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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욘 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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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욘 4:10-11)

생명을 구하지 못한 아픔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오빠의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형제가 있다면 반드시 살려내야 합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누구든지 죽음의 길로 갑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 심판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롬5:17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죽은 후에 심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길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친히 십자가에서 담당해 주시고 저를 믿음으로 영원한 사망에서 생명을 얻는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성취해 주신 것입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전도를 통해 생명 얻는 은혜를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형제와 자매가 그리고 부모와 자녀들이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9:16) 라고 했습니다.

원수에게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도 잃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차 대전 후 독일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마틴 니뮐라’라는 목사가 '2차 대전 책임 백서'라는 것을 발표해 굉장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에 대해 그는 히틀러를 비방하기보다는 독일 교회와 독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로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가 히틀러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동일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지나가는데 제 뒤에 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께서 '너는 왜 나를 믿지 않았느냐?'하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아무도 저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소리가 익숙해서 돌아보니 그는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이 사건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때까지 그가 죽기를 바란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은 것에 모두 책임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이 자유롭지 못하고 삶이 공허하고 불안하고 뒤틀려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자리에서 악을 쓰고 있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느끼는 삶의 절망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책임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읽으며 사람이 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흥미로운 기적이야기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메시지가 그 속에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되지요.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요나는 풍랑에 던져지고 고기 뱃속에서 들어가는 등 모진 고난과 죽음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고기뱃속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요나에게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것을 선포하라.”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외칩니다. 그러자 니느웨 성의 왕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니느웨성에 내리려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바라본 요나의 반응이 4장 1-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는 굉장히 못마땅하여 화를 내고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떼를 씁니다.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았으니 난 적국이 잘사는 꼴을 보기 싫으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낳겠다는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성냄이 어찜이뇨? 라고 말씀하지만 그 말씀에 대항이라도 하듯 요나는 니느웨성이 망하는 꼴을 끝까지 지켜보겠노라고 성 동편 언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니느웨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날이 밝아 오자 햇빛은 견딜 수 없이 따가웠습니다. 요나는 작열하는 태양으로 인해 죽을 지경입니다. 요나가 햇빛으로 인해 힘들어 하자 하나님은 박넝쿨을 자라게 하시고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나가 그 그늘에서 즐거워하며 니느웨성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요나서 어디에도 요나가 기뻐하였다는 말이 없었는데 요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박넝쿨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다음날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넝쿨을 시들게 하시고는 뜨거운 동풍과 햇빛을 보내셔서 요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그 박 넝쿨이 없어짐을 아쉬워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또 불평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박 넝쿨을 아쉬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심었느냐? 네가 가꾸었느냐? 그렇지도 않은 박 넝쿨을 아까워하면서 왜 사람은 귀하게 생각지 못하느냐?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12만명이나 있는데 많은 짐승들도 있는데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겠느냐?”

요나서를 연구하다보면 결론이 참 애매합니다. 요나서 마지막 구절 4장 11절은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겠느냐?” 물음으로 끝이 납니다. 제가 요나서를 기록했다면 요나의 응답을 한 구절이라도 더 붙였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요나가 드디어 깨닫고 응답하니라 아버지 마음을 이제야 알았나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아멘-”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러나 요나서는 결론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요나서 마지막절은 네가 기록하라는 겁니다.
네가 어떻게 순종했는가를 가지고 아버지 앞으로 오라는 겁니다. 요나서가 기록된 이후 수천년 동안 우리 모두는 마지막 절 그리고 요나서 후편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나서는 정말 우리에게 귀중한 것, 정말 우리들이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은 가치관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 것인가가 분명해야 합니다.

내게 소중한 것에 가치를 두고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내게 가치 있는 것들에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갑니다.
나와 관계 된 것, 나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와 관계되어 있지 않고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 넝쿨을 붙잡고 삽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붙잡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가치있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민족과 나라와 공동체가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는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 내 마음에 합당한 것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치관이 타락하면 어찌되겠습니까?
①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을 기뻐하지 못합니다.
② 마땅히 싫어해야 할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③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고 Yes 해야 할 때 Yes 하지 못하고, No 해야 될 때에 No 하지 못합니다.
④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소중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요나가 아끼는 것은 하루 밤에 피였다가 시들어 버린 박넝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은 생명입니다. 니느웨성의 12만명의 죽어가는 영혼들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성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신 것을 요나는 못마땅하고 불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요나는 도저히 적국이며 타락한 니느웨성 사람들이 용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성의 십이만의 영혼을 사랑하셨습니다. 멸망의 죽음을 눈앞에 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 한 생명을 너무도 소중히 여기시며 아끼시는 것입니다.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나의 가치관으로 살것인가? 하나님의 가치관을 따라 살것인가? 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냐 아니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나의 편견과 아집을 버려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분노와 감정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순 반란사건 때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두 아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원수와도 같은 젊은이를 대신 자기의 아들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손양원목사님이 보신 것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생명의 소중함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며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죽어가는 한 영혼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까?
아들의 가치가 소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들의 가치보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가치를 더욱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는 가치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치있게 여기시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리들이 가장 가치있게 여기는 일들이 되어야 합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한지 4년 후 한 젊은이가 어느 모임에서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저는 그때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었습니다.
파편을 붙잡고 표류하는 내 곁으로 존 하퍼씨가 표류해 왔습니다.
그는 내게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했지요.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매우 갈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파도에 잠겼던 그가 물위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묻더군요.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
나는 역시 동일한 대답을 했지요.
'아니오'라고
저는 존 하퍼 목사의 마지막 피전도자였습니다.
청년은 구출된 후 독실한 신자가 됐습니다. 그의 간증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마지막까지 영혼을 구원한 존 하퍼 목사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요4: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추수를 기다리는 곡식처럼 많은 영혼들이 전도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나아가 전해야 할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이번 주간은 vip를 작정하는 주간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작정한 vip를 헌신하는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분도 빠짐없이 전도할 vip를 작정하시고 하나님 앞에 그 이름을 봉헌하여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많은 성도들이 vip를 작정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vip작정 요령은 우리가 가까이에서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이지만 이번 전도축제 기간에는 가까이에 있는 이웃이나 친구 친지들을 전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꼭 vip를 작정하십시오. 지금 작성하십시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내가 가져야 할 아버지의 마음은 하나님이 기뻐할 때 나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아파할 때 나도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아가서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시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순간 내 인생은 가장 커다란 기쁨과 감격을 갖게 되지요.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아픔을 하나 갖게 됩니다.
나는 구원받아 이렇게 행복한데 사랑하는 내 가족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슬픔이지요.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구원받는 그날까지 이 슬픔, 이 아픔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슴앓이요 내 가족 내 이웃을 향한 우리의 가슴앓이입니다. 이 가슴앓이가 없이 내 가족 내 이웃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가슴앓이는 참 소중한 아픔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묻고 계십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대답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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