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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세월의 절망을 딛고 일어서게 하라!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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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절망을 딛고 일어서게 하라! (요 5:1-9)

신앙이란 언제나 최악에서 최선을 만들어내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최악의 상태가 최상의 상태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갑자기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의 태도와 자세입니다.  인생 여정에서 태도는 어떻게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이 생각되지만 인생의 최고 행복 요소입니다.  태도는 인생을 성취하는 기본 요소입니다.  결국 지식도, 식견도 그의 태도에 의해서 빛나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환경이 나빠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태도가 나빠서 불행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반드시 역사는 일어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자세가 모든 인생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어떤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으면 승리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만,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쉽게 얻어지는 성공은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바른 태도와 올바른 습관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큰 역사를 기다리며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믿음과 삶에 대한 열망을 붙들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안에서 다시금 희망을 선포하며 일어나십시오.  일어나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하늘의 빛을 비추십시오.

대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도 무능력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부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를 붙들고 믿음으로 나가면 크고 기이한 일들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사랑하는 여러분, 구하십시오.  기왕이면 더 크게 구하십시오.  기왕이면 믿음으로 허풍을 크게 떨고 다니십시오.  허풍을 떨다보면 허풍쟁이가 되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모름지기 진실하고 정직해야 하지만 선포하지 못하면 결단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허풍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말 그대로 허풍에 지나지 않지만,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허풍은 선포인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입으로 선포해야 됩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때마다 선포되어져야 됩니다.

보십시오.  "여리고야, 무너져라!"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허풍이 어디에 있습니까?  "홍해야, 갈라져라!"  인류 역사에서 이것보다 더 웃기는 허풍이 또 어디에 있었습니까?  견고하게 서 있는 여리고 성을 향하여 그냥 돌기만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여리고야, 무너져라!"  이것은 지나가던 똥개도 웃을 허풍입니다.  도도하게 철철 넘쳐흐르는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높이 쳐들고 "홍해야, 갈라져라!"  이것은 잠자던 개가 웃을 허풍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역사상 가장 웃기는 허풍도 믿음으로 선포를 했더니 가장 위대한 역사가 눈 앞에서 펼쳐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선포하고 눈으로 보며 행동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허풍을 쳐 놓으면 기도가 나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속에 나타나는 믿음의 역사를 선포하거나 시인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이 복음은 도덕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만을 추구하기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 생명 전체에 실제로 복을 주는 것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입을 넓게 여십시오.  더 넓게 여십시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비웃더라도 믿음의 허풍쟁이가 되십시오.  그리고 끊임없이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미래를 선포하십시오.  믿음으로 선포할 때에 반드시 역사는 일어날 것입니다.  학문만으로는 성공할 수도 업고 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자기 속에 나타난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자꾸 시인할 줄 알아야 됩니다.  시인을 해야 그 일을 이루기 위해 갑절로 노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는 12월 23일을 귀빈초청축제로 정해서 2007년 한 해를 사랑하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 아름답게 장식하려고 합니다.  이 날의 축제는 우리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추수 마당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년동안 씨앗을 뿌려왔던 그런 복음의 열매를 거두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전도하기를 소원해서 기도해 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족, 우리들의 친지, 친척, 이웃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던 모든 사람들.  사랑과 섬김으로 우리의 마음을 함께 나누었던 모든 귀빈들을 교회로 초청해서 직접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메시지를 듣게 하고 그리고 신앙을 결단하는 결신의 기회를 그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시점에서 오늘의 본문을 통해 전도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우리는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기적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7가지의 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에 세 번째 기적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런 사건들을 기록할 때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2장 1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여기에서는 첫 번째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54절에 보면 두 번째 기적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매우 일관성 있게 계속해서 표적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차를 몰고 고속도로에 진입하면 거기에 '서울' 혹은 '부산'이라고 하는 표지판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표지판 자체가 서울이나 부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울이나 부산으로 가는 방향을 지시할 따름입니다.  성경 가운데 특별히 요한복음에 기록된 기적들은 기적 그 자체를 보여주는데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구나'  그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이 우리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표적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서에 기록된 이 모든 표적들은 우리들에게 도대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 해답을 우리는 요한복음을 마무리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행하신 기적들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일곱 가지 기적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요한복음이 선택적으로 일곱 가지 기적들만을 기록한 이유를 우리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표적의 사건들을 기록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을 읽을 때 단순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는 일, 전도하는 일에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기적을 읽어내려 갈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세 번째 표적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전도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요즘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눈,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웃들을 바라보는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건이 일어난 때를 보여줌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이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를 명절 때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명절이 되면 국내외로 흩어졌던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옵니다.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 성은 문자 그대로 한 주간 동안 축제의 불야성을 이루게 됩니다.  물론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마는 그밖에도 이 명절 기간에는 풍성한 음식이 있고, 풍성한 음악이 있습니다.  그리고 춤의 축제와 향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만나는 그리웠던 이웃들과의 만남의 한 마당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즐거움에 흥청거리는 이 축제의 마당에서 예수님은 그 축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그늘 속에 있는 어떤 사람들을 주목하십니다.  그들이 누구였을까요?

