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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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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막 2:1-12)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고 하는 시가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열어 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여러분은 진실한 친구가 몇 명이나 있습니까?
인생에서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특히 고난 중에 있을 때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소중합니다.
좋은 친구인지 아닌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어려움에 처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고난에 처해지거나 심한 질병에 처하면 친구들이 멀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열심히 운동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운동을 하는 분들을 보면 두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 건강한 사람들이지만 더 건강하기 위하여 운동하시는 분들입니다. 건강한 중년의 부부들이 함께 운동합니다. 건강하지만 건강을 지키고 더욱 건강하기 위해서 투자하는 것입니다. 특히 노년에 부부가 함께 건강하게 운동하시는 모습을 보면 참 보기가 좋습니다.

다음은 건강을 잃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운동하시는 분들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번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서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아침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가다보면 그시간에 꼭 걸으시는 뇌성마비환자를 봅니다. 걷는 것이 전투입니다.
저는 요즈음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영력도 떨어지는 법입니다. 건강해야 신앙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건강을 잘 투자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운동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사람들뿐 아니라 유대인들도그래서 정신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강을 아주 강조합니다.그래서 정결법,식사법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규칙들이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 병에 걸리는 것을 아주 불결하게 여깁니다. 몸의 정결에 대해서 아주 강조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씻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그래서 탈무드에 보면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3가지를 강조합니다. 씻기,기름바르기,규칙적인 운동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선언이 잇습니다. “목욕탕이 없는 도시에서 사는 것은 금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머리의 불결은 눈을 멀게하며 의복의 불결은 정신이상이 생기게 하고 신체의 불결은 종기가 나게하고 몸을 짓누르게 한다.그러므로 불결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식사도 좀더 먹을까 하는 때에 음식에서 손을 떼고 변기가 있을때에 지체하지 말라.

그러나 이런 정결법 식사법 건강관리법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렸습니다.오늘 본문에서도 중풍병이라는 질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불완전한 세상은 인간의 아무리 건강을 위해 노력하려도 건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많은 병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그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누구보다도 정결하기를 노력하고 건강을 신경쓰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데 많은 병에 걸렸습니다.

유대인들의 질병이 사복음서에 소개되는 것을 보면 소경,혈루병,한센병(문둥병),손마른자,혈루병,앉은뱅이,중풍병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이 자주 소개되고 있습니다.
중풍병은 의학용어로 “뇌졸증”이라고 합니다.갑자기 졸지에 쓰러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혈관이 막히거나 터지는 것입니다.흔히들 “바람맞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마비가 생기거나 의식을 잃거나 언어장애가 일어나는 병입니다.이 중풍병은 가장 중요한 원인이 고혈압이라고 합니다.그리고 당뇨,심장병.흡연,비만,과음등이 누적되다가 결국은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자주 소개되지만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중풍병으로 고생합니다. 우리나라 뇌졸중 사망률이 세계최고수준이라고 합니다. 인구10만명당 뇌졸중 사망률은 우리나라가 85.5명이라고 합니다. 미국이 56.9명이라고합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중풍병자는 침상에 누워서 지냈습니다.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움익일 수 없는 중증의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의 도움으로 깨긋함을 얻게 되엇습니다. 가족이 있었을 것인데 가족들의 도움보다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보면 믿음의 가족들이 귀하구나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도 이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좋은 일을 많이 합니다.

얼마전에 헌혈하는 사람들의 통계를 낸 것을 보니까 기독교인들이 월등하게 많앗습니다. 불교 천주고 기독교 순서인데 불교와 천주교를 합한 숫자보다도 월등하게 더 기독교인이 많은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 장애인을 도운 사람들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이 친구들이 도움의 정성이 얼마나 극진한지 모릅니다.
친구들은 한 중풍병자를 네사람에 메워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옵니다.무리를 인하여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자기도 아니고 친구이고 너무 방해꾼이 많으면 그냥 포기할 수 있습니다. 돌아갈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그렇지 않앗습니다. 예수님께서 서 계신 곳의 지붕을 뜯었습니다.거기에 구멍을 내어서 침상을 달아서 내렸습니다.

