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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야곱 가정의 신앙개혁 (창 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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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가정의 신앙개혁 (창세기 35:1-7)

오늘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 제490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루터는 면죄부를 판매하던 교회의 불의에 항거하여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당 정문에 붙이고 공개토론을 제의하였습니다.  루터의 항의문으로 시작된 개혁의 불길은 불과 4주 만에 전 독일을 휩쓸었고, 8주 만에 프랑스, 화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등 여러 지역을 강타하면서 전 유럽으로 번져갔습니다. 

그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슬로우건을 내걸고  성경적 신앙, 성경적 교회와 예배로 돌아가자고 하는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자고 하는 이 운동은 곧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며 머리이심에 불구하고 교황이 교회의 머리와 주인 노릇을 하고 교회의 전통이나 종교회의의 결정을 성경의 권위와 동등한 자리에 올려놓거나 성경보다 앞세우던 타락한 교회로부터 말씀이 가르치는 참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여 개혁자들이 부르짖었던 정신은 인간의 제도나 형식과 교회의 전통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앞세우던 죄악에서 돌이켜 신앙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명하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운동 이것이 곧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이 말씀으로의 회복은 16세기 개혁자들만의 사명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 계속 이어가야만 하는 사명입니다.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빈의 개혁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들 가운데 부단히 실천되어야 할 말씀회복 운동입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도록 끊임이 없이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사상과 풍조가 끊임없이 교회 안에 들어와 복음을 변질시키고 지금도 성도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말씀에 비추어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힘쓰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인이 걸어가야 할 바른 길이며 교회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사명입니다. 

개혁은 490년 전 혹은 500년 전 선배들의 개혁운동을 기억하고 각종 세미나를 열고 또는 거창한 기념행사를 벌이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혁은 체육관이나 광장에서 대규모의 집회를 여는 것으로만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개혁은 먼저 개인의 신앙개혁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가정의 신앙개혁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개혁된 개인이 개혁된 교회를 세워가고 그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과 그 가정의 신앙개혁을 통해 종교개혁주일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쌍둥이 형 에서가 받을 장자의 축복을 속임수로 빼앗은 야곱은 분노한 형의 칼을 피해 외삼촌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외삼촌 집에서 삼촌의 양떼를 돌보는 일을 돕던 야곱은 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조건으로 삼촌에게 무보수로 7년을 섬기기로 했던 야곱은 삼촌에게 속아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와 신혼 첫 밤을 치른 후 다시 7년을 봉사하는 조건으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 삼촌 집에서 종처럼 일한 야곱이 약속한 14년을 채우고 11번째 아들 요셉이 출생한 즈음에 가족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삼촌은 일 잘하는 야곱을 놓치고 싶지 않아 더 붙들어두고 싶은 마음에 그제야 야곱을 위해 품삯을 정하였습니다.  야곱은 그 후로 6년간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양떼와 노비와 나귀가 많아진 거부가 되어 삼촌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20년 전에 원한을 샀던 형 에서와 화해를 하기 위해 형이 살고 있는 세일 땅 에돔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대단한 선물을 딸려 사람을 보내어 형의 마음을 달래려고 했는데 사환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 야곱을 마중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야곱은 혹시라도 형이 아직 노여움을 풀지 않고 보복을 할까 심히 두려워 어떻게 형의 마음을 달랠까 전전긍긍하였습니다.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밤중에 얍복강 건너로 보내어 놓고 강 나루터에 홀로 남았던 야곱은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다가 기어코 그 천사로부터 축복을 받고 이름도 이스라엘이라 바꾼 후 다음날 형 에서를 만났을 때 뜻밖에 형의 환대를 받으며 지난날의 형제간 갈등을 말끔하게 해결하였습니다. 

