두리 인생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도 이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기심 때문에 배가 아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 인간들이지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두 번째는 착한 사람들입니다. 사촌이 논을 샀다고 그러는데 보태줄 것이 없으니까 변이라도 싸서 거름이라도 해야지. 싶어서 배가 아프다는 겁니다. 똑같이 배가 아파도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이웃을 보면서 축복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시기하는 사람들입니까?

최근에 비기독교인들이 반기독교화되어져서 그 공격이 독해지고 끈질겨지고 조직화되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를 비판합니다. 참 안 좋은 풍토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못하는 것 저 교회가 하고 있네. 축복해야 됩니다. 저 교회는 사회 참여를 열심히 하네. 그러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저 교회는 기도를 열심히 하네. 저 교회는 전도를 열심히 하네. 저 교회는 세상을 잘 섬겨. 우리가 못하는 것 다른 사람이 하면 그것을 축복해 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 상에 악플 때문에 우리나라가 지저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악플러들이 아니라 선플러들입니다. 인터넷 상에 정치가를 격려하고 연예인들을 격려하고 사회 지도자들을 격려하는 착한 말을 달아주는 선플러들로 바뀌어지지 않고서는 우리나라가 선진국화가가 될 수 없습니다. 선진국이 되려고 하면 이런 문화, 언어, 이 사회에 일어난 상처들을 건강하게 해결하는 수준으로 올라가야 민족이 선진화되어지는 것입니다.

꿈꾸는 자의 마지막 성품은 미움과 시기를 잘 극복하는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난을 받았을 때 비난을 이기지 못하면 그것을 사랑으로 잘 소화시키지 못하면 성화시키지 못하면 꿈을 이룰 수 없는 것이지요. 형들은 자기들 마음속에 일어나는 미움과 시기를 다스리는데 실패했습니다. 변두리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시기와 미움, 비난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주역이 되고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미움을 다스리는 일에 실패했던 형들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까? 동생을 죽이는 음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슴을 찢어놓았습니다. 그 가족은 평생 이산가족으로 살았습니다. 형들은 평생 죄책과 불안과 번민과 고민과 걱정으로 살았습니다. 공동체의 행복과 기쁨을 모두 상실하고 살게 된 것입니다. 악한 세상에 살면서 가장 일상적으로 느끼는 감정 중에 하나가 상처요 미움이요 시기입니다. 이것을 잘 다스리면 꿈꾸는 자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스리는데 실패하면 우리는 삼류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꿈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미움과 시기의 감정, 세상 사람들은 이상하게 술 한잔하면 끝나요. 담배 한 대 피우면 그냥 끝나더라구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 미움과 시기의 감정이 부딪히고 나면 끝장이 나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배후에 사탄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힌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사탄의 배후의 조정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부딪히는 것입니다. 신앙세계에서 일어난 갈등은 잘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을 공격하기 때문에 문제해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기도로 그 사람 뒤에 그 사람을 공격하고 있는 사탄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면 기도하면 문제는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 15절에 보면 독한 시기와 다툼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귀신의 장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움을 받던 요셉, 비난을 받던 요셉조차도 형들에 대한 미움을 다스리지 못했다면 그 인생은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탄에 사로잡힌 자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겁니다. 그러면 둘 다 망하는 거지요.

그러나 성령에 사로잡힌 자는 너 살고 나 살자. 이게 성령의 가치관이지요. 미움과 시기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인간이 사람임을 인정해야 됩니다. 너도 피조물이요 나도 피조물이다. 불완전한 존재다. 모두 약점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르게 지어졌다. 이걸 인정하면 우리가 미움과 시기의 감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착한 일 하는게 기적입니다. 인간이 나한테 실망 주는 것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못된 일들이 일어나는게 당연한 겁니다.

교회도 인간들이 모이기 때문에 약점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선한 구석이 있으면 그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한 것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피조물이다. 너도 칭찬 받아야 살 수 있고 나도 칭찬 받아야 살 수 있고 너도 격려 받아야 살 수 있고 나도 격려 받아야 살 수 있다. 너도 누군가를 덮어주어야 되고 나도 누군가 나를 덮어주어야 살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걸 인정하고 나면 이 미움과 시기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꿈꾸는 자의 성품이 무엇입니까? 남의 꿈을 뺏거나 찢는 것이 아니라 키워주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7장 앞부분에서는 요셉이 꾼 두 가지 꿈에 대해서 지난 주일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12절부터 이 꿈을 꾸는 자는 어떤 성품을 가져야 만이 이 꿈을 이룰 수 있는가?

첫 번째는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권위자들에게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훈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성품은 도단까지 가는 것입니다. 세겜까지 가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 이상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순종이상의 십자가를 지는 자세입니다.

세 번째 성품은 꿈꾸는 자를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찢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자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와 미움의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 꿈을 찢으려 한다고 해서 그를 미워하면 실패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워할 권세가 없습니다. 사랑할 권세만 있습니다.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책임과 사랑할 권세만 있습니다. 요셉이 만약 이 감정에 사로잡혔더라면 그 꿈은 찢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꿈을 꾸십시다.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성품들을 간직하십시다. 주께서 여러분들에게 성품의 기름을 부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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