본문의 2절과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주목하셨던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과 제대로 걷지를 못하는 다리 저는 사람들, 혈기 마른 사람들, 중풍병자들과 같은 병자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소위 육체적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핸디캡 이상으로 영적인 핸디캡으로 말미암아 아파하는 사람들,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영적으로 도무지 걷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영적으로 도무지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 이런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웃들을 주목하고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만지심을, 그리고 예수님의 눈길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도 오늘 본문에 보면 한 병자를 주목하십니다.  본문 5절과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38년된 병자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병을 얼마동안 앓았다고 했습니까?  38년입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병자입니다.  기가 막힌 세월입니다.  우리가 한 두 달만 앓아도 너무 힘든데, 아니 일년 이년도 견디기 어려운데 38년을 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쯤 되면 삶의 모든 희망을 빼앗겨버린 그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38년이라는 숫자를 들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슴이 막히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38년이라는 숫자는 절망과 방황을 나타내는 숫자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하는 햇수가 40년이라고 말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38년입니다.

그것은 바로 절망의 숫자였고, 그것은 바로 방황의 숫자였던 것입니다.  그 정도를 앓고 방황했다면 이제 모든 것을 빼앗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런 상실의 세월, 그리고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을 체념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냥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절망을, 그의 슬픔과 그의 마음 속에 있었던 모든 안타까움을 우리 주님께서는 아셨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님께서 그를 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전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예수님의 그런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 이웃들의 모습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몰라서 절망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예수님을 알지 못해 모든 것을 체념할 수 밖에 없는 희망을 빼앗긴 우리의 이웃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병자가 누워있던 곳이 어디였습니까?  베데스다 연못가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 연못의 이름을 구태여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베데스다'의 뜻을 아십니까?
'베데스다'는 히브리말로 두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벧'이라는 말은 '집'이라는 뜻이고, '헷스다', 혹은 '헷세드'라는 것은 '은혜', '자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데스다라는 말은 은혜의 집, 혹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삶의 마당 저 건너편의 그늘에서는 어쩌면 주님의 이런 사랑, 주님의 은혜의 손길과 자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눈에 보여지십니까?  그들을 주목하고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전도의 시작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5장입니다.  5장 전에는 몇 장이 있습니까?  제가 너무 어려운 심오한 질문을 했습니까?  4장입니다.  4장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출연하고 있습니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만나주시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목이 말랐던 여자, 끝없이 외로웠던 여자,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영혼의 생수를 마시면서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전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 전도가 끝나갈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너희들의 눈을 들어서 제발 이 세상이라는 밭을 똑바로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밭에서 외로워하고 고단해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좀 바라보라는 겁니다.
"바라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발 눈을 뜨십시오.  눈을 뜨시기를 바랍니다.  눈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눈을 들어서 바라보십시오.  복음을 기다리는 ,예수님의 눈길과 손길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마음의 우리의 이웃들을 제발 좀 주목하십시오.  그들이 베데스다 못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베데스다 못가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의 귀빈들, 하나님의 귀빈들, 소중한 사람들.  때로는 그들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때로 그들은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던 어떤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목해서 보라고 말씀하시는 우리들의 귀빈들은 누구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들을 예수님의 눈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심장으로 바라보는 그 순간이 전도가 시작되는 순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번째로 예수님의 질문을 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전달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본문 6절 하반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38년된 병자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 앞에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본문 7절입니다.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7절에 기록된 이 사람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절을 반드시 이해하셔야 합니다.  4절에 보면, 그 당시 베데스다 연못가를 둘러싸고 전해 내려오는 일종의 민간 신앙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는데 그 연못에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물 속에 들어가면 그 사람의 병이 나을 수가 있다.  그리고 7절을 다시 읽어보면,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그런데 그 물이 움직일 때에 저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그 물에 먼저 내려갈 수가 없답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나는 그럴 희망도 없습니다."

물론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가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데 나는 그런 희망도 기댈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이 사람의 절망적인 고백입니다.

