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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막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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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막 2:13-17)

우리의 교회생활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시험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생활을 통해서 만나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인간적 실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반응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실망을 준 교회안에 어떤 사람 때문에 “나는 저런 사람이 있는 한 이 교회에 나오고 싶지 않다” 그래서 교회를 옮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저런 사람들이 크리스챤이라면 “나는 예수 안 믿겠다” 그래서 아예 교회를 등지고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갈등은 우리가 가진 교회에 대한 너무나 지나친 이상적인 기대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가장 교회가 이상적이고 역동적인 교회시대가 있었다면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초대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라는 표어를 붙이기도 합니다.
이런 초대교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영적이고 모범적인 교회 중에 하나가 에베소교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개척하였고, 그곳에서 3년 이상을 머물면서 집중적으로 선교를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교회는 아주 좋은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이런 메시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엡4:25절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이웃들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고, 28절에서는 “도적질하는 자는 도적질하지 말고”라고 했고, 29절에서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무엇 때문에 이런 권면을 에베소교회에게 했으리라고 느끼십니까?
그것은 에베소교회 교인들 가운데도 거짓말쟁이도 있었고, 도적도 있었고 사기도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생활 하다가 거짓말하고, 도적질도 하고, 사기도 치고, 또 이상스럽게 말해서 상처를 주는 그런 교인들을 만나거나 경험하거든 너무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오늘 말씀의 결론인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예수님의 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면, 어떤 사람들을 부르실 것이라고 느끼십니까?
지금도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시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누가 모여야 한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의인이 모여야 합니까?, 죄인이 모여야 합니까?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인의 집합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냐 나는 병든 사람을 부르러 왔다”
따라서 “교회는 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병원, 소문난 병원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소문난 병원에는 수많은 각종 병자들이 다 모여듭니다.
따라서 좋은 교회란, 각종 죄인들이 모이는 곳, 각종 병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병원은, 병자들만 많이 모이는 곳이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소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 병원에서는 “병자들이 잘 낳는다, 무슨 병이든 잘 치료를 받는다”는 소문이 나야합니다.

그런데 이 병을 고치는 과정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오래 동안 고치는 사람도 있고, 빨리 고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와서 이상한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병 고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병자들이 병원 갈 때 어떤 기대를 하겠습니까?
누구나 자기의 병 고칠 기대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병자들이 늘 병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 병원에 가면 “병자인 나를 어떤 식으로 다룰까? 좀 친절하게, 좀 나를 잘 존중하면서 다뤄 줄까? 막 다룰까? 가급적이면 내가 치료받는 과정에서 나를 잘 다뤄 주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런 병자들과 죄인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모본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죄인이지만 우리가 우리 이웃들을 접촉할 때,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야 하느냐에 대한 모본을 제시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 이웃들을 접촉해야 할까요?

1.예수님이 사람들을 보시는 방식으로 우리도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예수님이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의 랍비들은 지나가다가 세리를 만나면 외면하고 지나갑니다.
왜냐하면 세리들은 로마에게 붙어서 세금을 걷어 내기 위해 동족들을 착취하는 자들로서 유대사회에서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정상적으로 걷는 세금이 두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세와 관세입니다.
그리고 정세에는 토지세, 소득세, 인두세라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이것만해도 백성들은 죽을 지경인데, 그 당시 세리들은 멋대로 또 한가지 관세라는 것을 붙였습니다.
이 관세는 로마정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전부가 세리들 자기 주머니로 들어갔는데, 그 가운데는 길을 통과 할 때 받는 통과세, 마차 끌고 가면 마차 세를 부과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세금을 강제집행하기 위해서 그 동네 살인 청부업자와 세리들은 결탁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 세리들을 만나면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고, 상대하지도 않았고, 또한 세리들은 법정증인으로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랍비인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이 세리를 일부러 보셨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세리를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봤을까요?
유명한 주경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였던 레위 안에서 위대한 전도자 마태를 보았다”고.

