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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성과 헌상(獻上) (고후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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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과 헌상(獻上) (고후 9:7)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백성의 성숙 문제가 ‘헌상’이라는 구체적인 표현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은 헌상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헌상(獻上)이란 위로 바친다, 헌신하여 높여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헌상에 있어서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대상’입니다. 대상을 잘 모르면서 제대로 섬기거나 높일 수 없겠지요. 제가 하루는 신학교 구내식당에서 처음 보는 분을 보고 신입생인 줄로 생각하여 서로 통성명 한 후에 편한 마음으로 함께 식사 했습니다. 식사 후에 새로 오신 교수님인 것을 알고는 ‘내가 무례를 범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의 신분에 걸맞을 마음가짐으로 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대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헌신하여 높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헌상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그분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신 6:5). 하나님은 내 모든 소유와 생명을 다 드려서 섬겨도 충분히 섬겼다고 생각할 수 없고, 지금보다 수천 배 더 높여드려도 그분의 영광에 합당할 만큼 높여드릴 수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인식한 사람이라면, ‘내가 이정도 헌상 했으면 족하다. 지금까지 충분히 헌신했다’는 생각을 결코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헌상을 열납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송구스런 마음 그리고 좀 더 온전히 헌상하는 삶이되기를 소원하는 마음가짐이 바른 태도이겠지요.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창 4:5) 아나니아는 하나님께 잘못된 마음으로 헌생했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행 5:1-5). 돈을 주고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사려했던 마술사 시몬은 저주를 받았습니다(행 8:18-20). 이러할 말씀들은 성도의 헌상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기분 내키는 대로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따라 합당하게 드려야함을 가르쳐줍니다. 먼저 받으시지 않는 헌상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헌상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헌금이기 때문에 헌금을 예로 들겠습니다.

첫째로, 예배당 유지비나 목회자 생활비처럼 내는 기부금은 헌상이 아닙니다. 이런 자세는 이미 ‘하나님께 드린다’는 인식과 경외심아 없어진 것이지요. 헌금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고, 목회자의 생활비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공하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둘째로, 부족한 하나님을 위해서 채워드리려는 자세는 동정이지 헌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으시며, 헌금은 단지 그분의 은혜의 사역에 참여하는 일입니다(고후 8:4). 셋째로,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지 대가로 생각하는 것은 헌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것으로도 되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에 감명을 받은 정도를 따라서 즉석에서 헌금 양을 조절하는 경우에 자칫 이런 대가성 의미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막고 헌상의 의미를 보다 잘 살리기 위해서 오늘부터 헌상 순서를 설교 앞으로 옮겼습니다. ④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의 십일조는 헌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시험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마 4:7). 말라기 3장 10절의 말씀은 십일조만큼은 하나님을 시험 해봐도 좋은 수단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헌상이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먼저 일주일 중에서 ‘주일’을 구별해서 시간을 드립니다. 그것은 나의 생명과 내 삶의 모든 순간들이 주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것이며, 나머지 삶의 시간들도 이처럼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원한다는 소원의 표현입니다. ‘헌금’은 내 모든 소유가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나머지 소유들도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자세로 사용하기 원한다는 소원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매주 예배 시간을 구별하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함으로써 공동체 전체가 왕이신 하나님을 시인하며,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셔서 그분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해 오심에 대해 감사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인도해주시도록 간구합니다. 이러한 헌상을 매 주일에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함께 함으로써, 다양한 일을 하며 흩어져 살고 있는 매일 매 순간의 삶도 개인이 아닌 교회의 한 지체임을 의식하면서 헌상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일 헌상을 통해서 표현되는 첫 번째 의미는 ‘고백’입니다. 성도는 예배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께 이미 온전히 드린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목회자만 전 생애를 드린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자신을 몽땅 드린 사람인 것이죠. 지난 한주 삶의 자리에서 모두 드린 사람으로서 살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의 고백을 하며, 다시 시작되는 한 주간은 그분의 뜻대로 살기로 다짐하고 고백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게 될수록 감사는 깊어집니다.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지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미가 깊어질수록 억지로 드리는 심정과 인색한 마음은 사라지고 자원하여 풍성하게 드리게 됩니다. 세 번째 의미는 ‘간구’입니다. 이미 드려진 나 자신과 소유 전부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주시도록.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보호와 인도와 채워주심을 호소하는 의미이지요.