유대인들 대부분의 지붕은 평평합니다. 계단을 만들어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거기서 묵상도 하고 수양도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과일이나 농산물도 말리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텐트를 피고 자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친구들은 지붕을 뜯었습니다.그리고 거기에 구멍을 냈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렸습니다.예수님께서 이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저희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와 전신불구가 되어 전허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런 중풍병자를 예수께로 데리고 온 네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라는 말은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셨다'라는 말입니다. 과연 이들이 주님의 인정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로 인해서 중풍병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기 친구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 4명의 친구들은 무엇보다도 우리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비록 장애가 있고 수고는 있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치료하여 주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주님 앞에 환자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께로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 그 자체를 주님께서는 중요한 믿음으로 인정하십니다. 오늘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중풍병자와 같이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완전합니다. 주님은 죄짓던 이 모습 이대로를 부르시고, 주님께나아오기만 하면 새로운 생의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이 믿음에는 축복이 담겨져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이 일하십니다.

친구에게 진정한 도움은 무엇입니까?
내가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제한적입니다. 친구를 내힘으로 도와주는 것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사람을 도우시면 엄청난 도움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먼저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중풍병자이든 사업에 실패하였든 나는 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도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나 무조건 다 도울 수 없습니다. 도움을 구하는 자를 돕습니다. 도움을 찾는 자들을 돕습니다. 시편121:1-1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제 우리가 11월 마지막 주일은 이웃초청축제의 날로 지킵니다. 그날 여러분들의 이웃 친구들을 주님께 데리고 오시기 바랍니다. 그때 먼저 본문의 친구들처럼 믿음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기만 저들의 인생이 변하고 축복된 새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라고 하는 확신과 기대감을 갖고 모시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친구들의 믿음은 행함이 따르는 실천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친구를 주님께 데리고 가는 일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큰 교회에서도 함께 병든 자를 메고 갈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 계획을 말할 수 있고 좋다고 박수를 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내가 직접 추진하는 일,직접 수고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는 뒷짐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행함의 믿음”을 실천하였습니다. 구제하자,사랑을 실천하자,선교하자 누구나 말로는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헌신,가장 큰 헌신이 무엇입니까? 몸으로 행하며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들로 함깨 웃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그들과 울고 웃는 것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십시오.
주님이 심판하시는 날 우리 중에 양이 있고 염소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는 양은 어떤 성도입니까? ‘내가 주릴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합니다.
그러자 의인들이 말을 합니다. “주여 어느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때에 나그되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입혔습니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습니까?
그러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라고 합니다. 여기 친구들은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우리 주님은 보십니다. 그러나 돕고자 할때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많습니다. 4명의 친구들도 중풍병 친구를 도우려고 할때에 장애물들이 많았습니다.
이 친구들은 장애물을 넘어선 창조적인 도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때에 집의 지붕을 뜯어버릴 정도의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거기 모인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칭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무모하게 행동하는가? 지붕을 뜯었으므로 물질적인 손해도 따르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를 사랑하는 믿음 앞에 이런 장애물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 속에 실천적인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희 교회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모임이 매주일 목요일마다 있습니다. 독거노인들 불우노인들을 찾아가서 간식과 반찬을 전해드리고 기도하여주는 그야말로 작은 사랑의 실천의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적으로 보면 이런 작은 실천의 시간이 우리 주님에게는 작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믿음으로 행하였다면 그 일이 곧 큰 일이 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이런 사랑의 실천을 잘 갖고 있는 분들도 잇습니다. 참 감사하고 고마운일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이런 시간을 더욱 적극적으로 기회를 찾아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어떻게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까?
이제 병자를 치유하시는 만왕의 왕 되는 우리 주님의 역사하심이 소개됩니다.
첫째 먼저 영적인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본문 5절에는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앞으로 네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지 않고, 이미 네 죄를 사함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화살이 과녁에 빗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탈선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정상으로 사는 생활, 빗나간 생을 사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순종할 수 있는데 그래서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하는 짓마다 행동마다 하나님의 뜻을 빗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으로서 우리의 “죄를 사하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인간이 노력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 죄를 용서받는 일입니다. 얼룩말이 그 반점을 스스로 지울 수 없듯이 표범이 그 점을 스스로 고칠 수 없듯이 우리 인간이 스스로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죄는 닦여지지 앟습니다. 물론 “깨달음”은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을 통하여 조금 선하게 조금 더 도덕적으로 살게는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좋은 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고 마음의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죄를 해결하여 주시고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죄를 사해주십니다.
죄를 사해주시는 그분의 권세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전서 1장18절에서 “십자가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주님의 권세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 위에서 쏟으시고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합니다.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사하여 줍니다. 죄는 반드시 사망과 죽음을 통한 댓가를 분명하게 지불해야 공의의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 보면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반드시 그 죄를 위해 피흘림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양의 피를 흘리므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는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하시고 우리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신 것을 믿을 때 믿음 때문에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그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인류의 죄가 법적으로 용서받고 사유함 받은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죄사함을 믿는 자마다 받게 됩니다. 죄사함의 은혜 그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자유합니다. 우리의 삶이 새삶이 됩니다. 죄사함의 은혜와 믿음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하고 바라볼 사람은 어떤 서기관들입니다.
6절에 보십시오.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죄사함의 말이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사할 권세는 하나님 박에 없는데 예수님께서 죄를 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사들입니다.
이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었고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자기들의 지혜가 우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을 수 없게 하였고 제한한 것입니다. 이들은 지성적인 오류를 범하고 주님께 범죄한 것입니다.

