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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난관과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수 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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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여호수아 14장 6절~15절
제  목 : 삶의 난관과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1. 왜 갈렙인가?

최근 이탈리아 정부는 평균 36세가 되도록 부모 슬하를 떠나려고 하지 않는 미혼 남성들을 위하여 약 2조 6천억 원의 국고를 지원하여 그들이 부모로부터 벗어나서 홀로서기를 하도록 지원할 것이라는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부모가 해 주는 밥을 먹고, 부모가 사주어서 더러워지면 빨래까지 해주는 옷을 입고, 용돈까지 쥐어주니, 너무 너무 편해서인지 도무지 홀로서기를 하려하지 않고 더욱이 가정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국가적인 문제라고 여겨서 그런 결정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디 이것이 이탈리아의 상황일 뿐이겠습니까? 나이가 차고 넘치도록 부모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소위 “신인류”의 문제는 세계적인 상황입니다. 미국의 경우도 30세 미만인 청년의 3분의 1이 의식주를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근 뉴스위크지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네버랜드의 나르시시스트”라고 했습니다. 즉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고 어린아이로만 남으려는 현상이라는 것이죠.

강한 어른이 되지 못하고 유약한 어린아이로 머물려는 것은 다른 데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과 나아가 기성세대까지도 조금이라도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리거나 그것을 포기해버리는 경우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만나면,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기보다, 또 때로는 그것을 둘러서 우회하려는 지혜를 짜기보다,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치맛바람 바지바람이 직장 입사 시험을 치르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시대의 현실에서 강하게 도전을 주는 인물이 바로 오늘 본문의 갈렙입니다. 점점 유약해져가는 세대, 앞을 향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젊은이들, 안정 지향적(安定指向的)으로만 살려고 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점점 안정적이고 편한 것을 원하는 저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2. 인생은 장애물 경기!

1) 갈렙의 개인적인 장애물들

지금 여러분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 뭔가가 여러분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고, 그 무엇인가에 갇혀있는 것 같고, 그래서 혹 주저앉아 있다면, 그렇게 여러분을 좌절케 하고 낙망케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문제인가요? 이 각박한 사회 환경입니까? 질병 등 육신의 약함입니까? 누군가의 비난이나 모함 때문인가요? 한 기자가 전도자 무디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물음에 무디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보다도 무디라는 작자 때문에 가장 골치를 썩고 있소.” 또한 잭 피아라는 사람도 “내 인생을 돌이켜보니 많은 장애물을 만났었다. 그 중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고 낙심케 하는 장애물은 우리의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러분 안에 있는 장애물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갈렙만큼 그 자신 안에 불리한 조건들을 많이 가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장애물들을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➊ 우선 오늘 본문의 현재 상황에서 볼 때, 갈렙의 최대의 장애물은 그의 나이였습니다. 현재 갈렙의 나이는 85세입니다. 요즘 우리 형편으로 볼 때, 만약 조금 일찍 퇴직한 사람이라면 현역에서 물러난 지 30년, 또 적게는 20년이 지난 나이입니다. 흔히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경로대학에서도 이 말을 자주 하지요. 그러나 정말 숫자에 불과합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이 자리에 계신 80세를 넘기신 어르신들도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저의 이야기를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는 요즘 예전과는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저의 체력 때문에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대학생 시절, 11박 12일 동안 농촌봉사를 할 때, 하루 한 두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하면서도, 낮에는 논과 과수원에서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마을 주민들을 모셔서 전도 집회를 했는데도 별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잠을 하룻밤만 조금 모자라게 자도 그 다음날 하루 종일 마치 꿈속을 헤매듯 몽롱하게 지냅니다. 그리고 돋보기의 필요성을 느낄 정도로 성경이나 설교 원고를 보는 것이 불편해지고 있습니다. 제 나이가 느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나이에 제가 벌써 저의 나이를 느끼고 있다면, 85세의 갈렙 어르신은 아마 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자신의 나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갈렙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내가 85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가 정말 자신의 나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진짜로 예전보다 더 강건해졌다는 말일까요?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해보면, 갈렙이 자신의 나이를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때문에 나이를 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인생이 자신의 삶의 장애물 앞에서 느끼는 마음은 나이의 고하를 막론하고 동일합니다. 삶의 난관과 불가능을 만나는 것은 젊은이나 나이든 사람들이나 매 한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난관이나 삶의 걸림돌에 대해 느끼는 것도 동일합니다. 즉 젊다고 해서 삶의 난관이나 장애물들이 만만하게 여겨지고, 나이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커 보이고 힘들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삶의 장애물들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사람을 낙심케 하고 좌절케 만듭니다.

그런데도 그가 오늘 본문에서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자신이 변하고 늙은 그것 때문에 도리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더 강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즉 육신적으로는 더 약해졌지만, 약해졌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예전보다 더 커졌기에 갈렙은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갈렙은 나이라는 최대의 장애물을 안고 있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였고 그래서 그는 더 강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날로 약해져 갑니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아져 갑니다. 그러나 약해지고 할 수 없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결국 하나님의 힘이 우리에게 더 머물게 하기에 우리는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➋ 갈렙에게는 85세라는 그의 나이 외에 또 다른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늘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거나 혹은 종종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혈통을 중시하는 이스라엘 사람 속에 있는 ‘비이스라엘인’ 즉 이방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인 에돔 족속 중의 하나였던 ‘그니스’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니스’ 족속이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엄연히 차별받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도 그렇게 좋은 이름은 아니었지요. 그의 이름은 ‘개가 짖는다’고 하는 의성어에서 왔거나, 아니면 ‘개가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것’을 뜻하는 의태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속어로 ‘남자 매춘부’를 뜻하는 수치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왜 그에게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까요? 부모가 이런 이름을 붙였을 리는 없습니다. 부모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던 종이었거나, 아니면 이스라엘 가운데로 버려진 이방인 아기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도 모릅니다.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갈렙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비주류였고, 불행한 성장 과정과 부끄러운 과거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성공하기에 조건이 너무나 좋지 않은 사람이었지요.