삶의 희망을 포기한 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정녕 낫고자 하느냐?"
너는 아직도 낫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이 질문이 이 사람의 마음 속에서 무엇을 불러 일으켰을까요?
이 질문의 효과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저는 그것이 작은 불씨 같았을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바로 희망의 점화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은 절망에 익숙해 가고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숙명으로 돌리고 체념하고 '이제는 집에 가야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기 직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 질문이 들려온 것입니다.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귀빈들에게 우리가 전달할 예수님의 질문, 사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인생이 좀 변화되기를 원하느냐?"  "지금 그대로 살겠니?"  "하나님, 나 이대로는 살 수가 없어요.  좀 달라지고 싶어요."  "그래, 네가 달라지고 싶니?"  이 질문입니다.  "네가 구원받고 싶니?"  그렇다면 이 질문을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전도는 온 세상 사람들이 묻고 있는 이 질문을 우리가 예수님의 도구가 되어 그 질문을 전달하는 사건입니다.  "선생님, 언제까지 그렇게 사시겠어요?"  "아주머니, 좀 변화되고 싶지 않으세요?"  "형제여, 구원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친구여, 너 이제는 한 번 소망을 발견하고 싶지 않니?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고 싶지 않니?  너 이제 너 자신을 믿는 일에 지쳤다면 한 번 예수를 믿어보지 않을래?"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질문을 전달하는 우리들의 전도의 사건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질문을 본문의 방식으로 바꿀 수가 있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이 질문이 던져진 순간 이 사람이 무엇을 느꼈는지 성경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믿기에는 아마도 이 사람의 내면의 깊은 곳, 저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아마 이런 생각이 일어났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래, 나도 낫고 싶어.  나도 구원받고 싶어.  나도 변화되고 싶어.'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역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 속에 희망을 점화하는 하나님의 질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이 거룩한 질문을 가지고 이웃들에게 가서 바로 이 질문을 주님의 이름으로 던지는 그 순간 내 사랑하는 이웃들의 마음 깊은 곳에 거듭남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웃들과 더불어 나누며 그 말씀을 가지고 그들의 영혼의 문제를 질문하고 던지는 순간 그들의 마음 속에 그들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거룩한 씨앗이 뿌려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전도는 바로 예수님의 이 거룩한 질문을 전달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그 순간 우리의 인생은, 우리 이웃들의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주간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이 거룩한 질문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형제여, 이제 좀 다르게 살고 싶지 않으세요?  한 번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으세요?"  이 거룩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사랑하는 여러분, 내 사랑하는 귀빈들의 이웃들 속에 희망의 불꽃이 점화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바로 예수님의 질문을 전달하는 사건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도가 무엇입니까?
전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말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걷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어났습니다.  본문 8절과 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일어났습니다.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걸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로 하여금 일어서게 합니다.  그 말씀이 그를 고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그를 살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도대체 주의 말씀이 뭐길래?  하나님의 말씀이 뭐길래?

요한복음 6장 63절의 말씀을 찾아서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 말, 주의 말씀이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영이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이웃들과 나누는 그 순간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성령이 사용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나누는 그 순간 성령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 말은 영이요, 뿐만 아니라 생명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나누는 순간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명이 들어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새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38년이나 앓으면서 누워있던 이 사람에게 도덕이나 혹은 윤리를 강론한다고 하십시다.  위대한 도덕의 교훈을 나눈다고 해서 이 사람이 일어나겠습니까?  이 사람에게 인생 철학을 강론한다고 해서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일어났습니다.  무엇이 일어나게 했습니까?  주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하늘과 땅을 창조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주의 말씀이 무에서 유에서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만물을 창조하던 그 말씀, 죽은 나사로를 살리던 그 말씀, 중풍병자를 일으키던 그 말씀, 사랑하는 여러분, 동일한 주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위탁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나누는 순간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이웃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걸어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소위 진화론을 생각하면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신앙과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진화론을 주창한 찰스 다윈을 무신론자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찰스 다윈이 신학교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는 영국 성공회의 신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했습니다.  이 성공회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를 졸업했던 사람이 바로 찰스 다윈입니다.  그는 무신론자로 오해받는 것을 제일 힘들어하면서 자신은 결코 무신론자는 아니라고 여러 차례 밝힌 바가 있습니다.

그는 한때 진화론을 연구하기 위해서 남미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브라질에 있는 정글의 어떤 부족에게 들어가서 연구를 한 일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거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동물 수준의 삶을 살고 있었던 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찰스 다윈은 사람과 별로 차별성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윈은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들이 사람 같은 사람, 사람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먼 미래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간 후에 찰스 다윈이 그곳을 다시 방문하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변해 있었습니다.  놀랍게 변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문화적 삶을 영유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고 그들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소리쳤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선교사들이 들어왔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답니다."

말씀이 그들을 살려낸 것입니다.  그것은 찰스 다윈에게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그의 이론을 수정하기 시작하고 여러 차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마지막 병상에 누웠을 때, 그가 최후로 찾았던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날의 그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기 전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겼던 최후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나의 구주시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변에 있는 수많은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 그들의 인생이 너무 늦기 전에 그들에게 복음을 통한 인생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요?
무엇으로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절망의 세월 속에 눌려온 이웃들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울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말씀입니다.  부활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입니다.  구원의 말씀입니다.  복음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귀빈들에게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내 사랑하는 이웃들을 말씀의 자리에로 초청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언제입니까? 12월 23일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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