이들의 지성적인 오류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하십니다. 지성적인 생각의 오류는 바로 변화되지 못한 마음,악한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런 악한 마음이 오늘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주님을 제한하고 믿음 생활을 방해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물론 우리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시간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주목하십니다.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는 서기관들을 우리 주님께서 보시고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책망하십니다. 믿음을 제한하고 주님이 하나님되심을 온전하게 믿음으로 바라보셔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확신하여야 할 것은 죄사함의 확신입니다. 주님믿음으로 모든 죄가 사하여 졌습니다.

둘째, 육체적인 치유의 축복을 주십니다.
본문 11절에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12절에 보십시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 나가거늘‘이라고 합니다.
여기 먼저 죄를 사하여 주시는 영적인 축복을 베풀고 나서 육체적인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체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체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복음 기독교의 우선순위는 그 영혼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죄사함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적인 필요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또 하나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차적으로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고 구원하는 일에 열심을 갖고 순종하여야 합니다.그러나 다음에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의 육체적인 필요를 무시하지 말고 함께 채우는 일에 또 같이 순종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 개인적으로도 우리의 육체를 잘 돌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적으로 우리의 마음 영혼을 잘관리하는 것이지만 육체의 관리 돌봄도 주님의 뜻이비다. 내 몸은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내몸은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여야 할 귀한 도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할수만 있다면 병에 걸리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잘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건강한 육체를 위해서 식사도 잘하고 깨끗이 잘 씻고 운동도 잘하고 수면도 잘 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적인 노력과 수고말고도 교회가 함께 해야 할 과제도 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의 육체적인 치유와 회복을 위해 구체적으로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 교회 새가족 중에 얼마전에 간이식수술을 한 성도님 한분이 계십니다. 동생이 간암에 걸려서 죽을 지경에 도달하여 누군가 간을 이식하여주면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남동생을 위하여 간이식수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겟지만 우리 몸의 장기중 간은 좀 잘라주어도 재생되기 때문에 생활하는데는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술한 사람은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수술한 뒤에 가보았더니 굉장히 고통스러워하고 계시고 지금 회복의 시간도 맣은 고통의 시간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생명을 살린 장기기증은 굉장히 의미가 있고 소중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펼치는 운동 중에서 장기기증 운동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기전에 우리의 장기를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무료로 기증하는 운동입니다. 한국에 장기기증을 하는 것을 보면 불신자들은 전체의 10%박에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90%가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장기기증을 하시는 분들보면 온몸을 다 바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화장을 하고 한줌의 재로 가는 것입니다.
한평생 주님을 위해 몸을 바치고 살다가 그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때에는 이웃들에게 준다면 볼수 없는 사람들이 봅니다.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듣습니다. 불편한 사람들이 많은 유익과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고 이런 좋은 일들에 여러분들의 육체가 귀하게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주님을 보십니다.
한 믿음으로 가정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교회를 살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보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십니까? 생명의 주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실천하는 산믿음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 사랑의 사람을 통해서 오늘도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사람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귀한 도구로 드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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