이렇게 출신 성분이나 자란 환경 등이 삶의 걸림돌이 되고, 그것 때문에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나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갈렙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좇아 내리이다.” 이 두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의 출신 성분이 걸림돌이 되고, 그의 가정과 성장 배경 등도 그를 약하게 만들어, 작은 난관도 넘어서지 못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확고하게 붙들었기에 남다른 성공의 길로 갈 수 있었습니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은 최악이었지만,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얻은 것이 그를 자신 있고 당당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갈렙은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의 환경이나 여건보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더 의지했고, 그것이 그가 장애물을 뛰어 넘을 수 있었던 비결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나 외모나 학력이나 여러 가지 조건들이 걸림돌이 됩니까? 갈렙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붙듦으로서 그 불리한 조건을 뛰어넘었습니다.

2) 환경적인 장애물

그런데요, 갈렙이 이렇게 자신의 개인적인 장애물을 뛰어 넘을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앞에 놓여있는 환경을 뛰어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갈렙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총회 앞에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하는 ‘헤브론’, 즉 ‘기럇아르바’는 정말 불가능 그 자체였습니다. 그 이유는 ‘기럇아르바’가 ‘4개의 도시’라는 뜻으로, 단순한 4개의 성(城)이 아닌 아주 크고 견고한 4개의 요새로 구성된 거대한 도시국가였기 때문입니다.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기럇아르바는 산 위에 있는 동네로서 아래 평지에서부터 그리로 공격해 들어가는 사람들이 볼 때 상대적으로 더 높아 보이고 더 커 보이고 더 어려워 보이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키가 큰 사람이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 서 있으면 그가 더 커 보이는 등 위압감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이 헤브론에는 아낙 자손이라 하여 키의 평균치가 이스라엘에 비해서 최소한 20~30cm는 더 큰 거인 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가데스바네아의 정탐꾼들은 그들과 자신들을 비교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메뚜기와 같습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갈렙이 넘어서야 할 기럇아르바는 그 자체로서 난공불락, 불가능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기럇아르바가 이렇게 견고하고 큰 도시 국가이며, 고산지대에 있는 위압적인 성채이며, 그리고 거주민들이 거대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갈렙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있습니다. 갈렙은 이러한 환경적인 문제를 뛰어 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환경적인 장애물을 넘게 만들었을까요?

몽골에서 시작하여 세계를 지배한 칭기즈 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었고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와 노인까지 합쳐서 200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 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모두 없애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칭기즈 칸이 되었다.

칭기즈 칸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 칭기즈 칸처럼 초인적인 의지로 삶의 장애물을 넘어서고 스스로 일어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도로 하여금 삶의 난관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갈렙으로 하여금 그 불가능한 환경을 뛰어 넘게 했습니까? 그것은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이라고 하는 말씀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갈렙은 자신이 처한 환경보다 하나님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알고 믿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이지 ‘환경이 얼마나 어려우냐, 쉬우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렙은 자신이 가진 장애물이나 그의 앞에 떡 버티고 있는 환경의 문제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더 컸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적은 사람은 사람이 더 커 보이고, 일이 더 커 보이고, 자신의 환경이 더 커 보입니다. 그러나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나고, 아무리 풀기 어려운 문제 앞에 있다고 해도, 또 아무리 골치 아픈 환경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오히려 작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갈렙은 자신 있게 난공불락의 성읍인 기럇아르바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면 도대체 어떤 일이 걸림돌이 되겠으며, 어떤 사람을 넘어설 수 없겠으며, 어떤 문제를 풀 수 없겠습니까? 갈렙은 자신이 처한 환경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환경을 뛰어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의 안팎의 장애물을 뛰어넘으시기 바랍니다.

3. 믿음으로 도전하십시오!

말씀을 시작하면서, 젊은이들 뿐 아니라 우리 시대 전체가 점점 유약해져서 작은 어려움도 넘어 서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만났던 갈렙은 그 보다 더 많고 깊은 장애와 난관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습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에 보면, 갈렙은 헤브론 즉 기럇아르바를 성공적으로 점령했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정복 전쟁에 대한 도전을 주어서 젊은이들과 다른 지파 사람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잘 해 내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갈렙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 앞에 난관이나 삶의 장애물들, 그리고 불가능한 것들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젊음이나 노인이나,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삶의 난관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난관은 도리어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갈렙이 정복한 헤브론은 이후 유다 지파의 핵심 지역이 되고, 바로 그곳이 예루살렘이 되고, 그곳에 성전이 세워지고, 그리고 복음과 교회의 중심이 됩니다. 즉 한 사람이 믿음으로 그 난관을 극복할 때 그로 말미암는 결과는 그 자신과 자신의 후손을 훨씬 뛰어넘는 지속적이고 넓은 영향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젊은 여러분, 또한 삶의 난관 앞에서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난관과 인생의 장애물의 실체는 결코 그 자체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것이 최고의 난관이자 장애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삶의 여러 난관과 장애물들을 뛰어넘을 뿐 아니라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여러분의 헤브론, 즉 기럇아르바까지 축복의 기업으로 바꾸시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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