여러분이 레위라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마태라는 사람은 잘 아실 것입니다.
여기 레위라는 사람과 마태는 동일한 사람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마태라는 이름은 이 사람이 변화된 다음에 붙 여진 새로운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세리였지만, 예수를 만나 변화된 이후에 그는 관리의 특유한 관찰력을 가지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정확하게 관찰하여 우리에게 그의 생애를 증거하는 마태복음서를 남겼습니다.
따라서 만약에 예수님이 “세리, 넌 상대하지 않아”하고 그냥 지나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되면 “얼마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놀랍게 쓰임을 받을 수가 있는가?”하는 이 가능성의 안목을 가지고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있는 모습대로만 보시지 않고 항상 그렇게 보십니다.

베드로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표적인 다혈질의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종잡을 수 없는, 격정적이고 충동적인 사람, 신뢰하기 어려운 인물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 예수님은 첫 번째로 그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시몬아 너를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육중한 반석의 이미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건 시몬에게 어울리지 않는 별명입니다.
충동적이고 급하고, 조변석개하고, 계속 변하고,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으로 보시지 않으시고 주님의 손에 붙들렸을 때, 초대교회가 세워지는 기초같은 역할을 할 위대한 전도자 베드로의 가능성을 시몬 안에서 보셨습니다.
우리들 역시 오늘부터 예수님의 눈을 가지고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우리는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시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14절 하반 절을 보면 “저희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의 심장과 안목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는 그 분이 누구입니까?
“나를 좇으라”고 초청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 좇아가면 우리는 영생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첫째는 예수 만나고, 둘째는 예수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제일 먼저 할 일은 예수 만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시간이 흘러가니까, 잘 처세하고 잘 적응해서 교회에서 직분도 받고, 그럴듯한 감투도 쓰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정말 오늘날 현대교회의 비극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쫓아가는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을 쫓아가면 내 삶에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고, 풍성함이 있습니다.
물론 시련도 있습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흔들리지 아니하는 소망, 천국의 희망, 내 마음속의 시련과 고통을 이기는 저력과 비전과 능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야~ 아무개도 예수님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우리들의 전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가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를 만나 그분을 따라가 보니까 그 삶이 놀랍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시련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고, 내 삶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세계관이 바뀌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나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만나 변화된 나의 체험을 소개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전도한다면서 자꾸만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전도한다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예수님에게서 멀리 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서에도 그런 증거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가나안 여인이 생각나십니까?
이 불쌍한 여인이 예수님 만나려고 왔을 때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제자들이 방해 요인이 되어 여자를 쫓아버립니다.
또한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님 만나려 하자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빛을 보고싶어서, 그가 생명을 얻고싶어서, 예수님 앞에 나오는데, 그 일을 차단한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제자된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저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데, 최대의 방해물은 부끄러운 교회의 모습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때문에 예수 믿지 못하고, 나 때문에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주변의 이웃들이 예수님 만나는데 내가 방해요인이 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에게 내 주권을 이양하고, 예수를 나의 주인으로 나타내고, 주로 증거하는 그것이 전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이렇게 막힘 없는 도구로 저와 여러분이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우리가 이웃들을 정말 주님 앞으로 인도하려면 예수님처럼 사람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야 합니다.
15절 읽겠습니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와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예수 만난 감격으로 그 동네에 큰 잔치가 열렸습니다.
여러분, 이 잔치에 어떤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라고 느끼십니까?
많은 세리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구전율법을 따르지 않고 율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정죄했는데, 바로 그 정죄 받고 있는 있던 죄인된 그 사람들이 다 모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든 간에, 주님의 심정으로 모든 사람을 같이 끌어안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함부로 사람들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으매”라는 말씀 앞에, 우리 모두는 예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선 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을 받아들이느냐? 수용하느냐? 하는 것은 전도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예수님은 사회가 내버린 사람들을 다 편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인 저와 여러분의 본분임을 기억하시고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그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왜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웃들에게 전도하지만 왜 힘이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선입관과 편견을 가지고 대하고,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눈으로 보시면 언짢아 보이는 이웃들의 눈에서도 빛나는 내일의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 주님의 가슴으로 그들을 섬김으로, 내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경험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우리의 이웃들이 탕자처럼 돌아오기 전에 내가 집안에 있는 탕자일지도 모릅니다.
헨리 나우엔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웃들을 섬기면서 그 동안에 내가 탕자였다. 내가 탕자였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새로워질 때 가정이 새로워지고, 우리가 새로워질 때 교회와 민족이 새로워지고, 이웃들을 향한 우리의 전도가 능력을 경험하며,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우리 교회 안에 풍성하게 넘칠 줄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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