형을 만나기 위해 맘 고생과 함께 딸린 식구들을 과도하게 인도했던 야곱은 드디어 형과의 화해를 이루고 큰 문제를 해결 한 후 일단 긴장이 풀리고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이삭이 계신 고향으로 곧장 올라가지 않고 도중에 쉬어가기 위해 세겜 성에 이르렀습니다.  그 성 앞에 장막을 친 야곱은 장막을 친 그 밭을 그 지역의 실력자였던 하몰의 아들들에게 은 백개를 지불하고 샀습니다.  땅을 잠시 빌린 것이 아니라 매입한 것을 보면 야곱이 그 땅에 당분간 머물러 살며 양떼를 먹이며 휴식을 갖겠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그런데 형 에서와 화해를 하여 한 고비를 넘긴 야곱의 가정에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장막생활이 답답했던지 아니면 성 안의 사람들 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는지 호기심에 끌려 그곳의 여자들을 보러 나갔습니다.  아직 10대의 소녀였을 디나는 성안에 들어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다니다가 그만 그 성의 추장 세겜에게 붙들려 성폭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겜은 디나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녀를 아내로 삼고 싶어 하였습니다.  디나를 자기 집에 붙들고 있던 세겜은 그의 아버지 하몰과 함께 야곱에게 찾아와 디나를 아내로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아들들은 이 말을 듣고 분노가 하늘까지 치솟았습니다.  자기 누이를 창녀처럼 취급한 세겜과 그 집안을 응징하기로 결심한 형제들은 집으로 돌아와 하몰과 거짓으로 약조를 합니다. 우리는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서로 결혼할 수 없으니 만일 우리 누이를 아내로 데려가려면 그 성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제안을 타당하게 여긴 세겜 성 사람들은 즉시 할례를 행하였고 제삼일이 되어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은 통증으로 불편할 때 야곱의 둘째와 셋째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그 성에 들어가 모든 남자들을 살해하고 하몰과 세겜도 죽이고 동생 디나를 데려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이를 더럽힌 세겜 사람들에게 분노한 다른 아들들은 복수심에 불타 그 성에 들어가 노략질하고 모든 아이들과 여자들을 사로잡아왔습니다. 

이런 끔직한 사건이 벌어지자 야곱은 사건의 주동자 시므온과 레위를 불러놓고 너희가 나에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족속들에게 화를 당하게 만들었다고 노발대발하였습니다.  우리는 숫자가 적은데 그 동족들이 연합하여 쳐들어오면 우리 집안은 이제 망하게 되었다며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세겜이 우리 누이를 창녀처럼 대우한 것은 어찌 잘한 일입니까? 하며 그들에게 당한 수치를 마땅히 갚았다는 듯 대답하였습니다.  어찌하였든 이 일로 인하여 야곱의 가정은 일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야곱으로서는 사실 이 일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로 두려움에 싸인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거기서 지내면서 전에 네가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할 때 네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 고 하셨습니다.  그 벧엘은 야곱이 20년 전에 형을 피해 도망하던 때 들판에서 잠을 자던 중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뵈었던 자리입니다.  아침에 일어난 야곱은 베고 자던 돌을 기둥 삼아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나를 아버지 집으로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보호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모든 소유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했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을 뵈었던 그 장소는 야곱에게 특별한 경험의 자리였습니다.  지나온 20년 동안 외로움과 슬픔과 고단한 인생살이 중에도 위로와 힘과 격려가 되는 신앙경험의 자리였습니다. 20년간 삼촌에게 노동을 착취당하고 외사촌 형제들에게 온갖 미움과 시기를 받으면서 설움 속에 살았지만 벧엘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와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기억해 내고 다시금 고독과 아픔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자녀들의 실수로 인하여 걷잡을 수 없는 환란의 폭풍 속에 빠져든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이 복음으로 들렸습니다.  디나의 철없는 호기심으로 시작된 수치스러움과 아들들의 잔인한 보복행위를 보면서 아비로서 자식들을 원망하고 책임을 물었던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번 사건은 자식들을 원망할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했던 자신의 문제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 외삼촌 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결심했던 그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행진하였더라면 이런 불상사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후회가 막심합니다.  형 에서와의 갈등 문제로 고민하며 얍복강 나루터에 홀로 남았던 밤에 하나님의 천사와 밤을 새우며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복된 이름을 얻은 일을 잊었던 야곱입니다. 20년 만에 만난 형 에서가 지난날의 분노를 다 잊고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준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였음을 깜박했던 야곱입니다.  형과의 화해를 이룬 후 그저 안도의 숨을 쉬고 좀 쉬었다 가고픈 마음만 앞섰던 야곱입니다. 그런데 그 잠깐만 머물겠다고 계획했던 세겜에서 이런 수치와 살인극이 벌어지게 되자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에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20년 전 벧엘에서 하나님을 뵙고 감격에 넘쳐 약속했던 그 일을 소홀히 여기고 세겜에 머물러 살면서 자식들에게 이런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였습니다.