내 영혼의 무릎을 꿇어 온전히 하나님께 절하는 자세, 하나님은 끝없이 찬양과 섬김을 받아 마땅하신 분이시며 영원히 모든 것을 드려 경배해야 할 분이라는 ‘마음의 태도’는 헌상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헌상의 깊은 의미를 한꺼번에 다 가르쳐 줄 수는 없을지라도, 매주 헌금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드리도록 함으로써 이런 기본적인 마음의 태도를 익혀가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지요. 어른에게 인사하도록 가르치지 않으면서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 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마음의 태도를 익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헌상의 의미를 알고 나면, 헌상이란 많이 드리면 많이 드릴수록 좋은 것이며, 사실은 일부분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몽땅 드려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삶에 서 드림을 실질적으로 느끼게 하는 헌금에서부터 헌상이 제대로 표현되고 있지 않다면, 개인이든 교회든 아직 미성숙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준비가 되었는가를 보려면 개인과 교회의 헌상 내용을 보면 어느 정도 파악이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헌상된 사람과 헌상된 공동체를 사용하셨지, 헌상할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을 쓰시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헌금이 헌상의 태도를 대표하는 가장 실제적인 표현이므로, 그 분량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량의 문제를 민감하게 언급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권하면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약 성경은 ‘자원하여 풍성하게’ 헌금하도록 가르치며,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헌금하지 말도록 간략하게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은 얼마를 헌금하라는 것이 자세하게 명령합니다. 십일조는 기본적으로 드리고, 그 외에 첫 열매나 낙헌 예물 등 여러 종류의 헌상들을 드리라고 말합니다. 이를 분석한 학자에 따르면 많게는 십의 삼조를 드렸고, 평균적으로는 십의 이조 정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구약이 이처럼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당시 구약의 교회가 미성숙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처음부터 자율을 허락한다는 것은 무관심이며 방종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는 구체적으로 일일이 하나씩 가르치며, 장성하여 마음에 원칙이 제대로 서 있으면 그제야 자율에 맡깁니다.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인색함으로’하지 않는 다는 것도 처음부터 자기 형편을 기준으로 정할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인색하지 않음’의 기준을 따라 생각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자원하여 풍성한 헌금을 할 만큼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성경적 기준이 원칙으로 몸에 익도록 권면하고 지도해줘야지, 축복을 미끼로 헌금하도록 구슬리거나 억지로 풍성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당시 모든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납하던 초대 교회 분위기에 들떠서 분량에 넘치게 억지로 헌금하려다가 시험에 들었고 심판받았습니다. 이처럼 분위기 때문이나 혹은 체면과 직분 때문에 억지로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죄가 됩니다. 미숙하면 미숙한 수준에서 자원하여 풍성하게 드리면 됩니다. 하지만 참 성도라면 자신의 미숙함을 깨달았을 때 헌금 적게 해도 된다는 사실로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성숙을 향해서 나아가려는 마음, 자원해서 풍성히 헌금할 수 있는 상태로 자라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 21:2-4)하신 일이 있습니다. 두 렙돈은 노동자 하루 품삯의 1/40입니다. 오늘날 일당을 5만원으로 계산하면 1,250원 정도 됩니다. 예수님은 헌금의 양 자체가 아니라 그 헌금이 대표하고 있는 과부의 헌상하는 마음 태도를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갸륵하다고 말씀하지 않고, 많이 헌금했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의 생활비 전부를 넣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원하여 풍성히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원칙에 비춰 보면 우리의 헌상은 부족하고 잘못된 마음가짐으로 오염된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서 열납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 속에서 헌금을 통한 헌상에도 성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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