이제 야곱의 태도를 봅시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을 들은 야곱은 즉시로 전 가족들과 따르는 식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라 그리고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란 날에 나에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비로소 야곱은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초심을 회복한 야곱입니다. 가족들과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나의 환란 날에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의 가는 길에 함께 하신 하나님’ 그분이 야곱의 하나님이고 그 가정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개혁은 현재의 것들을 모두 파괴하고 전혀 없던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 완전했던 그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개혁은 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삶의 자세를 하나님께로 향하여 진로를 바꿈으로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심한 것은 처음 하나님을 개인의 하나님으로 만나고 고백한 그 경험의 자리로 돌아가는 신앙개혁입니다.  이런 신앙개혁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런 행동은 현재 자신의 자리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이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입니다. 야곱은 20년의 세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변한 삶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벧엘의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었더니 지금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지금 내 가정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모습, 구별된 백성으로서 지녀서는 아니 될 거추장스런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 저곳 삶의 현장에 주렁주렁 달려있습니다.  먼저 집안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려야 했습니다. 외삼촌 집에 머무는 동안 그 지방 사람들이 집집마다 가지고 섬기는 가족 수호신들이 야곱의 집안에도 들어와 있었습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떠날 때 아내 라헬은 자기 아버지가 수호신으로 섬기는 드라빔을 도적질하여 낙타 안장 아래 숨겨두고 시치미를 뗀 적이 있습니다. 라헬은 아버지의 집을 지키는 수호신이 자신의 집도 지켜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 드라빔을 훔쳤던 것입니다. 야곱의 식구들이 야곱의 신앙을 따라 그의 부친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고 믿는 가정이었지만 이런 식의 미신과 우상숭배가 자기 집안에 일상화되었음을 야곱은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모든 이방 신상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합니다. 

야곱의 말에 사람들은 손에 있는 이방 신상과 부적처럼 귀에 걸고 다니던 귀고리들을 빼어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은 그것들을 나무 아래 묻고 세겜을 떠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앙개혁은 이처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를 끊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야곱의 가정은 분명히 야곱의 신앙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이었지만 그 집의 신앙의 호주인 야곱이 이를 묵인하고 지날 만큼 다른 신들을 섬기는 행위가 일상화되었던 집안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가정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가는 우상숭배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화와 풍습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많은 우상들이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교회에서 중직에 있는 교우들의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의 혼사를 앞두고 점집을 찾아 다니며 사주팔자와 궁합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사할 날을 정할 때도 손이 없는 날을 택일한다고 점집을 들락거리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주일에 이사하는 어떤 중직의 가정은 그날이 손 없는 날이라는 말을 듣고 주일예배를 거르고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방신상을 제거한 다음에는 자신을 정결케하고 의복을 바꾸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과 가나안 사람들의 풍습에는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종교 관습에 따라 몸에 이상한 모양을 그리고 새기기도 하였으며, 다산을 목적으로 남녀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는 마술적 풍습과 동성애가 흔하였다고 합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단산한 자기 어머니 레아에게 드리려고 들에서 합환채를 가져왔던 적이 있습니다.  라헬이 그 사실을 알고 르우벤에게 그 합환채를 양도받는 조건으로 야곱이 그날 밤에 레아의 침소로 들어가도록 라헬이 양보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합환채를 사용하면 아들을 잉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런 미신적인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집안의 여인들이 이방인들의 풍속을 따르는 미신행위가 일상화 되었음을 짐작합니다.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몸을 정결하게 하고 옷을 바꾸는 일은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새로운 마음 가짐을 가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말은 과거의 잘못된 삶의 습관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변화되라는 신앙적인 결단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정결한 집안이라 자부하면서도 정결한 할례예식을 빌미로 끔직한 복수극과 약탈을 벌인 아들들의 행동이나, 세겜 성 사람들의 풍속과 그 사람들의 타락한 생활에 끌려 그 성으로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한 호기심에 가득 찬 디나의 행동 등은 이방인들의 습관을 그대로 따르는 모습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오염이 되어버린 가정의 신앙을 새롭게 하면서 처음 하나님을 뵈었던 그 감격의 자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야곱의 가정이 벧엘을 향해 세겜을 떠날 때 야곱이 염려했던 주변 족속들의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의 가는 길에 함께하시고 그들을 두렵게 하시니 아무도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종교개혁기념주간을 지나는 우리 교우들이 야곱 가정의 신앙개혁을 통해 개인의 자리를 살피고 가정의 형편을 살핍시다.  하나님을 향한 초심을 회복하는 운동 이것이 야곱 가정의 신앙개혁이었고 우리의 신앙개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이방 신, 하나님 말씀과 미신, 주술과 같은 종교적 습관을 혼합하여 따르는 신앙행태는 속히 버리고 정결케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세속적 가치관을 동일한 위치에 두는 불경한 삶의 태도로부터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그리스도로 새 옷을 갈아입는 신앙개혁이 내 자신과 우리 가정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 하나님을 뵙고 눈물 콧물 흘리며 감격하고 감사했던 그 말씀의 자리, 약속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변치 않는 약속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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